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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Sep 10. 2023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하루 더 가난해지는 시대를 담담히 받아들인다

존 에버렛 밀레이 <신데렐라(Cinderella)>, 1881, 125 x 88.9 cm, 뉴베리 앤드류 로이드 웨버 재단 콜렉션 

19세기 영국의 최고 미술 신동이었던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1829~1896)는 1881년, 「신데렐라(Cinderella)」를 그렸습니다. 맨발에 제멋대로 자란 머리, 허름한 옷, 닳고 변색된 옷깃이 소녀의 형편과 고단함을 보여줍니다. 지하 창고 같은 곳에서 다리가 벗겨진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찍짝 달려드는 쥐들이 보이지 않는 어둡고 습한 공간을 보여줍니다. 왼손으로는 몸만큼 커다란 빗자루가, 오른손으로는 화려한 공작의 깃털을 쥐고 있습니다. 반듯하게 머리에 올린 붉은 모자가 그녀의 과거나 취향을 엿보게 할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그녀의 표정입니다. '신데렐라'라는 제목 없이 얼굴만 보았다면 '빅토리아 여왕'이라 말해도 아쉽지 않은 품위 있고 단호한 얼굴입니다. 어떤 차림이건 어떤 장소이건 상관없습니다. 그녀는 숙녀로 살고 있습니다. 빗자루를 들고 궂은 일을 할 때도 숙녀이고 공작 깃털을 들고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있을 때도 숙녀입니다. 

저는 그녀가 빗자루질을 할 때에도 결코 찡그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녀가 왕자를 만날 기대를 한 번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끝내 빗자루질만 하였더라도 자족하는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삶을 오로지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녀이니까요. 


'부모보다 가난해지는 최초의 세대'라는 문장이 잊을 만 하면 들린다. 아니, 한 번 들어도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문구다. 풍요 내에서 결핍을 겪는 '새로운 가난'의 시대가 열린다고 한다. 사회 경제적 불평등이 심각해져서 부모의 지위가 고스란히 상속된다. 노력한다고 현실을 극복하는 일이 더욱더 어려워진다고 한다. 실제로 물가상승의 공포는 피부를 뚫고 들어오고 있다. 생필품을 새로 주문할 때마다 천 원씩 이천 원씩 달라지는 숫자에 위축된다. 마트에 가서 시장을 보면 몇 개 안 담았는데도 순식간에 오륙 만원이다. 얄팍한 지갑 탓에 좋은 밥 한 번 두 번 사먹는 것도 꺼려진다. 어떤 대기업은 성과급이 얼마 나왔다고 하는데 딴세상 얘기다. 세상 천지 뭐든 다 오르는데 내 월급만 안 오르는 것 같다. 가만히 있으면 매일 가난해지는 기분이다. 자연히 몸과 마음도 위축된다. 소셜 미디어에 비치는 모르는 이들의 모습, SNS의 화려한 포장과 허울을 알면서도 마음만큼은 흔들린다. 사람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사는 존재라던데, 생존을 위협받는 경제적 문제를 맞닥뜨리는 순간에는 정말이지 오죽할까. 다 포기하고 막 살고 싶은 마음이 마구 솟아오른다.  


