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통 때문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자훈이가 설희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훈: 으... 머리야.
넌 기억이 이상하단 걸 어떻게 알았어?
설희: 자훈아. 어... 그게 나 일기장이 두 개야.
학교에 내는 일기장 말고 내 진짜 일기를 쓰는 다이어리가 따로 있어.
오늘 다이어리를 쓰려다가 예전에 쓴 걸 보고 내 기억이 이상하단 걸 알았어.
자훈: 설희야.
근데 아까 니가 말한 호텔 티본스테이크 이야기.
현수가 깨어난 날 들었던 것 같지 않아?
설희: 맞아.
자훈: 설희야, 지금 당장 지금 일을 일기를 써. 그동안 내가 너네 집 앞으로 갈게.
현수는 만월 도서관에 갔을 거야.
요즘 현수 할머니가 매일 거기 가시거든.
같이 가서 물어보자.
설희: 응!
현수 혼자 있을 때 물어보자.
어른들이랑 있으면 걱정하실까바 걔 또 말 안할지도 몰라.
자훈: 그래.
설희는 전화를 끊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이어리를 썼다.
늘 위로가 되는 다이어리가 기억을 지켜준 것 같아 기쁘기도 하고, 현수 일의 증거물이 된 것 같기도 해서 서글펐다.
설희는 날 것의 감정을 썼다.
‘00년 00월 00일
다이어리. 있지...
오늘 우리 반 미영이랑 자훈이랑 나랑 셋이 티본스테이크 얘길 했어.
내가 할머니와 호텔에서 먹은 티본스테이크가 어떤 맛이었는지 말이야.
그런데...
우리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외할머니는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있잖아?
난 할머니와 호텔에 갈 수 없으니, 티본스테이크도 먹은 적이 없는 거지.
어떻게 먹어보지도 않은 맛을 진짜 기억하는 것처럼 말할 수 있었을까?
나도 몰랐어. 다이어리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야.
자훈이는 우리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왔었는데...
자훈이도 내가 다이어리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몰랐데.
우리 기억이 왜 이렇게 된 걸까?
나 좀 무서워.
이제 자훈이랑 현수를 만나러 만월 도서관에 가.
다시 돌아올게.’
설희는 다이어리를 쓰자마자 방을 뛰쳐나갔다.
그 사이 자훈이가 도착했는지 현관 앞에서 서성이는 발목이 현관 문틈 사이로 보였다.
설희가 철문을 열자마자 자훈이가 설희의 손을 낚아채서 만월 도서관으로 뛰었다.
#2
현수는 만월 도서관의 관장실이 있는 4층 밖 복도 의자에 앉아 있었다.
현수가 꽃분 매점에 가서 꽃분 이모를 찾았더니 손님이 와서 관장실에 가 있다고 해서였다.
관장실 문 옆에 벽에 붙은 재실판이 ‘면담 중’에 표시되어 있어서 현수는 면담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마 할머니가 이야기 중이실거다.
처음에는 그냥 들어갈까, 했지만,
현수 생각에 어른들은 늘 어른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으니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현수는 어젯밤에 홍여사가 오늘 오후에 꽃분 이모를 만난다고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홍여사: 수야~ 현수야.
자나?
현수: 아니요.
홍여사: (머리맡에 스탠드를 키며) 수야~ 현수야.
니 낼 있다 아이가.
핵교 끝나고 자훈이랑 설희랑 놀다 집에 올끼가?
현수: 아니요. 할머니.
내일까지는 그냥 바로 집에 올래요.
홍여사: 그라믄 있다 아이가.
핵교 끝나고 쪼매 놀다가 꽃분 매점으로 와라.
할미가 내일 도서관 옆에 홍란 목욕탕에 가서 몸 좀 지지다가.
가리 늦까 저녁 전에 나와서 꽃분 이모 만날꺼거든.
니 오면 꽃분 이모랑 홍란 할매랑 내랑 해서 넷이서 밥 묵자.
할미가 만월 사람들한테 밥 사야 한다!
현수: 저... 때문에요?
홍여사: 현수야.
니 사람 인연이 을매나 중한지 아나?
현수: 음...
할머니가 자훈이랑 설희랑 오래오래 늙어 죽을 때까지 봐야 한다고 한 거랑 같은 거예요?
꽃분 이모랑 홍란 할매가요?
홍여사: 맞다.
걔네는 억시로 소중타.
근데 갸들은 니 또래 친구고... 자훈이네 설희네 부모도 내보다 어리고 해서.
할미는 니한테 할미 동생 같은 사람 하나, 할미한테 언니 되는 더 할미 같은 사람 하나.
이르케 니한테 해주고 싶다.
현수: 그게 무슨 말이에요?
홍여사: 니는 으른이 다 같은 으른 같제?
세상이 그릏지가 않타.
수야. 현수야.
나이가 많다고 다 으른은 아니다.
자훈네랑 설희네 부모는 나이가 어려도 음층시리 어른이다.
