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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Aug 23. 2023

머릿결과 피부와 구두, 그리고 몸매

돈으로 가꿀 수 있는 아름다움을 넘어선 아름다움을 지닌다


로살바 카리에라(Rosalba Carriera, 1675~1757), 「나이든 숙녀의 초상(portrait of an Old Lady)」, 1735년경, 종이에 파스텔, 50×40

18세기 이탈리아를 호령했던 여성화가 로살바 카리에라(Rosalba Carriera, 1675~1757)의 「나이든 숙녀의 초상(portrait of an Old Lady)」은 그녀의 노년, 60세 무렵의 얼굴을 그린 그림입니다. 그녀에게도 화려했던 젊음이 있었습니다. 여성화가 중에서는 대장이라고 불릴 만큼 명성을 얻었고, 열심히 노력해서 자긍심 역시 쌓았습니다. 

이제는 지긋한 나이, 초라한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인 채 편안해진 미소를 드러냅니다. 젊은 시절 탄력 넘쳤던 피부와 매끈했을 턱선은 이미 사라지고 얼굴에는 피부 트러블까지 심하게 올라왔습니다. 후덕해진 목과 턱과 대조되는 적은 머리숱 역시 서글픕니다. 하지만 그녀는 곱고 단정하게 빗어 틀어올렸습니다. 할 수 있는 한 말끔한 모습을 보이도록 노력했습다. 

분명 거울 앞에 선 채 오래오래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오래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아주 여러 번의 미러링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담대한 그녀는 결코 초라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인생 그 자체가 그녀이니까요. 그녀의 강인함이 곱게 낡은 육체를 뚫고 나옵니다. 



정한아 작가의 소설 〈친밀한 이방인〉을 원작으로 한 OTT 드라마 《안나》에서서는 홍천의 가난한 양복점 딸인 유미가 평창동 부잣집 딸 안나의 신분을 빌어 거짓된 상류층 인생을 산다. 어느덧 대학교수 모양에 익숙해진 유미는 “난 사람이 여유가 있는지 없는지를 볼 때 머릿결과 구두를 봐요.”라 말하며 사람의 신분을 판단한다.  돈의 여유와 시간의 여유를 들여 관리를 할 수 있는 형편인지를 본다는 것. 같은 맥락에서 누군가는 (상대의) 피부를 본다고 하고 누군가는 몸매를, 누군가는 손발톱을 본다고 한다. 누군가는 눈썹을, 누군가는 거북목을 본다고 하며 하다못해 눈썹산의 각도 하나하나를 따져 묻는다. 모두 눈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을 치장하는 이야기. 모두 그 사람의 재력을 가늠하는 이야기이다. 진짜 재력을 확인하려면 겨울 코트의 질과 개수를 확인하라고 한다. 브랜드가 눈에 띄게 보이는 옷보다는 시그니처 디자인으로 브랜드를 확인할 수 있어야 명품이란다. 귀티니 부내니 하며 세상 사람들 참 보이는 것에 참 많은 에너지를 쓴다. 참 서로를 부한 사람 빈한 사람으로 갈라놓으려고 고생한다. 


그러나 그러할 수밖에. 우리는 근본이 너무나도 얄팍한 본능의 인간이니까. 나 역시도 ‘귀티’ ‘부티’의 굴레에 자유롭지 못함을 고백한다. 누가 자유롭겠는가. 일 년 이 년 지날수록 피부는 거칠어지고 탄력이 사라지며 머리카락은 가늘어지고 윤기가 떨어지고 시력마저도 떨어져 초점이 수이 흔들리는걸. 솔. 직. 히. 초라하다. 색 바래고 힘없는 털과 사그러드는 눈빛의 강아지처럼 애처로워 보이지 않으려고 비오틴을 먹고 콜라겐을 삼키고 헬스클럽을 간다. 아유 약 먹기도 귀찮아 죽겠어요. 를 입에 달면서. 


