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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펀치 Dec 29. 2019

강펀치 in 핀란드 (3)

참 대단한 추위야..

드디어 휘바 휘바 산타의 나라, 내가 오로라를 못 보면 목을 묻고 돌아갈 나라 핀란드에 도착했다. 그것도 무려 두 다리 쭉 뻗고 먹고 싶은 것들 잔뜩 먹으면서!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된 건데, 너무 신나서 카운터에서 2미터 뛰어올랐다. 세상에 비즈니스 석인데 유럽행이라니. 개꿀.


확실히 돈이 좋긴 좋더라.. 마리메코로 도배된 황금 같은 비행이었다. 솔직히 메인 메뉴는 별로였지만 디저트랑 커피가 맛있었고, 그 이후로도 간단한 간식이나 식사류, 와인이나 음료를 달라는 대로 줬다. 특히 샐러드랑 과일 먹은 거 너무 좋았다. 비행기에서 신선식품이라니.. 9시간이나 날아왔는데 피곤하질 않다. 다리도 안 땡땡 부었어. 돌아올 때 이코노미 타면 동화 속 거지 왕자 된 기분일 것 같다.


근데 잠이 좀 안 온다. 지금도 새벽 6시에 잠 깨어 동생 깰까 봐 몰래몰래 쓰고 있는 건데, 비행기에서도 두 다리 쭉 뻗고 침대처럼 잘 수 있었지만 잠이 안 와서 1시간 정도만 눈을 붙였고 나머지 시간에는 대부분 영화를 봤다. 그래도 본 영화들이 좋았어. 올해의 마지막 영화들이 될 #셰이프오브워터 #배트맨2 #스타워즈라스트제다이. 동시에 내 20대 마지막 영화들이 되겠지. 라스트 제다이 말고 나머지는 처음 보는 영화들이었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특히 좋았다. OST도 그렇고 워낙 좋다는 평은 많이 들었지만 타이밍이 안 맞아서 계속 미뤘었는데, 사랑 영화 보고 우는 사람이 아닌 나조차 대추하게 입 틀어막고 자리에서 오열하게 만든 영화였다. 화장실 신이 참 좋았어. 마지막 장면이랑. 그렇지만 영어 오디오에 영어 자막으로 보고도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나 자신이 감격스러워 흘린 주책의 눈물일 수도 있고..  그렇다. 어쩌면 내용을 잘못 이해해서 운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배트맨 2에서는 캣우먼이 인상적이었다. 고양이는 덤블링을 하지 않는데 왜 계속 덤블링을 하면서 이동하는 걸까? 하지만 그럼에도 좋았다. 펭귄맨 징그러워..


또 좋은 소식이라면 체크인 카운터에서 동생 지인인 핀에어 직원 분들이 동생한테 '동생이랑 여행가요?'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하하 키가 작고 머리가 이상해서라기보단 어려 보이는 외모 덕분이 아닐까 하고 20대의 끝을 자축했다.


아무튼 그렇게 날아서 도착한 핀란드는 도시가 19금이었다. 무슨 밤 밖에 없어. 네덜란드보다 19금에 더 잘 어울리는 도시가 아닐까. 3시에 떨어졌는데 7시쯤 된 느낌이었고 4-5시가 되니 해가 다 져서 밤이 되었다. 마피아는 일어나 주세요. 살고 싶은 도시는 아니다 싶었다. 우울증 알콜중독 많은 나라라더니 이유가 있구나. 이런 날씨라면야.


게다가 공항에 떨어졌을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면 서울이랑 비슷하지 않아?' 했는데 본격적으로 해가 떨어지니까 살을 에는 추위가 찾아왔다. 누가 핫팩 사는 날 겁쟁이라고 했냐? 없었음 큰일 날 뻔했다. (근데 오전에 정신없이 짐 싸다가 군용 핫팩 집에 두고 와서 좀 땅을 쳤다..) 특히 귀나 코 손끝 같은 데가 너무 차가워졌고, 와중에 코트만 입거나 심지어 외투 없이 다니는 핀란드인들을 보고 역시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구나 느꼈다. 이 추위에.. 심지어 후드티에 청바지만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봤다.


뭐 첫날에 일찍 떨어진 거 치고는 본 게 없었다. 헬싱키 대성당 쪽 연말 느낌 물씬 풍기는 거리들을 구경했고, 디자인 거리를 걸었고 유명 초코 브랜드 파제르(FAZER)를 우연히 발견했다는 것 정도랄까. 시즌 메뉴인 진저 시나몬 라떼랑 달걀 연어 어쩌고 빵을 먹었고, 맛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내 줬던 초코도 여기 거였는데. 선배가 추천해줬던 클럽도 20분 걸어 찾아 갔었는데.. 유명한 밴드인지 오늘내일 전부 티켓 솔드아웃. 떠나는 30일엔 공연이 없어서, 결국 tavastia 구경은 못 하고 돌아갈 것 같다.


20대 wrap up, 30대 level up 여행.


엉거주춤, 모든 게 서툴고 엉성하던 스무 살의 나는 서른 살의 내가 핀란드에서 오로라를 보겠다고 발열조끼에 패당 신발을 신고 뒤뚱거릴 줄 전혀 몰랐겠지.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무서운 것도 많았고 미래의 나를 위해 아껴둔 것도 참 많았다. 그냥 조금 더 놀고 좀 더 엉망이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그 때는 그냥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도 희망적인 데가 있다면 나의 10대보다는 20대 때가 훨씬 좋았다는 것이다. 물론 힘든 건 마찬가지였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 자발적으로 힘들 수 있어서 좋았다. 고생스럽지만 내가 선택한 일로 고생할 수 있다는 게 이전 10년과는 달랐다.


그래서 아마 다가올 2020년부터 시작할 30대는 더 좋지 않을까. (네가 운동만 제대로 한다면.) 나라는 사람에 대해 잘 모른 채 시작한 20대도 그 찾아가는 여정이 꽤 즐거웠는데 이제 어느 정도 나라는 기계에 대한 튜토리얼은 끝냈으니 튜닝 같은 걸 좀 넣어봐도 괜찮을 것 같다. (네가 사용법을 잘 지키기만 한다면 말이다)


30 인생에 그래도 칭찬할 만한 일관성을 찾자면 어쨌든 늘 앞으로 나가는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땅을 치고 바닥을 찍더라도 딱히 빠꾸는 없었다.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힘들게 지키고 살아온 나한테 의리가 있지, 이 정도의 일관성은 앞으로도 지키며 살아가고 싶다. 사실 살다 보니 이렇게 된 거긴 한데, 이 김에 한번 인생컨셉으로 만들어 보자. 그러니까 이제 있을 10년도 후회하지 않을 선택들을 하면서 살고 싶다. 오로라를 봐야 이 소원이 이루어질 텐데, 못 보면 진짜 할복한다ㅡㅡ


내 기준에 정해진 거 없이 떨어진 핀란드라 지금 약간 마음은 불안하지만, 떠나는 날까지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반성과 되찾을 희망찬 10년에 대한 청사진 스케치를 예쁘게 마무리지었으면 좋겠다. 30대엔 꼭 지켜야 할 것들 목록도 작성할 예정이다. 이 망할 놈의 추위와 함께. 불닭볶음면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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