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젖어드는 어떤 방법
이사를 하고 은밀한 즐거움이 생겼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욕조가 생긴 것이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서울에 올라와 원룸과 고시원, 오피스텔 생활을 했다. 당연히 욕조는 꿈도 못 꾸었다. 그러니 여행을 가면 일과를 마치고 호텔 욕조에 몸을 담그는 시간이 그렇게나 특별했다.
최근에 일본 여행을 다녀온 후배가 무인양품 입욕제를 종류별로 선물해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입욕제를 풀어놓고 책 한 권을 들고 욕조에 들어간다. 굉장히 호사스러운 기분이 드는데 이게 또 좋다. 책은 눈과 뇌로만 읽는 거라고 생각하신 분들은 한번 해보시길. 나른해진 몸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노라면 천국을 경험하기도 한다. 단 책이 젖을 수 있으니 약간의 준비가 필요하다. 먼저 몸만 담근다는 느낌으로 타월로 머리를 감아올린다. 중간에 책장을 넘기려면 젖은 손가락을 타월에 닦아줘야 하니까. 최근에는 <시녀 이야기>를 들고 욕조에 들어갔다가 이런 행운을 경험하기도 했다.
"물속에 들어가 누워서, 몸을 맡긴다. 물은 사람 손처럼 보들보들하다. 두 눈을 감으면,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그 애가 내 곁에 나타나 함께한다. 비누 냄새 때문인가 보다. 나는 그 애 목 뒤를 덮은 보드라운 머릿결에 얼굴을 묻고 그 애의 향내를 한껏 들이마신다. 베이비파우더 냄새와 깨끗이 씻은 아이의 살내와 샴푸 냄새, 희미하게 풍기는 지린내까지. 목욕을 할 때는 그 애가 이 나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찾아올 때마다 그 애의 나이는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그 애가 유령이 아니라는 걸 안다. 유령이라면 항상 똑같은 나이일 테니까.”
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황금가지
여성이 자궁의 역할만 하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주인공이 감시를 받으며 목욕을 하는 대목이다. 자기 아이의 환영에 시달리는 그녀가 “사람 손처럼 보들보들한” 물의 감각을 느낄 때 나 역시 동일한 경험을 한다. 게다가 그날 풀어놓은 입욕제가 무인양품 밀크향이었다는 것까지 굉장한 행운이라고 생각해버린다.
25분 정도 지나면 욕실의 냉기에 물이 식는다. 한기를 느끼며 나는 현실로 돌아온다. 물기에 책장이 젖어 조금 쭈글쭈글해지는 건 감수해야 한다.
밤의서점이 당신에게 이런 욕조 같은 곳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세상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입고 있던 두꺼운 옷을 잠시 벗어버리고 책속으로 풍덩 빠져들 수 있는 공간 말이다. 적절한 어둠 속에선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민낯을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으니까.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언 손을 녹이며 서가를 돌아다니다 보면, 희미한 빛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 해도 괜찮다.
혹시 지금 너무 멀리 있다면, 이곳이 언제든 문을 열어둔 채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야근 후 피곤에 지쳐 졸다가 내릴 곳을 놓치고 허둥지둥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당신이 돌아갈 곳이 불 꺼진 집만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기를. 빈 의자와 책들의 위안과 편안한 어둠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서, 당신을. (by 밤의점장)
*이 글은 Cigarettes after sex의 ‘Affection’을 들으며 썼습니다. 유튜브로 들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