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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삶은 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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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펀치 May 03. 2020

불면의 밤

초여름의 날씨는 늘 홍콩 냄새가 난다. 방 한 칸이 기가 막히게 좁은 애플 돔의 정문을 열고 나왔을 때 훅 풍기던 그 여름의 냄새. 몽콕이나 침사추이 거리에서 나던 담배향이 살짝 섞인 후덥한 기분. 그 기운이 어느 날 아침 코끝에 닿을 때 나는 ‘여름도 곧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때 나는 갓 졸업한 스물다섯이었고 수중에는 7000 홍콩 달러의 애플 돔 보증금과 한 달 정도 간신히 버틸 정도의 돈이 있었다. 여행객들이 한 달 단위로 묵는 장기투숙형 도미토리였고 방은 기가 막히게 좁았다. 하얗게 칠해진 세로로 길쭉한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강이 보이는 조그만 창문과 책상이 있고 사다리로 올라갈 수 있는 이층은 그대로 침대였다. 말이 좋아 방이지 그냥 카스텔라 가운데 부분을 나눠 위에서 자고 아래서 옷 갈아입어라 하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좋은 건 창밖으로 강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돔은 셩완에 있었는데 강 건너편의 고층 빌딩들과 쌩쌩 달리는 차들을 보며 밀린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보는 게 하루 일과의 끝이었다. 가끔 운이 좋고 날씨가 맑으면 강 건너 빌딩들에서 쏘는 레이저빔 같은 게 보이기도 했다.


옆방에는 인도 남자가 살고 있었는데 가끔 내가 통화를 오래 하면 휴게 공간에 나와 욕지거리를 해댔다. 냉장고 문을 쾅하고 닫는다든가, 소파에 앉아서 구시렁댔다. 근데 또 나가서 통화하는 건 또 너무 귀찮아서 나는 도미토리가 보장하는 익명성에 기대어 잠시 멈췄다가 다시 보이스톡을 켜곤 했다. 좁은 방에서 몸이 찌뿌둥한 날에는 셩완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갔다. 그땐 몰랐지만 참 좋은 날들이었다.


셩완은 아일랜드 쪽이라 침사추이나 몽콕이 있는 구룡 근처보다는 깨끗한 편이었지만 밤거리를 걷다 보면 마찬가지로 수많은 바퀴벌레를 봐야 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바선생을 산책 가는 중에 봤다. 큰 몸집으로 샤샤샥 움직여 사라지는 선생님들을 마주하면 움찔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간단히 저녁을 해결한 뒤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들으며 산책하던 날들. 흐린 날씨에도 습하고 더워서 조금만 걸어도 땀을 흘렸고 그 더위 때문에 산책 복장은 늘 민소매에 반바지였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뭐랄까 아늑한 기억이다. 난생처음으로 생긴 나만의 공간과 완전한 자유시간. 화내는 인도 사람과 바선생이 공존하는 이상한 조합의 역사지만 지금 생각하면 마음이 욱신하다.  


인생의 어느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를 택할래?라고 신이 묻는다면 나는 25살의 나로 홍콩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는 지겨웠던 습한 공기도 조금 더 아깝게 마시고, 초조하고 불안해 미처 다 사랑하지 못했던 그 도시의 단편을 다 담아오고 싶다. 페퍼런치와 블랙버거도 50번은 더 먹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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