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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 the record
Aug 13. 2024
#1
‘오늘 왜 이러냐.’
아까 과호흡을 불러일으킨 엽서 때문인가 현수는 괜스레 옛 생각에 사로잡힌 자신을 추슬렀다.
설희가 떡볶이를 기다리고 있으니 얼른 정신을 차리며 현수는 손을 빨리 움직였다.
현수: 설희야~
얼추 됐어.
설희: 오~ 맥주 꺼낼게.
냉동고 오른쪽 맨 아래 칸이지?
부산스러운 설희가 슬라이딩하듯이 와다닥 냉장고로 향했다.
현수는 쟁반을 꺼내서 떡볶이를 놓을 냄비 받침부터 앞접시, 국자, 수저를 옮겨 놓고 거실 테이블로 갔다.
설희: (맥주는 놓으며 앉으려다 말고) 아! 맞다. 맥주 컵!
현수: 앉아 있어.
내가 가져올게.
설희: (자리를 잡고 앉아서) 넷**스라도 볼까?
보고 싶은 거 있어?
현수: 어~
그냥 아무거나.
설희: 어? 어! 그래.
그러면 예능 아무거나 튼다~
포근한 노래 대신 소란스러운 예능의 웃음소리가 거실을 날아다녔다.
현수는 이미 얼려놓은 맥주 컵을 챙겨와서 설희 옆에 약간 거리를 두고 앉았다.
맥주 한잔을 먹기 좋게 따라서 설희 앞에 먼저 내어주었다.
마저 한잔은 자신을 위한 무알코올 맥주를 따른 현수가 ‘짠’을 외치자, 설희도 응수하곤 둘은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켰다.
둘은 이내 마라 로제 떡볶이를 먹기 시작했다.
현수가 집에서 한 거지만 배달앱으로 시켜 먹는 그것만큼 맛있는 마라 로제 떡볶이였다.
설희와 현수는 시시덕대며 떡볶이를 비워냈고 안주가 다시 필요해졌다.
현수는 일어나 주전부리를 한 아름 챙겨와서 설희 옆에 똑같이 거리를 두고 앉았다.
그리고 주전부리 틈에 챙긴 엽서를 설희에게 내밀었다.
현수: 설희야, 이거 한번 봐줘.
설희: 뭔데?
(엽서를 집어 들곤) 이미지를 너무 확대한 거 아냐?
다 깨졌네!
이 디자이너 혼나야겠네.
(엽서 뒤를 뒤집고는) 귀신, 만월, 기억, 사서?
이, 이게 뭐야? 현수야?
누가 보냈어? 이런 거!
현수: 신 할머니가...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고 하더니 이게 왔어.
설희: 너네 신 할머니?
그 타이밍은 별론데 다 맞는 말만 하시는?
현수: 어. 그래서.
왕년의 추리소설 작가님이 보기엔 어때?
설희: (냉수를 들이켜고 마른세수하며) 잘됐네!
이미 알코올 들어갔으니 정신만 잡으면 괴랄하게 아이디어가 빡 나오겠네!
괜히 말을 늘리며 설희는 생각할 시간을 벌고 있었다.
설희가 아는 현수의 비밀이 하나 있었다. 엽서에 적힌 ‘기억’이란 이 단어가 설희의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현수가 죽을 뻔했던 그날 밤 그리고 그 이후에 설희가 아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설희는 옛 기억을 더듬었다.
#2
“띵 똥~”
박 무당: 으아아악!
홍여사: 박 무당아, 와 그라노. 니 괜찮나?
박 무당: 파... 판, 판덕 할머니,
그, 그 인터폰 보지 말고 방으로 들어가세요.
홍여사: (비장한 듯) 내 손자 일이다.
이 일로 박 무당 니 다치면 내는 몬산다.
내가 본다 마!
최무당: (방에서 소리 지르며 말리듯이) 어르신!
두 무당의 애처로운 목소리를 뒤로 하고 홍판덕 여사는 인터폰을 봤다.
털썩.
홍여사도 입을 틀어막은 채 박 무당처럼 맨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응답이 없자 초인종이 또 울렸다.
“띵 똥~”
박 무당이 벌벌 떨면서도 홍여사를 부축하며 최무당이 들리도록 소리쳤다.
박 무당: 언니, 그냥 계속 기도해 주세요.
여기는 제가 맡을게요.
최무당: 알았어!
도대체 인터폰에 무엇이 보이길래 두 무당이 다 나자빠질 만큼 놀란 걸까?
보통 일이 아닌 그것만은 확실했다.
박 무당은 홍여사와 함께 다시 인터폰으로 향했다. 그렇게 놀랐는데 왜?
정면으로 맞닥뜨리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다시 한번 초인종이 울렸다.
“띵 똥~”
박 무당과 홍여사는 서로 사시나무 떨듯이 떨리는 몸을 어떻게든 부여잡고 인터폰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용.
여기가 스커트가 잘 어울리는 설희네 맞지요?
상황이 상황이라...
이렇게 다 같이 오게 됐어요.”
설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말했다.
“엄마. 할머니. 이 목소리!
꽃분 이모에요.
