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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Aug 23. 2023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

가끔은, 본성을 넘어선 책임감을 지닌다

베르톨트 볼체(Berthold Woltze, 1829~1896) 「짜증나는 신사」 캔버스에 유채, 75X57cm, 1874, 개인 소장

독일의 장르화가 베르톨트 볼체(Berthold Woltze, 1829~1896)의「짜증나는 신사」를 한 번 보고 잊어버릴 수 있는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제목을 빌어 주인공인 척하는 왕재수 신사 때문이 아닙니다. 겁먹은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담고도 끄떡 없이 담대하게 꿋꿋한 여자의 표정과 의연한 태도 때문입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매력적이어서거나 혹은 만만해서거나, 세상은 자꾸 여자에게 위협을 가합니다. 심지어 상을 당한 것이 자명한 검은 드레스에 검정 리본, 검정 모자 차림인데도요. 당대 유행이었던 피에르 고디요(Pierre Godillot) 카펫 가방만이 그녀의 멋쟁이 시절을 잠시 엿보게 합니다. 

여자 혼자 삶의 현장에서 분투하다보면 꼭 저렇게 지분덕거리는 남자들이 있습니다. 애도를 보호받아야 할 상중인데도 저러니 일상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꼭 남자들만 그런가요, 여자들도 그럽니다. 솔직히 못돼쳐먹은 여자들 남자들만큼 많습니다. 당장이라도 일어서 남자에게 욕을 한사발 내뿜고 이 기차에서 내려버려야 할 것 같지만 여자는 꿋꿋이 자리를 지킵니다. 여자에게는 이 기차를 타고 꼭 맞는 시간까지 꼭 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요. 지켜야 할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저는, 이 여린 여자에게 꼭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의 손길은 타이밍의 모습으로 좋거나 또는 나쁘게 발현되는데, 이것이 우리를 초보운전 딱지에도 불구하고 벤츠를 몰고 드넓은 고속도로를 타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기도 하고, 부르튼 맨발로 한없는 자갈밭과 가시덤불의 길 위로 가도록 느끼도록 하기도 한다. 지난 일이 년간이 나에게는 정말 그랬던 것 같다. 특히 이번 주의 연속된 어떤 날들, 나의 공적인 일터에서는 누군가에게는 한 번 일어나기도 어려운 일들이 폭탄 터지듯 터졌다. 요령이라곤 없이 허술한 나는 당연히 만신창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신은 이 어려움 가운데 마음 따뜻한 동료들만큼은 가득 채워주셨기에 함께 퇴근하지 못했던 소중한 동료들은 나를 감싸안으며 귀한 위로를 부어주었다. 당시 뉴스에서는 나와 비슷한 어려움으로 세상을 등졌던 어린 동료의 이야기가 연일 보도되고 있었기에 나를 보는 이들의 마음 역시 가히 가볍지 않았으리라. 


"아유 괜찮아요 괜찮아요. 절대 안 죽어요." 연신 농담을 던지며 동료들을 보내고 홀로 된 이후에야 나는 입술을 꼭 깨물고 더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절대 죽지 않아요. 늙고 병든 부모가 있거든요. 저는 절대 죽을 수 없어요."


살면서 내가 처음으로 부러워했던 사람은 부모가 등록금을 대 주는 사람이었다. 살다 보니 내 곁의 어떤 사람들은 부모가 스튜디오의 월세도 내 주고, 차를 사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집을 사 주기도 한다. 너무 월급이 적어서 살기가 힘들다고 오일 파스타가 너무 먹고 싶다고 엉엉 울어서 밥을 몇 번 사 주었던 새파란 후배가 결혼할 때가 되니 부모님이 집을 사 주셨던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현실 감각을 잃기도 하였고... 세상에 그러한 부모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리고 나 혼자의 힘으로는 그 간극을 결코 줄일 수 없다는 것에 아득한 절망을 느꼈다. 

