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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의서점 Mar 03. 2017

이것이 인간인가

- 밤의 북클럽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폭풍의 점장이 정리하다-

  우리는 토요일 오전 11시 밤의 서점에서 만났다. 나, 밤의 점장, 손님, 릴리님, 미루님( 닉네임) 이렇게 다섯이었다. 이 글은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고 다섯 명의 참석자가 나누었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폭풍의 점장이 선정한 책인데,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이것이 인간인가?’라니. 이것은 인간이 아니다. 이것이 인간일까? 그래 이것이 인간이다. 등등 냉소적이거나 비관적이거나 혹은 중립적인 물음의 의미를 모두 지니는 질문 같았기 때문이다. 손님이 북적거릴 리가 별로 없는(…) 밤의 서점의 서가를 거닐다 보면 유독 눈길을 끄는 책들이 있는데, 이 책이 내게는 그랬다. 서가에서 이 책을 볼 때마다 빚을 진 기분으로 꼭 읽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했다. 같이 읽어볼 요량으로 정한 것이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나 익숙해서 마치 자신이 다 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구절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나도 그렇다. 영화나 책에서 읽었지만 그것은 남의 나라의 역사였고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인류의 상식이었다. 상식이란 역시 다 알고 있기에 지키고 있다는 착각을 부른다. 그래서 이 책은 내게 부채감을 주면서도 우선순위에서 계속 밀려나 있었다. 다 알 것 같고 또 우울할 것 같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인가>는 내가 생각했던 증언(=고발)과는 다른 결을 지닌 책이었다. 저자는 과학 전공자답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만 나치 체제나 개개인을 향한 증오에 빠지지 않는다. 수용소의 사람들과 사건에 집중하여 서술하고 그것을 읽는 우리 스스로가 질문하게 한다. 그래서 걱정했던 것보다 괴롭지 않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유독 가슴이 죄어든 구절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지금 나는 아우슈비츠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신의 섭리에 대해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시간, 극한 상황에서 구원을 받는 성서의 모든 일화들이 바람처럼 모두의 머릿속을 스쳤던 것은 사실이다.(p. 241)


  독일의 패색이 짙을 무렵, 수용소 철수 후 아픈 사람들과 함께 남겨진 그의 회상이다. 유대인은 처음부터 신에게 선택된 민족이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신과 성서의 모든 일화들을 배운다. 레비 또한 신을 배웠지만 믿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책에서 그가 신의 존재를 믿었다는 실마리를 찾지 못했던 점에 무의식적으로 안도했다. 만년에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데, 신을 믿는데도 그랬다면 그의 삶은 실패 쪽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수용소 생존자이며 문학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작가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우리에게 값진 교훈을 주었으나 결국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신앙이 있는 나는 내심 레비에게 신이 없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의 자살은 인간에게는 신이 필요하다는 반증이기를 바란 것이다. 이런 생각이었기에 이 구절을 마주쳤을 때 망치로 가슴을 맞은 것 같았다. 그는 내게 물었다. 고난에서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차마 신의 섭리를 말할 수 없을 만큼 절망했던 그 마음을 아느냐고 말이다. 아우슈비츠를 겪지 못한 내가 아우슈비츠에 대해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가 책을 시작할 때 쓴 시에는 이 책을 쓴 이유가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당신에게 이 말들을 전하니 가슴에 새겨두라.

집에 있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잠자리에 들 때나, 깨어날 때나.

당신의 아이들에게 거듭 들려주라.

그러지 않으면 당신 집이 무너져 내리고

온갖 병이 당신을 괴롭히며

당신의 아이들이 당신을 외면하리라


  그는 시대의 증언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아우슈비츠가 점차 퇴색될 즈음 그가 느낀 절망은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마법에서 깨어나 밖에서 그 음악을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카베에서처럼, 그리고 자유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 복종하거나 인내할 필요 없이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이해하기 위해 다시 그 음악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는 지금처럼 말이다. 독일인들이 어떤 깊은 뜻에서 그런 소름 끼치는 의식을 만들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도대체 왜 지금까지도 그 무해한 노랫가락이 기억 속에 되살아나면 혈관 속의 피가 얼어붙는지, 그리고 우리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 결코 작은 행운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p.74)