만월 도서관 매점의 꽃분 이모.”
집 안에 있던 모두가 놀란 눈으로 설희를 쳐다봤다.
산 사람은 죽을 때가 아니면 저승사자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오늘이 설희가 죽는 날인 것만 같았다.
박 무당이 ‘안돼!’라며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까무러쳐 버렸다.
하씨 아저씨: 여보, 설희 엄마!
설희: 엄마!
하씨 아저씨와 설희가 번개같이 박 무당 곁으로 달려왔다.
인터폰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어머! 어머! 죄송해요!
설희 데리러 온 거 아니에요!
그...
저희가 현수를 찾았거든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홍여사는 맨발로 마당을 지나 현관문을 열었다.
새까만 한복에 하얗게 질린 얼굴과 눈과 입술이 시꺼먼 이들!
서너 줄로 포개어 선 스무 명 남짓 되는 저승사자들을 마주했다.
인터폰으로 봤던 바로 그 모습이다.
천하의 홍여사도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설희에 집에 모인 모두를 데려갈 게 아닌 이상 이정도 수의 저승사자가 이승에 올 일이 없기 때문이다.
통상 사람이 1명 죽어 데리고 갈 때, 실수가 있으면 안 되니 저승사자가 2인 1조로 붙는다.
그만큼 생명을 다루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정해진 법도였다.
저승사자들 사이에서 혼자서 꽃무늬 옷을 입은 이가 보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실의 끝자락에서 제멋대로 나부끼는 현수의 영혼도 보였다.
문득 홍여사는 얼마 전에 현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3
현수: 할머니 우리 동네에 새로 생긴 도서관 매점에서 악귀를 봤어요.
자기가 저승사자라고 착각하는 악귀요.
홍여사: 악귀?
진짜 악귀면 알라들은 근처에 갈 수도 없다. 추버가지고.
현수: 악귀 근처에 가면 추워요?
홍여사: 주변의 온기란 온기를 다 끌어다 쓰니까.
춥드나? 니한테 해코지 하드나?
현수: 아니요. 꽃분 이모는 따듯해요.
떡볶이랑 어묵도 사주고. 아이스크림도...
홍여사: 그럼, 그냥 알라들 좋아하는 잡귀다.
그런 귀신들은 뭐가 잘못되어서 잡귀가 됐다가도 착해가가 금방 저승 간다.
걱정하지 마라.
#4
홍여사는 현수의 말을 더 깊게 들어보지도 않고 잡귀라고 단정을 지었던 자신을 후회했다.
현수의 영혼과 함께 저승사자가 무려 스무 명이나 눈앞에 있지 않나?
홍여사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홍여사: 꽃분 이모요?
꽃분 이모: 어머 할머니!
저를 아세용?
제가 현수 보고 혹시 몰라서... 할머니 한번 도서관으로 모시고 오라고 했었는뎅!
홍여사: 우리 수야가, 현수가 말했는데...
다 내 불찰입니더.
꽃분 이모: 어머! 아녜용.
만월 도서관이 새로 생긴 곳이라 모르셨을 거예요.
저희는 안식년을 받아서 도서관에서 쉬는 ‘저승 사서’들 이에요.
만월에 망자들 올려보내는 것 말고는 이곳 판산동 만월 도서관에서 조용히 지냅니다.
홍란 할매: (뒤에서 쓱 나오며) 판덕아.
나도 왔다.
홍여사: 어? 언니야.
목욕탕 언니야가 와?
홍란 할매: 나도 저승 사서야.
꽃분이가 우리 중에 제일 대빵이니깐. 잘 얘기해 봐라.
얘 아니었으면 현수도 못 찾았다.
홍여사: ... 맞나?
아라따. 언니야.
(꽃분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며) 우짜다가 이렇게나 많이 오셨습니꺼?
꽃분 이모: 그게용.
설희가 도서관에서 빌려 간 영어 듣기평가 문제집이 있는데용.
도서관에서 빌려 가는 책마다 저희가 주문을 걸어놔서요.
그 집에 잡귀나 악귀가 있는 게 감지되면 저희가 알 수가 있거든요.
그 책 덕분에 오늘 설희의 헤드폰에 잡귀가 들린 걸 알게 됐어요.
박 무당이 안정된 듯 하자, 바깥이 걱정되었던 방사장이 슬며시 홍여사 뒤에 자리 잡았다.
방에서 기도를 드리던 최무당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남편인 방사장 옆에 섰다.
꽃분 이모: (방사장과 최무당에게 눈인사하며) 그래서 저희가 설희네에 가봐야지 했는데!
갑자기 현수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게 느껴지지 모에요?
현수 영혼이 무슨 강풍에 날리는 비닐봉지처럼 판산동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너~어~무 빨라가지고!
현수를 잡으려다 보니 저희 저승 사서들이 다 동원될 수밖에 없었어용.
홍여사: ...
꽃분 이모: 어휴~
현수가 몇백 년 만에 탈출한 미치광이 도깨비불처럼 날아다니는 통에 몇 시간을 헤맸어요.
마침 집에서 계속 기도를 해주셔서 현수가 집 근처만 오면 속도가 조금 느려지더라고요.
