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61, 29와 2019
잠이 안 오는 날엔 티빙이나 왓챠를 틀어놓고 책을 읽는 게 최근 생긴 습관이다. 밤에 잠을 잘 못 자게 된 지는 꽤 됐는데, 뒤척이며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그냥 깨워버리자 마음먹은 지는 얼마 안 됐다. 오늘은 최근 잘 먹혔던 마법의 필살 주문까지 사용했는데.. 가까스로 눈 감긴 했는데 화장실이 마려워 잠이 다 달아났다.
해가 지나기 전 핀란드에 가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는 거창한 건 아니었다. 올해 들어 제대로 된, 나를 위한 휴가를 아직 못 썼기 때문이다. 휴가가 남은 것도 이유였고, 20대의 마지막을 기념해서 뭔가 작위적이나마 터닝 포인트랄까 결절점을 만들고 싶은 것도 있었다.
그렇게 네이버에 세계 지도를 검색해 쭉 보는데 생각보다 구미가 당기는 곳이 없었다. 원체 휴양지는 좀 구미가 당기지 않는 편인데 동유럽 서유럽은 왠지 나의 20대 초반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고 (누군가 스물 아홉의 여행이면 남미지! 라고 추천까지 했던) 남미는 그냥 마지막이나 시작이라는 단어와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일본은.. 사회적 분위기가 있는 관계로 패스했다. 사실 원래는 크리스마스의 도쿄나 동양의 하와이라는 오키나와에 가 보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뒤적이다가 발견한 핀란드에는 어쩐지 떠오르는 기분이 있었다. 맞아 나 헬싱키에 늘 가보고 싶었다. 뭐가 있는지는 하나도 모르면서. 그냥 어딘가 떠오르는 디자인 침엽수 감성에, 새하얀 눈! 가고 싶다 한번 생각하고 나니 푹푹 쌓인 눈이 너무 보고 싶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거긴 러시아고.. 추위에 젬병이면서도 어쩐지. 운이 좋으면 오로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설렜다. 안경을 쓰고 가면 김이 서릴 테니 원데이 아큐브도 맞춰야지. 벌써 김칫국 200사발은 마신 듯.
혼자 하는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왠지 올해의 마지막 밤과 시작의 아침까지 혼자 눈 감고 뜨는 건 좀 쓸쓸하겠다 싶었다. 동생을 꼬드겼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금방 핀에어 티켓을 구매했다.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이발로 쪽에 가려면 국내선 티켓을 또 구매해야 했다. 좀 귀찮아졌고 슬슬 숙소를 알아보다 보니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었다. 좀 일찍 알아볼걸, 예약하는 내내 절망했지만 그래 젊어 여행은 빚내서 하는 게 아닐까.. 동생과 오열하며 신용카드라는 현대 문물에 다시 한번 감사했다...
막상 비행기표를 끊고 보니 핀란드와 관련된 것들이 눈에 많이 보였다. 책 속에서 발견한 ‘도블라토프 여행가방에 들어있는 핀란드산 양말' 이란 글귀라든가, 올해 라클데에서 보고 좋아했던 노선택과 소울 소스&김율희 팀이 핀란드에 가서 공연을 한다고도 했다.(윤석철 님 SNS에서 봤음) 동생은 자기가 담당하는 창구에서 PH-1의 헬싱키행 항공권을 자기가 발권했다며 좋아했다.(사인까지 자랑하며 한탕 호들갑을 떨고 나서 PH-1의 카톡 이모티콘까지 샀다)
29살이 어쨌다고, 그렇게 크게 달라질 것도 아니면서 19년의 마지막을 너무 호들갑스럽게 준비하는 거 아닌가 싶다가도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에 60일이나 남은 지금부터 조금씩 설레 온다. 기다리는 이벤트가 있다는 건 참 좋은 거야.(갚을 빚이 다가온다는 건 참 초조한 일이고..) 비행기와 숙소 외에는 아직 정해놓은 것이 없지만 좋은 여행이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때까지 좋은 일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올해의 마무리가, 나의 어떤 마지막이 기분 좋게 끝났으면. 그리고 계획 없이 긁었지만 다음 달의 내 통장이 어떻게든 이번 달의 나를 잘 막아주기를. 미리 고맙다 소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