  너무 힘든 일을 당하면 생존을 위해 기억을 억압하게 된다. 수용소에서 돌아온 많은 이들도 의도적으로 그 시절의 기억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레비는 이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억했다. 그는 아우슈비츠를 이해하기 위해 혈관 속의 피가 얼어붙는 느낌을 피하지 않고 그곳에서 들었던 음악과 그곳을 상기시키는 모든 것들을 대면해 왔다. 그는 기억함으로써 아우슈비츠를 이겨냈다. 이처럼 기억함으로 살아왔던 사람이 서서히 아우슈비츠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 간다고 느꼈을 때, 살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수용소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현실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그가 죽음을 택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아우슈비츠를 증언하는 자로서 사명의 완수이다. 또한 이 책의 가치는 자살로 퇴색되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그가 이 글을 썼던 이유 그대로 읽어주는 것이 전 생애를 바쳐 아우슈비츠를 경고하고자 했던 작가에 대한 예의라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에게도 각자의 수용소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헤프틀링과 SS의 역할을 동시에 맡고 있다. 우리는 학교, 가부장제 질서 안의 가족, 또 개개인의 인간관계 등에서 억압하는 자와 억압당하는 자, 착취하고 착취당하는 자이다. 매트릭스의 세계에서 빨간 약을 먹을 것인가 파란 약을 먹을 것인가 결정하는 것이 우리의 선택이듯, 이 관계를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 또한 우리에게 달려있다. 당시 독일 사람들도 실제로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일들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은 ‘보지 않기’를선택한 것이다.(고 책 말미의 작가 인터뷰에 나와있다.) 우리가 굳이 과거의 상처를 곱씹어 봐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제대로 보아야 더 나은 삶을 인류에게 남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처럼 거창한 말을 쓰지 않더라도 그저 사랑하는 우리의 동생들과 아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일을 외면할 수 없다.


  ‘우리의 동생들’과 ‘아이들’처럼 불특정 다수가 아닌 개별화된 존재로서 인류에 대한 인식은 중요하다. 수용소에서 인간성을 말살했던 방법은 인간 존재들을 개별화시키지 않는 것이었다. SS들과 헤프틀링은 개인적인 접촉을 하지 않았으며 헤프틀링에게는 개성을 말살시켜 인간적인 존재로 인식되지 않도록 하였다. 그래서 그들을 핍박하는 일에 참여한 독일인들은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세월호에 대해 잊자고 말하는 사람들(잊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사람들)은 그게 그냥 사고일 뿐이니 이제 그만 잊고 다른 일에 집중하자고 한다. 그러나 세월호는 그냥 한 건의 사고가 아닌 304명의 개별적인 죽음이 일어난 것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에 매우 공감했었다. 그들에게는 304명 각각의 사연과 잊힐 수 없으며 잊혀서는 안 되는 아픔이 존재한다. 우리가 공감하고 아파한다는 것은 그들을 개별자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장애인, 여성, 이민자, 모든 의미의 소수자들을 어떤 종류의 집단이 아닌, 인간 개개인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어떤 것이 인간적인 것일까 하는 물음에 대해 우리는 약자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역지사지, 모든 종교의 황금률인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라’ 등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이런 것들이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선한 마음인지에 대해서는 성선설과 성악설의 오랜 논쟁에서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이 적어도 선한 존재라는 확정을 짓지 않는 것에는 여러 가지의 이점이 있다. 레비는 인간에 대해 호기심을 지녔지만 인간이 선한 존재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기에 수용소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섣불리 절망하는 대신 그는 무화(無化: 인간적인 것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이 초기화되는 동물적인 상황)의 상태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동료를 바라보며 인간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중략)… 하지만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았다. 그는이 무화無化의 세상 밖에 있었다. 로렌초 덕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p.187)


  무엇이 인간적인 것인가? 그것이 무엇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선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로렌초는 인간이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타인이 인간임을 일깨워주는 사람이다. 환경오염 정도를 알려주는 지표생물처럼, 인간성이 말살된 상황에도 우리가 인간임을 알려주는, 말하자면, ‘지표 인간’인 것이다. 우리 각자가 지표 인간이 된다면 인간세상에도 조금은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로렌초처럼 오염되지 않은 인간성으로,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그것, 마음속에 태어나면서부터 장착된 인간적인 것에의 향수- 여기서는 희미한 선의 가능성-만 불러일으켜줘도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기독교의 진리에 따르면 인간은 죄를 지어 악하지만 본래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만들어졌다고 한다. 희미한 선의 가능성이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처럼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었으나 잃어버린 어떤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관계에 있어서 선한 마음으로 행한 일들에 보답받지 못하고 때론 해를 입을지라도 그 마음은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그 마음을 보고 우리가 인간이었던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현실을 레비가 봤다면 어떠했을까? 인간은 어리석게도 역사를 되풀이한다. 그렇지만 인간에게는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능력을 발휘해 아우슈비츠를 곱씹어봐야 하는 이유는 당연히 어리석은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의 경고를 끝으로 북클럽 후기를 마치겠다.


그러므로 고대의 현인들은 ‘사람은 언제나 죽게 마련’이라는 교훈을 남기는 대신, 지금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이런 큰 위험을 상기시키는 게 옳았을 것이다. 수용소 안에서 자유로운 인간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그 내용은 바로 이런 것이었으리라. 지금 여기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을 당신들 집에서 겪지 않도록 주의하시오.(p.80)


(by 폭풍의 점장)


* 위에 쓴 내용은 밤의 북클럽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이 내용의 소유권은 북클럽에 참여한 모든 분들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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