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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의서점 Mar 26. 2019

어른에게 그림책을 권함

밤의서점에는 그림책 서가가 있다. 그래픽노블과 그림책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서가이다. 이 서가는 서점의 다른 코너와는 달리 책꽂이가 아니라 책상에 마련되어 있다. 책들이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멋 내지 않은 척 더 예쁘게 놓으려 애를 쓴 것이다. 한 켠에 펼쳐진 가방에도 책들이 담겨 있는데, 그 가방의 주인은 몇 해 전 봄 세상을 떠났다. 붉은 소가죽이 입혀진 이 007가방의 주인은 가방에 현금다발을 가득 채워 나르곤 했다고 신이 나서 자랑했었다. 전성기에 시끌벅적 돈을 쓸어 담던 가방은 이제 은퇴하여 연희동의 조용한 서점 한 켠에서 알록달록한 그림책들을 담고 있다. 


밤의서점에 방문한 손님들은 종종 책을 추천해달라고 한다. 그들의 사연은 다 다르고 점장들(밤의서점에는 두 명의 점장이 있다. 밤의점장과 폭풍의점장이 그들이다. 이 글을 쓰는 사람은 폭풍의점장이다.)의 추천도 때마다 다르다. 처음엔 남에게 책을 권한다는 것이 어려웠지만, 지금은 4년차 점장의 관록이란 게 생겼다. 책을 읽을 기력이 없도록 지친 손님인데 책을 추천해 달라면 주로 향하는 곳이 그림책 코너다. 마음이 복잡한 손님일수록 가능한 한 글이 없는 책을 건넨다. 동글동글 천진난만한 그림체나 고운 색깔의 그림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복잡한 마음도 조금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멋진 그림책들을 만드는 그림책 공작소라는 출판사가 있다.


그림책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려고 했을 때 바로 떠오른 사람이 그림책 공작소의 공작소장님이다. 이 분은 혼자서 좋은 책을 얼마나 많이 만드시는지 모른다. 도대체 잠은 주무시는지 밥은 드시고 일을 하시는지 1인 출판사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그런 소장님이 작년에 고속도로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어느 날 목에 깁스를 하고 빡빡머리로 새로 나온 그림책을 들고 서점에 나타나셨는데,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말 그대로 죽었다 살아난 것이 맞는 게, 그 분에게 내려진 전치 16주라는 진단은 내려지기도 어렵다고 한다. (그 정도면 이미 저 세상 사람인 것이다.) 밤의서점이 공작소장님의 집과 꽤 가까운 곳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책을 직접 가져다 주러 오신 공작소장님과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림책을 만드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출판사를 차렸지만, 사실은 마음에 항상 불안함이 있었어요. 그래서 밤낮 없이 잠도 안 자고 일했던 것 같습니다. 그 날도 책의 마지막 부분이 풀리지 않아 새벽까지 고민하다가 결국 해결이 되어 신나게 데이터를 넘기고 엄마를 뵈러 평택으로 향했어요. 고속도로를 달렸는데 그 이후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 날 건넨 책의 제목이 참 아이러니하다. <속도와 거리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라니. 자동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고 천천히 달리면서 주변의 꽃도 보고 바다도 보자는 내용이다. 공작소장님의 삶은 이 사건 이후로 많이 변했다고 했다. 사고 이전보다 책이 천천히 나오고 있지만 하나도 아쉽지 않다. 살아 계셔서 감사한 일이다. 

어른이 되면 대부분의 것들이 명확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인생의 어려운 문제의 답도 척척 내고 해결하는 든든한 사람이 될 것을 꿈꾸었다. 그런데 막상 살아보니 갈수록 삶은 더 어렵고 복잡하기만 하다. 지인에게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언제 느끼는가 물어봤더니 가족관계 증명서를 보며 내가 먹여 살릴 식솔들이 이렇게 많구나 생각할 때라고 했다. 나의 경우는 맘놓고 욕했던 사회의 문제들을 이제는 욕할 수 없을 때, 어느새 어른이 되면 내가 바꾸겠다고 생각했던 문제의 일부가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 때이다. 어른이 되면 어른들이 만든 나쁜 것들도 다 없애는 힘센 사람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거울 속에 속수무책으로 나이가 들어버린 아이의 얼굴이 있을 때 나는 이제 꼼짝없이 어른이구나! 이렇게 늙어 죽겠구나 하는 초초함이 든다. 


고개를 돌려 그림책 서가의 가방을 바라본다. 가방은 노란 빛을 받으며 본래 그 곳에 있었던 것처럼 놓여 있다. 서점을 시작하기 몇 달 전 짧은 투병을 마치고 시어머님께서 돌아가셨다. 서점을 열고 어머님의 가방을 그림책 서가에 두었을 때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그것은 앞만 보고 전속력으로 달려가다가 죽음의 방문을 받고 삶을 급히 정리했던 어머님의 삶이 이제 밤의서점에서라도 편히 쉬겠구나 하는 일종의 안도감이었다. 

누군가가 주변의 꽃에 눈길도 주지 않고 바다도 보지 않고 만든 책을 읽으며 또 누군가는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우리 모두는 주변의 꽃도 바다도 보지 못하고 어디론가 달리는 어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서 그림책을 읽기를 권한다. 지금 그림책을 읽는 어른은 물론이고, 만드는 어른, 그리고 파는 어른인 나에게, 속수무책으로 어른이 된 과거의 아이들 모두에게 그림책을 권한다. 속도와 거리를 따지지 말고 초조해 하지 말고 잠깐 멈추라고 말이다. 죽음이 우리를 뜬금없이 방문하기 전에 말이다. 물론 밤의서점에 와서 보시면 더 좋다는 말도 덧붙인다. 


P.S: <속도와 거리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의 뒷표지에는 그림책 공작소장님의 깨달음이 알쏭달쏭 수수께끼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궁금하면 책을 사 보시라고 권합니다. 밤의서점에 오셔서 보면 더 좋다고도 말씀드립니다. (밤의서점 폭풍의 점장)


* 이 글은 월간 책 3월호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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