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런치 첫 글 by이미지 컨설턴트 천예슬
나 이제 브런치 할 거야.
이 말을 하고 브런치 첫 글을 쓰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지금도 [발행] 버튼을 누를 수 있을지 미정인 이 글을 시작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첫 글은 짜잔! 하고 멋있게 시작하고 싶었는데 의식의 흐름대로 나의 브런치 처음을 시작한다. 이미지 컨설턴트로 일하며 이미지 위주인 다른 채널을 통해서는 기록하고 표현하지 못한 것들을 앞으로 브런치를 통해 문장으로 기록하려고 한다.
올해 내 나이 서른. 많다면 많고 아직 어리다면 어린 나이. 다들 서른은 별 거 아니고 서른 하나부터 진짜라고 하니 서른이 되니 괜히 이십 대를 정리해야만 할 것 같다. 나의 20대를 예쁘게 잘 포장해서 "자, 20대 여 힘내라! 할 수 있다"라고 말해야만 할 것 같지만 20대는 힘을 내기 어렵다. 나의 10대와 20대 시절이 그랬다.
이미지 컨설턴트는 어떤 일을 해요?
지난해 봄부터 이미지 컨설턴트로서 일을 시작했다. 이제와 말하지만 나는 정말 이 일을 하게 될 줄 몰랐다. 많은 분들이 디자인이나 패션, 뷰티 쪽에 오랜 시간 종사하다가 이미지 컨설팅 쪽으로 넘어오는 건 보았지만 나는 어떻게 보면 그동안 해 온 일이나 학교 전공도 지금 일과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이방인. 일정한 툴과 이론은 있지만 사람마다 백그라운드도 가치관도 다르기 때문에 (특히나 이 분야에서는 정답이 없다.) '이미지 컨설턴트'라는 같은 직업을 내밀어도 하는 일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나의 일을 간단히 표현하자면 Visual appearance 외적 이미지를 통해 내적 이미지 Self-respect를 향상을 돕는 일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보이는 건 중요하다. 처음 만나는 그 짧은 순간에 우리는 상대의 직업, 나이, 배경 등을 판단하고 이 사람과 가까워질 수 있을지 없을지를 무의식 중에 판단한다. 이 첫인상을 바꾸려면 60번 이상 1:1로 만나야 한다고 하니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모두가 바짝 힘주어 꾸미고 다닐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본인이 가진 외적인 아름다움은 알고 필요한 순간에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몰라서 못하는 것과 알지만 안 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물론 외모보다 내면이 더 중요하지만 우리의 아름다운 내면을 짧은 순간에 전달하기는 어렵다.
이미지 컨설턴트로 일하게 된 계기가 뭐예요?
친가 쪽 분들은 우리 아버지를 비롯해 대부분 키도 크고 한 몸집 하신다. 어렸을 적 나는 아버지를 빼다 박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많이 먹었고 먹고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었고 말 수가 적었고 씻는 걸 귀찮아해서 추운 계절에는 씻지 않아 피부에 염증이 생긴 적도 있었다. 나의 유일한 낙은 퇴근할 때 아버지가 사 오는 간식. 당시 회사원이던 아버지는 집 근처 당시 1호선 성북역 육교 위의 붕어빵을 추운 계절에는 거의 매일 사 오셨다. 집안 경제사정이 갑자기 어려워지면서도 먹을 걸 못 먹었던 기억은 없다. 그만큼 부모님은 자식들 만큼은 잘 먹고 먹는 것 때문에 서러운 일은 없기를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 부모님이 원망스러운 적이 있었다. 부모님이 '나를 너무 잘 먹였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이 찐 거야.'라고 내 무거운 몸을 부모님 탓으로 돌렸다. 초등학교 고학년, 160cm 초반의 키에 70kg에 육박하는 몸무게는 그 당시 나는 움츠려졌다. 한창 2차 성징이 꿈틀 댈 무렵 여자 아이들은 가슴둘레로 예민해졌고 자신의 신체 사이즈를 부끄럽게 여겼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분명 초등학생 때 어떤 친구가 나를 비웃으며 가슴둘레 95라고 놀렸던 일. 부끄러웠다. 우리에게 95라는 숫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숫자처럼 다가왔다. 반드시 외적인 것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내향적인 나는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데 서툴렀고 친구가 거의 없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던 중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나의 유일한 친구였던,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 은정이와 밤마다 줄넘기를 했다. 아스팔트 위에서 열심히도 뛰었던 것 같다. 살이 빠질 때는 잘 모른다. 빠지고 나서 원래 입던 교복을 입었을 때 빠진 걸 느끼지. 살이 빠지고 학교 선생님들이 예쁘게 봐주고 대놓고 "꽃사슴"이라고 부르는 선생님도 있고 동급생, 상급생들의 시기 섞인 눈빛이 있었음에도 기분이 너무 좋았다. 예쁘다는 말을 계속 듣고 싶었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수업시간마다 선생님들이 하는 농답까지도 다 받아 적었다. 그리곤 쉬는 시간에 읽고 외웠다. 그날 배운 건 그날 다 외웠다. 시험기간에는 그걸 다시 복습하는 정도였다. 시험 점수가 잘 나왔고 흐릿하지만 중학교 재학 시절 전교 1등을 한 적도 있었다. 내가 가진 걸 잃지 않기 위해,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더 악물고 수업시간에 집중을 하고 공부를 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곱게 화장까지 받고는 학교 합창대회 MC를 본 적도 있다.
지금도 가끔 중고등학교의 이미지 메이킹 수업이나 취업캠프 강의를 가면 예전의 나의 모습이 많이 생각난다.
아름답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중학생 때부터 알았던 것 같다. '겉모습이 바뀌면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구나'. 10대의 나는 이미지 컨설턴트라는 직업이 있다는 걸 알리가 만무하고 (당시 나의 장래희망은 외교관 뭐 이런 거였다.) 국내에 이런 직업도 없었겠지만 누구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에 대한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한창 외모에 예민한 학생들에게, 고객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다. 아름답지 않은 사람은 없다. 매력 없는 사람은 없다. 단지 그 아름다움의 포인트가 다를 뿐, 아름다움을 느끼는 관점이 다를 뿐이라고. 그러니 본인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깎아내리지 말자고. 자신이 갖지 않은 걸 갖기 위해 채워 넣으려는 것보다, 원래 가지고 있는데 너무 익숙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을 찾아서 드러내자고.
나는 이런 생각으로 일하는 이미지 컨설턴트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중동 항공사에서 승무원으로 일하고 국내에 들어와 모 매거진 피쳐팀의 어시스턴트로 일했다. 그간 해 온 일들을 보면 비주얼이 너무나 중요한 직업. 화려해 보일 수 있는 일. (다들 묻는다. 왜 그만뒀냐고. 왜 그만뒀는지는 찬찬히.) 보이는 걸로 판단받아 왔기에 그것들로 커뮤니케이션해 온 게 내가 20대 때 해온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미지 컨설턴트로 하는 일로 자연스럽게 흘러온 게 아닐까.
특별히 웃을 일은 없지만 웃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웃을 일은 어디든 있다.
9 Sep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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