 

누군가에게는 대학원 등록금을 대 주고 차를 사 주는 부모가 있지만 나에게는 생활비를 보태야 하는 부모가 있다. 혹여라 길거리에서 뒷목이나 심장을 붙들고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 부모가 있다. 그런 부모는 한편으로는 무거운 족쇄였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끊임없이 일하게 하는 동력이기도 했다. 물론 이것이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을까? 나는 다소 냉소적인 사람이 되었고 일중독자가 되었으며 때때로 번아웃 현상으로 고통받고 불면증으로 시달리는 사람이 되었다. 크게 아팠던 몸뚱이를 이끌고 연약하게 살면서도 사람의 육체는 원래 반토막인 듯 적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돌려막으며 사는 사람이 되었다. 예민하고 유연하고 강하지만 어디에서나 사랑받지는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나를 불편해하지만 아끼고 있다.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은 설령 칙칙하고 우울한 색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품위의 영역에 있다. 누군가는 이것을 신적인 행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인간이 본성을 거스른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 년 이 년 살다 보니, 세상에는 누군가의 삶을 책임지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연예인들 사이에서는 "어쩌다 보니 가장의 역할을 하게 되어서 blah blah~" 안타까운 이야기가 종종 들려 낯설지 않은 스토리이지만, 사람들은 "그건 거액을 벌 수 있는 미남 미녀 연예인이니까" 하면서 무심히 지나쳐버리곤 한다. 그러나 나 하나 쓰기에도 부족한 월급을 받아 절약 또 절약하면서, 사이드 잡을 하면서 가족을 지탱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젊고 예쁜 나이에 연애를 하거나 사시사철 새 옷을 사입고 여행을 가는 일이 그와 그녀들에게는 너무나 낯설다. 단 일 쓴 일 가릴 수 없다. 어떤 사이드 잡이어도 그들에게는 감사할 뿐이다. 그런 사람들은 이 생의 사람들이 밟는 세상의 이치로 살고 있지 않다. 이 작은 몸과 제한된 지능과 부족한 재능을 넘어서 할 수 없는 일을 하고야 만다. 


제 아무리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은 세대 중 하나이라도 여자로서 이러한 삶을 사는 이보다는 남자로서 여러 명을 책임지는 이가 셀 수 있는 숫자로는 더 많았다. 가정에 적지 않은 돈이 있어야 유지할 수 있다는 예술계에서는 더 그랬다. 그런 면에서 예술하는 여자인 나의 흔치 않은 경험은 독특하고도 꽤 귀했다. 


고깃집에서 고기를 자르면서 당했던 숱한 성추행과 성희롱을 기억한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다가 돌진하는 덤프트럭에 치일 뻔했던 아찔한 순간을 기억한다. 택시비를 아끼려고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끊어진 길에서 피투성이가 되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다른 강사들 다 먹는 급식비를 내지 못해 삼각김밥으로 때우던 부끄러움을 기억한다. 아픔과 수치는 그래도 견딜 만했다. 커리어라는 이름을 한 돈 문제로 등에 칼을 꽂는 배신과 막막함을 겪어보면 성희롱 따위는 약과로 느껴졌다. 욕 정도로 끝낼 수 없었던 어떤 가해자들의 얼굴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가끔은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던... 그 어떤 순간에도 나는 일을 쉽게 포기하거나 나 자신을 버릴 수 없었다. 나에게는 나 말고도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이 있었다. 내가 책임져야 했던 다섯 가족의 집세와 동생의 학원비, 가끔은 치료비까지도 내 무거운 족쇄들이 나를 지탱했다. 나는 한 순간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존엄이었고 나의 명예였고 나의 축복이었다. 


몇 년 전 나의 아름다운 분홍 책에, "생은 그저 어이없이 당하는 것뿐이라는 걸"이라는 문장을 썼다. 이것이 비단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터, 아무리 피하고 또 피해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도망치고 싶을 때, 멀리멀리 달아나버리고 싶을 때, 이미 카운트 펀치를 여러 대 맞고 나서도 그 자리를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면서 하루하루의 책임을 마무리짓는 것. 그게 어이없이 당하면서도 끝내 의연한 눈빛을 얻어버리는 숙녀의 수행 같다. 이 삶의 경로는 나에게 얽힌 수많은 책임감들이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숙녀가 되기에 무척이나 유리한 사람이었다고, 이제 와 나의 무겁고 애틋한 족쇄에 더욱 감사한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또 다시 찾아올지라도 나에게는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 그래서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내가 살뜰하게 돌봐야 할 가난하고 병약한 아비와 어미가 나에게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큰 힘이다. 나의 책임이 나의 강함이고 나의 품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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