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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펀치 Jan 01. 2020

강펀치 in 이발로 (6)

Happy New Year! 안녕 30대

#내 인생 최고의 여행지, 이발로.

여기다 싶었다. 이 곳 때문이었구나 내가 핀란드에 오고 싶었던 게. 첫 만남에 반해버렸다. 해피 이발로, 스노우 스노우 스노우. 내가 사랑하는 눈이 발 닿는 어느 곳에나 이만큼씩 쌓여 있었고 하늘은 정말 눈이 부실만큼 빛나고 예뻤다. 여기였구나!


작고 귀여운 이발로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밖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소리 질렀다. 반짝거리는 도시. 시내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본 이 도시는 너무 귀엽고 예뻤다. 귀여운 갈색 집 위로 30cm 넘게 쌓인 눈들은 마시멜로우 같기도 하고 엄청 두꺼운 이케아 매트리스를 널어놓은 것 같기도 했다. 아무도 만지지 않은 아무도 밟지 않은 희고 반짝거리는 눈들이 가득해! 충주 딸기로 가득 찬 방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눈이 너무 좋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몇십 년 만에 대설이 내렸던 날이 기억났다. 거의 허리만큼이나 눈이 쌓였었고, 경비 아저씨들은 눈을 치우느라 짜증 좀 났겠지만 어렸던 나는 그게 마냥 좋았다. 아파트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무도 밟지 않은 눈들을 찾아 헤맸었다. 젖어도 되는 옷을 입고 눈 속에 뛰어드는 게 그렇게 행복했었는데. 그 이후로 이렇게 쌓인 눈은 처음 본다.


2020년 1월 1일을 맞을 사리셀카 인에 도착했고, (방이 있는 건물들이 꼬불꼬불 있어 방 찾는 데 오래 걸렸지만) 가까스로 아늑한 방에 들어와 짐을 풀었다. 밖은 캄캄한데 아직 3시도 안 됐고, 눈이나 실컷 밟자 싶어 리셉션에 뉴 이어 파티 있을만한 곳이 어디 있을까 물었다. 내일 묵을 노던 라이츠 호텔에 가보라고 했고 그쪽으로 향하기로 했다. 아, 그리고 이 옆에서 프랑스 여자한테 미라 인터뷰 하나를 땄다. '둘 중 누가 좋아요?' '푸우...... 아이 돈 노....' 너무 웃겨서 빵 터졌다.


#눈, 그리고 달과 별!

그렇게 네비 찍고 한참을 걷는데. 뽀득뽀득 눈 밟는 소리가 그렇게 예뻤고 어디를 둘러봐도 하얗기만 한 도로, 나뭇가지마다 빵또아처럼 두껍게 쌓인 눈. 와중에 달은 엄청 가깝게 보였다. 미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반짝반짝 별들이 빛나고 있고 옆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동생 지연이가 있다. 행복이란 단어에 흰색 물감을 입히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사실 이발로에 도착하는 게 오늘이 아니었을 수 있었다. 핀란드행을 급하게 결정하느라 헬싱키 IN으로 비행기를 잡았고, 나중에 이발로 경유 편이 있다는 걸 알고 IN OUT을 변경하려고도 했었다. 그때 동생 일정과 여행사 수수료 등 이런저런 이유로 이렇게 픽스되었었는데.


도착한 게 오늘이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좋았을까 싶기도 하고, 12월 31일 마지막 날 이렇게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만 둘러싸일 수 있었을까 좀.. 고마워졌다.


#걷다 보니 신천역.. 아니 2차선 고속도로 앞이야

걷다 보니 여기 시간 5시. 한국은 새해를 맞았다. 지연이와 나도 멈춰 서서 달에 대고 기도했다. 네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행복했을까? 같이 와 주어서 고마워 나의 스윗 리를 고구마 맛탕.


아니 근데 분명 시키는 대로 갔는데 인도가 아니라 무슨 고속도로 같은 곳을 계속 걷게 되었다. 한 3-40분 걸은 것 같은데 옆으론 차가 슁슁 다니고 다른 곳은 눈이 쌓여서 걸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이렇게 차에 치어 죽을 순 없어.. 내일 75만 원짜리 방에 가야 한단 말이다.. 우리도 울며 겨자 먹기로 가고 있는 건데 앞에서 오는 차들이 빵빵대서 다 때려 부수고 싶었다. 핫팩을 붙였는데도 추워져서 연기만 보이면 '언니! 저기 연기가 보여..!' '지연아 조금만 참아! 언니가 수프를 얻어올게' 이 난리를 치며 걸었다.


그러다가 진짜 오아시스를 발견. 주유소 옆에 딸린 한 식당이었는데 진짜 너무 반가워서 앞에서 큰절할 뻔했다. 피자랑 햄버거, 커피를 시켰고 진짜 온몸을 녹이며 맛있게 먹었다. 카운터에 왠지 친절해 보이는 여자분이 있었고 드디어 핀란드인 인터뷰를 따겠다 싶어 말을 걸었다. 진짜 이번엔 이발로 사람이었고 인터뷰를 땄다! 미카마카 마카마카를 시켰더니 엄청 웃었고 너무 어려워하며 푸르르- 했다. 역시 그거 너무 길다니까요?


이발로 어떠냐고 물어봐서 사랑하게 됐다고 유 쏘 럭키! 하니까 자기 언니 남편이 2년 전에 한국에 다녀왔다고 했다. 이렇게 또 데스티니. 키토스! 감사해요.


#공식적 서른 살

뭐 아직 만으론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진짜 이게 뭐라고 엄청 거창하게 계속 컨셉 잡고 다니니까 30대 들어온 게 실감이 나는 듯하다. 여기 시간으로는 이제 3시간 남았다. 2시간 정도 숙소에서 쉬다가 잠시 나가서 앞에 있는 펍에 갈 예정이다. 카운트 다운 아마 하지 않을까?


지연이가 아까 '언니는 아마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30살일 거야'라고 했다. 진짜 뭔 놈의 계집애.. ㅡㅡ 예쁜 말만 이렇게 한다. 아주 내일 순록 고기로 위장을 후려쳐 주어야겠다. 근데 귀여운 것도 귀여운 건데 이건 맞는 것 같다. 아까 달 아래 눈 밟던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서른 살이었다. 어쩐지 너무 가슴이 찌르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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