그러나 외적인 것에만 우리의 인간적인 가치가 유지된다면, 우리의 삶은 어찌될 것인가. 그런 식이라면 우리의 젊음, 아름다운 생명의 절정 이후로 우리는 모두 내리막이다. 나이들면 들수록 우리의 존재는 위태로워지는 것이리라.   


그러나 우리는 이미 경험한 적이 있다. 외적으로는 결코 말끔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내적으로는 찬란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을. 우리가 사는 곳 어디에서나 그런 사람들이 있다. 타고난 DNA로 군살 없이 완벽한 몸매를 갖춘 사람도 아닌, 풍성한 머리숱을 자랑하는 사람도 아닌, 근육 없는 마른 몸이나 축 쳐지고 늘어진 뱃살을 가지고도 꼿꼿이 서 있는 사람. 얼룩덜룩한 회색 머리와 주름 가득한 까칠한 피부를 가지고도 형형한 눈빛으로 세상을 꿰뚫는 사람. 시끄러운 거리의 시시덕거리는 소리 가운데 거친 숨소리로 구별된 말을 하는 사람. 우리들은 그런 사람들의 예리함을 한 번쯤은 경험한 적이 있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자기관리’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지는 혹독한 다이어트, 영양제 만찬, 교양이라 부르고 자기계발이라고 읽는 학원 순례, 등등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은 환상이다. 모두 다 우리의 늙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루어지는 부인과 도피인 것을 알면서도 그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슬픔이라는 것을. 박모 대통령의 삶이 안타까웠던 이유는 자신의 늙음을 받아들이지 못함, 그 어리석음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찾아 헤맨다. 그러한 사람이 제발 곁에 있기를. 그러한 사람이 나에게 지혜를 주기를. 그러한 사람이 내 생의 희망을 주기를 바라면서. 존재감이 달라서 공기의 색이 변하는 그런 사람을 우리는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 없다. 합리적인 설명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더 무섭다. 동물적 본능으로 꼼짝 못하고 차렷 자세를 하고야 만다. 


우리는 누구나 나이들고, 나이들면 자연히 초라해진다. 운이 좋은 몇몇을 빼고는 경제적으로도 차차 스러지기 십상. 이러한 생의 초라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실물과 다른 우리는 스노우 미화 사진이나 AI 프로필사진으로 조롱받는 아줌마와 할머니가 되는 것뿐. 내가 좋아하고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어른의 숙녀가 아니라 나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든 미운 어른 여자가 되는 것뿐이다. 


미학이라는 학문은 아름다움을 겉보기 ‘예쁨’ 하나로 고정하지 않는다. 일상의 경지를 넘어서 거대한 정신적 경지를 보여주는 숭고미와, 절제와 기품이 드러나는 우아미, 극한의 상황에서 일어나는 실존의 놀라움을 보여주는 비장미, 풍자와 해학을 통한 웃음으로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골계미 등이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곳에 아름다움의 정점이 있다. 마치 별을 찍듯이. 하늘에 찬란한 별빛이 펼쳐지듯이. 이 이야기들이 너무 이론적이라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우리가 인식하는 아름다움이 이전과 다르게 너무 좁아졌다는 것으로 현실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      


외모가 왕관인 시기는 아무리 잘 봐줘야 고작 30년이다. 그 시기가 지나면 우리는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내면을 발가벗기게 된다. 더 초라해질 것인가 덜 초라해질 것인가, 혹은 나름의 방식대로 빛날 것인가. 사람의 아름다움은 예쁜 것에만 고정되지 않는다. 이걸 깨달으려면 어느 정도 생에 조련되어야 한다. DNA가 부여하는 예쁨이 공짜이며 역으로 공짜가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경험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도 모른 채 무시하고 있었던 노년의 가난함, 그 안에 숨은 연륜의 놀라움을 겪어야 한다. 그래서 진짜 숙녀는 세월을 겪어서야 그 이름의 왕관을 얻을 수가 있는 거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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