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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펀치 Jan 03. 2020

강펀치 in 이발로 (8)

캡틴 오 마이 캡틴!

망할 노던 라이츠 빌리지.


지금 이 글은 결국 여기서 묵는 마지막 날 지연이와 K마켓에서 사 온 술과 과자들을 뿌순 뒤 그 망할 놈의 산책만 또 하고 돌아와 샤워하고 앉아서 쓰고 있다. 결국 여기서 오로라는 못 보고 떠나게 될 것 같다. 3개월 전부터 팔로한 #핀란드 인스타 사진들 보면 365일 중 200일 정도 나타난다는 오로라 남들은 잘들만 보고 가던데. 나는 대체 왜 하루도 보지 못하는 것일까. 좀 속상하다.


게다가 망할 삼성 놈들. 캐빈 내에 있는 태블릿이 삼성 안드로이드인데 어젯밤에는 갑자기 업데이트를 하라고 하질 않나. 지금은 에러 나서 먹통이다. 어제도 자다 일어나서 그거 보고 오로라 알람 안 울릴까 봐 계속 업데이트 기다렸다 진행 누르고 또 누르고 그랬는데. 이젠 먹히지도 않는다. 망할 노던 라이츠.


하지만 멋진 허스키 여자와 캡틴 햄머, 그리고 저녁식사 때문에 봐주기로 했다. 오늘 아주 근사한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어제 예약이 다 차서 못 한 허스키 사파리와 스노 모빌 체험을 했는데, 정말 최고의 하루를 보냈다..


허스키 사파리는, 내가 여러 영상들을 보고 예상하기로는 그냥 개들이 끌고 다니는 썰매에 앉아서 주변을 구경하는 느낌이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운전대를 잡는 거였다! 후레이! 좀 멋진 게, 안전 수칙 설명해주며 허스키 썰매를 '팀 스포츠'라고 했다. 썰매 뒤 쪽에 브레이크랑 같이 달린 휠 같은 걸 잡고 방향이나 속도 같은 걸 조절하며 타는 거라고.


존멋탱 허스키와 함께 하는 팀 스포츠라니! 뭔가 훨씬 두근거리는 체험처럼 느껴졌다. 지연이는 앉아있는 게 편하다고 해서 내가 계속 운전대를 잡았다. 속력을 줄여야 할 때, 예를 들어 앞 썰매와의 간격을 조절한다든가 가파른 내리막길이거나 할 때는 한 발을 브레이크 위에 올려놓아서 개들에게 사인을 주어야 하고, 멈추라는 신호가 온다든가 위험 상황에서는 두 발을 브레이크에 다 올려 썰매를 멈춰야 한다고 했다.


내 남다른 운동신경이 또 빛을 발했지. 멋지게 한 바퀴 돌고 내려와서는 허스키들과 인사를 나누고 아기 개들을 안게도 해 줬다. 나는 사실 개들을 좀 무서워하는 편이라 안지 않았는데 지연이는 안았다. 근데 냄새가 심해서 후회하더라. 옷에 냄새가 뱄다고 한다.


그리고 나의 운동신경은 진짜 오늘 하루의 핵심이었던 스노 모빌에서 더욱더 화려하게 꽃 피웠는데, 모빌 운전 진짜 짱 짱 아주 재미있었다! 눈 위를 달리는데 주변엔 정말 하얀 눈과 흰 눈이 쌓인 나무들밖에 없었다. 게다가 빌리지 근처를 지나 힐로 올라가니 세상에.. 진짜 너무너무 놀랄 정도로 멋있었다. 온통 흰 세상. 힐 꼭대기에 올라가니 전망대 같은 곳이 있는 넓은 지대가 나왔고, 정말 발을 잘못 디디면 허벅지까지 눈이 빠져버릴 정도로 깊은 눈들이 온통이었다.


우리를 맡게 된 선생님은 햄머라는 분이었는데 가끔 그곳에 날이 흐리면 정말 눈 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상이 하얘진다고 했다. 그런 때는 지평선조차 보이지 않아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태로 운전한다고. 나중에 눈 위에 올라가 찍힌 사진을 보니 나 완전 우주인 같이 나와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마션 찍는 느낌이었어.


눈 덮인 산은 바다나 우주와도 닮은 구석이 있다. 완전 다른 행성에 온 기분이었다. 내 생애 최고의 2시간. 지연이랑 햄머는 뒤에서 내가 발을 잘못 디뎌 눈 속에 푹 빠지는 걸 보고 '저걸 기다렸다'며 웃었다고 했다. 그래도 좋아! 너무 즐거웠다.


우리의 눈 캡틴 햄머는 너무 좋은 캡이었다. 조심조심 우리가 잘 따라오는지 봐주었고, 그 스팟 외에도 또 다른 멋진 곳을 보여주었다. 그 트랙은 모빌들이 지나간 흔적들이 많이 없는 곳이어서, 내가 혹시 너무 잘 따라와서 보여주는 고급 코스인가 싶었다.


옆을 지나는 다른 모빌들보다 빨리 달리거나 그렇진 않았지만 허스키도 그렇고 오늘 하루 나 좀 좋은 드라이버였던 것 같다. 한국에선 장롱면허 소지자이긴 하지만 오늘만은 지연이도 인정해 주었다. '언니 베스트 드라이버!'라며.


달릴 때 사실 긴장해서 주변을 잘 둘러보진 못했는데,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다. 마트나 편의점을 가기 위해 길을 걷다 보면 도로 옆 쌓인 눈 위를 달리는 스노 모빌들을 많이 봤는데, 나중에 언젠간 나도 그렇게 눈 쌓인 도로를 자유롭게 달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너무너무 즐거웠다.


그리고 들어와서는 저녁식사를 했는데, 어제 그지 같았던 식단보다 40% 정도 나은 메뉴여서 기분이 또 좋아졌다. 순록 고기도 있었고 라자냐도 있었고, 그지 같은 티라미수 옆에 맛있는 블루베리 케이크가 있었다. 엄청 먹어서 배가 산만해졌고, 소화시키기 위해 지연이와 K 마켓에 다녀왔다.


사실 정말 여행 시작부터 행복한 일들의 연속이라 한편으로는 이게 다 오로라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려고 이러나 불안했다. 어쩐지 오늘은 운수가 좋더라니.. 이런 느낌으로다가. 오로라 알람 패드는 먹통에, 새벽 3시를 향해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늘은 캄캄 무소식이지만, 뭐 결국 원하는 모든 걸 얻을 순 없는 거야 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사실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많이 서운하고 울적했는데, 그 마음을 또 사람이 해결해주었다. 그만큼 스노모빌을 타고 본 풍경이 환상이었으니까. 친절한 캡틴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또 그렇지 못했을 거고.


아무튼 아까워해 봤자 나만 손해니까 서운한 마음들은 푹푹 쌓인 흰 눈에 다 묻어버리기로 했다.


밤에는 산책을 했다. 여행지에서 듣는 노래들은 뭐랄까 좀 마음에 더 닿는 부분들이 있다. 내일 막방인 수현이의 노래들과 오래전 옛날 음악들을 들으며 걸었다. 아깝고 서운한 밤과 어울리는 음악들이었다. 강지연은 그 와중에 샤워 오래 해서 난 약간 찬물로 씻게 되었다.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했으니까 봐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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