설희네 집쪽으로 여우 몰이를 하듯이 해서 겨우 데려왔네용.
많이 놀라셨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홍여사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연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했다.
제 손자 하나를 위해 저승사자 중에서도 손꼽히는 저승 사서들 스무 명이 나서줬다니...
꽃분 이모: 아효... 일어나세요.
그 현수가 여기, 설희 방에 있죠?
현수 영을 얼른 넣어줘야 해서용.
이렇게 말하며 꽃분 이모는 야단스레 둥실거리는 풍선 같은 현수의 영혼을 가지고 설희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내 퍼렇게 질렸던 현수의 혈색이 돌아오고 곤히 잠에 든 듯이 색색거렸다.
꽃분 이모: 현수 할머니, 현수 영 잘 넣어놨어요.
홍여사: (방문 앞에 서서) 네.
고맙습니다.
지가 몸 좀 추스르고 만월 도서관으로 꼭 가겠습니다.
꽃분 이모: 예예.
홍여사가 꽃분 이모를 문밖까지 배웅하러 나왔다.
홍란 목욕탕의 홍란 할매와 다른 저승 사서들에게도 홍여사는 크게 머리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홍여사는 큰절을 올렸다.
꽃분 이모: 아효. 일어나세요.
현수 할머니, 이러시면 저희가 너무 죄송스러워요.
홍여사: (일어나며) 그래도 인사는 해야지요.
꽃분 이모: 현수가 운이 참 좋은 아이에요.
다 현수 복으로 살아난 거예요.
그믐이 아니면, 저희 저승 사서들은 저승사자처럼 이승에서 힘을 발휘할 수 없거든요.
홍여사: 예.
지가 하늘에도 거하게 제사를 올리겠습니다.
꽃분 이모: 감사해용.
현수가 몇시간을 구천에서 헤매서... 후유증이 있을 수 있어요!
염라대왕님께 제가 보고드려서 좋은 쪽으로 해결 방법을 찾아볼께요.
아무튼 긴 얘기는 도서관에서 오시면 그때 해요.
쉬셔용. 현수 할머니.
홍판덕 여사는 꽃분 이모와 저승 사서 무리가 안 보일 때까지 연신 허리를 숙여 기도하는 인사를 했다.
그 뒤로 언뜻 설희의 모습이 스쳤다.
#5
하설희는 그날 멀리서 지켜보던 그 장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물론 기억을 잃은 이후 현수의 변화를 눈치챘던 것 때문도 있다.
‘현수의 기억에 대해서 안다고 말을 해?
말아?’
설희는 커오며 수천 번도 넘게 자신에게 되물었었다.
현수는 모두에게 다정다감하고 넉살이 좋은 것 같지만...
자신의 문제, 슬픔, 우울, 비밀은 방자훈이나 하설희에게도 나누지 않는 아이였다.
현수는 주변 사람들을 걱정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흔한 취업 투정도 거의 한 적이 없다. 민현수는 열려있는 듯 폐쇄적이었다.
너무 밝은 아이는 슬픔이 많은 아이와 같다.
다들 현수가 무던한 아이라 했지만, 글쎄... 정말 예민하지 않으면 다정할 수도, 세심할 수도 없다. 설희는 현수의 예민함이 늘 신경이 쓰였다.
현수: 생각 다 했어?
설희: 어! 어!
명탐정 하설희 빙의했지!
현수: 그래그래.
이거 뭐 같아?
설희: 이런 단어 메시지는 소설에선 보통 살인 사건에나 나오는 건데...
그건 소설일 때이고! 현실에서 보자면?
현수: 보자면?
설희: 귀신, 만월, 기억, 사서.
그냥 단순 문장으로 연관시켜서 얼개를 짜서 종결해 볼게.
(옆에 있던 노트에 쓰면서)
민현수는 이제 ‘귀신’을 보지 않고 살 수 있게 됐지.
민현수가 사는 동네인 판산동에는 ‘만월’ 도서관이 있지.
민현수는 ‘사서’가 되고 싶어 해.
현수: 오~ 좍가님!
설희: (장난스레 으스데며) 여기까지만 봐도!
이 엽서는 진짜 너를 깊게 아는 게 아니고는 알 수 없는 내용이 쓰여 있어.
이렇게 3가지는 심플하게 문장으로 종결할 수 있는데,
민현수와 기억은... 흠...
하설희가 말꼬리를 흐렸다.
민현수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설희는 어색한 침묵을 참고 있었다.
말이 끊기는 걸 못 참는 자신을 꾸욱 누르면서 말이다.
현수 입으로 현수의 비밀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아니 이미 알고 있다.
현수가 밝히고 싶지 않아 하는 걸 아는 체 하고 싶지 않았다.
또, 설희가 말해버리면? 현수가 숨기고 싶어 했던 것이 더는 비밀이 아닌 게 되니까. 지켜주고 싶었다.
그냥 그렇게 먼저 입을 열 때까지 언제까지나 기다려 주고 싶었다.
엽서가 예기치 않게 그 비밀을 향한 방아쇠를 당겼을 뿐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현수가 입을 열었다.
현수: 설희야, 사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