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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의서점 Jan 14. 2017

'밤의서점'이라는 욕조  

책에 젖어드는 어떤 방법

 이사를 하고 은밀한 즐거움이 생겼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욕조가 생긴 것이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서울에 올라와 원룸과 고시원, 오피스텔 생활을 했다. 당연히 욕조는 꿈도 못 꾸었다. 그러니 여행을 가면 일과를 마치고 호텔 욕조에 몸을 담그는 시간이 그렇게나 특별했다.
 최근에 일본 여행을 다녀온 후배가 무인양품 입욕제를 종류별로 선물해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입욕제를 풀어놓고 책 한 권을 들고 욕조에 들어간다. 굉장히 호사스러운 기분이 드는데 이게 또 좋다. 책은 눈과 뇌로만 읽는 거라고 생각하신 분들은 한번 해보시길. 나른해진 몸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노라면 천국을 경험하기도 한다. 단 책이 젖을 수 있으니 약간의 준비가 필요하다. 먼저 몸만 담근다는 느낌으로 타월로 머리를 감아올린다. 중간에 책장을 넘기려면 젖은 손가락을 타월에 닦아줘야 하니까. 최근에는 <시녀 이야기>를 들고 욕조에 들어갔다가 이런 행운을 경험하기도 했다.


"물속에 들어가 누워서, 몸을 맡긴다. 물은 사람 손처럼 보들보들하다. 두 눈을 감으면,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그 애가 내 곁에 나타나 함께한다. 비누 냄새 때문인가 보다. 나는 그 애 목 뒤를 덮은 보드라운 머릿결에 얼굴을 묻고 그 애의 향내를 한껏 들이마신다. 베이비파우더 냄새와 깨끗이 씻은 아이의 살내와 샴푸 냄새, 희미하게 풍기는 지린내까지. 목욕을 할 때는 그 애가 이 나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찾아올 때마다 그 애의 나이는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그 애가 유령이 아니라는 걸 안다. 유령이라면 항상 똑같은 나이일 테니까.”


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황금가지       


 여성이 자궁의 역할만 하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주인공이 감시를 받으며 목욕을 하는 대목이다. 자기 아이의 환영에 시달리는 그녀가 “사람 손처럼 보들보들한” 물의 감각을 느낄 때 나 역시 동일한 경험을 한다. 게다가 그날 풀어놓은 입욕제가 무인양품 밀크향이었다는 것까지 굉장한 행운이라고 생각해버린다.
 25분 정도 지나면 욕실의 냉기에 물이 식는다. 한기를 느끼며 나는 현실로 돌아온다. 물기에 책장이 젖어 조금 쭈글쭈글해지는 건 감수해야 한다.


 밤의서점이 당신에게 이런 욕조 같은 곳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세상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입고 있던 두꺼운 옷을 잠시 벗어버리고 책속으로 풍덩 빠져들 수 있는 공간 말이다. 적절한 어둠 속에선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민낯을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으니까.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언 손을 녹이며 서가를 돌아다니다 보면, 희미한 빛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 해도 괜찮다.
 혹시 지금 너무 멀리 있다면, 이곳이 언제든 문을 열어둔 채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야근 후 피곤에 지쳐 졸다가 내릴 곳을 놓치고 허둥지둥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당신이 돌아갈 곳이 불 꺼진 집만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기를. 빈 의자와 책들의 위안과 편안한 어둠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서, 당신을. (by 밤의점장)


 *이 글은 Cigarettes after sex의 ‘Affection’을 들으며 썼습니다. 유튜브로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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