실로 하루 더 가난해지는 시대다. 불안이 당연한 시대다. 그러다 보니 자칫 부가 목적이 되아버린다.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 부른다. 신통한 이는 돈을 '돈 귀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지전능(錢知錢能)을 무기로 수많은 사람을 노예로 삼는다. 이건 부자들 이야기만이 아니다. 가난한 이라고 이러한 주인을 섬기지 않는 것이 아니다. 부가 목적인 애처로운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이 시대에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은 무엇일까. 이러한 시대에 불행을 온전히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숙녀라 해도 다르지 않다, 힘든 일이다. 그리고 아마 우리는 분명 얼만큼은 더 가난할 것이다. 곧 좋아질 것이라는 거짓말은 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대부분은 더 힘들어질 확률이 높다. 이 두려움을 외면하지 않아야 우리는 현재를 살 수 있다. 물론 분노를 완전히 삭이지는 못하리라. 불안이 완전히 사그러지지는 못하리라. 분노와 불안의 불씨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은 그럼에도 수용이다아무리 분노하고 움직여도 사회 불평등은 하루 이틀만에 해결되지 않을 것이며,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나의 불안은 한순간에 해소되지 않는다. 내 생애 언젠가는 해결될 수도 있겠지만 그 때가 올 때가지 계속 분노하며 두려워하며 살 수는 없다. 현재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은 어렵지만 어렵지 않다. 담대한 수용과 담백한 감사다. 심리학적 연구에 따르면 감사는 도덕적 덕목을 선행한다고 한다. 감사는 자신이 이룬 것을 은혜로 여길 수 있는 능력이며, 이러한 은혜를 되갚도록 행동하는 동력이 된다. 행동을 만드는 자기 통제력과 자기 절제력은 성숙한 인간이 갖춰야 할 기본 자질이다. 숙녀라면 이러한 힘을 당연히 지녀야 할 터다.  


예의가 몸에 자연스레 밸 때까지는 수많은 반복이 필요하다. 훈육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교양이나 품위 역시 아무나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두 번의 노력으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인정과 존중을 얻을 수가 없었으리라. 감사도 그렇다. 감사한 마음은 전혀 들지 않지만 감사하는 말을 하고 감사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감사를 일단 시작한다. 적극적인 행동은 의외로 내면을 크게 바꾼다. 예의 자체가 상대의 인격과 권위를 수용한다는 전제임을 이해한다면 받아들인다는 개념 역시 다르지 않다. 인간의 내면에 또 다른 감각을 부여한다. 마음의 감각이 수용하는 넓이가 다른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진동하지 않는다. 


인스타그램에서 인플루언서의 오마카세 사진을 본 후에 삼각김밥으로 점심을 때우더라도 감사의 마음으로 소중한 밥알 한 알 한 알의 질감을 느끼면 그 식사는 영혼 없는 오마카세보다 낫다. 값비싼 호텔에서 호캉스를 즐기지 못하더라도 내 손으로 깨끗하게 빨아 말린 이불에 만족할 수 있다면 낡은 이불이 소중한 잠을 가져와 줄 것이다. 감사는 자신을 대하는 기초 예의와 품격이다.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언제나 마음의 영역에 있다. 돈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마음이 빈곤한 것은 더 문제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마음이 빈곤하여 차마 보기도 민망한 사람들을 우리는 매일 뉴스 뿐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체험하고 있지 않는가. 무슨 그룹 모녀 패밀리 같은 '갑질남녀'들... 부요와 천박이 함께 갈 때 그보다 더 비참한 모습이 없다. 차라리 비천과 천박이 함께할 때가 덜 민망하다. 한편으로는 비천과 품위가 함께 할 때 가끔은 더 빛난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든 누군가의 시간이 눈 앞에 피어났기에. 시커먼 검은 물 가운데 고개를 꼿꼿이 들고 활짝 핀 하얀 꽃을 수이 잊을 수 있겠는가. "부귀에 처하여선 부귀를 행하고 빈천함에 처하여선 빈천함을 행하며이적에 처하여선 이적을 행하고 환란에 처하여선 환란을 행하니군자는 들어가는 곳마다 자득하지 않음이 없다.)素富貴 行乎富貴 素貧賤 行乎貧賤 素夷狄 行乎夷狄. 素患難 行乎患難 君子無入而不自得焉.)""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라는 용(14장)과 빌립보서(4:12)의 말이 전하는 은은한 감격이 그 증거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같은 숙녀는 아무나 될 수 없지만 진흙에서 핀 연꽃 같은 숙녀가 되는 것은 누구라도 가능하다. 단언컨대 연꽃의 아름다움은 진흙 같은 빈천, 그리고 안개 같은 불안, 그 모든 것을 포용하는 담대함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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