현수: 네, 할머니.
홍여사: 근데 있다 아이가.
나이가 억수로 많으므는...
우리 수야같은 아가 쪼매만 이쁘고 잘해도 마 줌치(주머니)에 든 돈 다 주고 싶은 맴이 든다.
이쁜 아는 마 갸가 버릇없이 굴어도 그게 그리 이쁜 기라.
나이를 많이 묶으면 으른이 생각이 다 아 같아진다.
바보 된데이. 으른이...
근데 할미는 우리 현수가 그른 바보 같은 사랑도 많이 받아 받으면 좋겠다.
현수: 할머니...
근데요. 진짜 나이 들면 그래요?
홍여사: 내가 그릏트라.
수야. 미안타.
내가 느그 아부지 낳고 키울 때는 아가 그리 이쁜지 몰랐다.
툭툭거리고 마! 사나자슥이니깐ㄴ 알아 크겠거니 하고 내삐려둔 적도 많다.
현수: 할머니...
홍여사: 근데 나이 들고 내가 니 키우면서 보니깐.
니가 만날 쓰러져도 이쁘고 다쳐와도 이쁘드라. 죽지만 않으면 이기 괜찮은기라.
내사 마 대신 아파줄 수가 없는 거 말고는 니가 뭘 하든 내가 다 괜찮드라.
민종혁이 고거도 내가 니한테 하는 것만큼만 했어도 이리 연락이 없지는 않았을 낀데...
현수: ...
홍여사: (눈물을 슬쩍 훔치며) 어쨌든 천하의 홍판덕이가 말이다.
나이가 무그니까는 이리 바끼뿟따!
할미가 이런데...
내보다 나이 많은 홍란 목욕탕 할매,
내보다 쪼매 어린 꽃분 이모야 눈에는 니가 을마나 이쁠끼고?
테레비보니깐, 아는 어릴 때 사랑을 많이 받아야 한다카드라.
할미가 니한테 그런 사랑 주는 으른을 여럿 맨들어 주고 싶어서.
내일 밥을 사서 니를 위한 인연을 틀끼다.
안 그래도 이쁜 우리 수야가 쪼매만 들락거리면,
그 이모랑 할매부터 만월 도서관 사람들이 을마나 니를 이쁘다 할 끼고?
현수: 할머니이~ 할머니 눈에만 이쁜 거에요.
내가 할머니 손자니까요.
홍여사: 아이고 수야. 니는 거울도 안 보나?
설희 고거 우리 집 올 때 니한테 이뻐 보일라고 스카트 입고 오는 것만 봐도...
고만한 아 눈에나 할미 눈에나 니가 다 이쁜 긴데!
현수: 설희가요?
스커트를 입었었어요?
홍여사: 음마야~ 우리 수야 말하는 거 보소!
현수야, 니눈에는 안 비드나?
음마야~ 민종혁이 아 아니랄까바. 됐다 마! 씨 도둑질은 못한다드만 그말이 딱 맞네!
수야, 니는 여자 맘을 으찌 그리 모르노!
현수: 할머니, 설희는 여자 아닌데...
그냥 친군데요?
홍여사: 아이고 신 할머니요...
설희가 와? 갸가 와 여자가 아이가?
내사 마 모르겠다... 니도 머스마라고! 아이고... 내가 뭐라 하겠노!
현수야 자라이.
할매 니캉 얘기하니깐 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설희한테 미안해 죽겠다.
가스나 그기 보기는 그래도 엄청시리 여린 아인디... 아이고야.
현수: 설희한테 왜요?
할머니, 두통약 가져올까요?
홍여사: 수야.
그 머리가 아이다.
현수: 그럼 어떤 머리...
홍여사: (머리 맡에 스탠드를 끄며) 됐다. 마.
자라. 늦읐따.
머스마들이 가스나들 보다 크는게 쪼매 늦드라.
수야 니, 쪼매만 더 크면 할미가 무슨 말하는 지 안다.
현수: (이상하단 표정을 하며) 여기서 더 크면 안 보이던 게 보여요?
홍여사: (머리를 쓰다듬으며) 수야. 현수야.
우리 수야, 내일 학교 끝나고 만월 도서관으로 온나.
니캉 내캉 꽃분 이모랑 홍란 할매랑 해서 밥 묵자.
현수: 네, 할머니.
‘딸깍’
관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현수는 어젯밤 생각을 멈췄다.
현수가 고개를 들어보니 왠 낯선 남자 어른 한 명이 관장실에서 나왔다.
만월 도서관의 관장인 오 관장님이었다.
오 관장: 학생?
학생이 혹시 현수 군이야?
#3
현수는 처음 보는 사람 입에서 자기 이름이 나오자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장소가 만월 도서관인 만큼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현수: 안녕하세요.
저희 할머니랑 꽃분 이모랑 홍란 할매 만나러 왔는데요.
매점에 물어보니깐 여기 있다고 하셔서.
오 관장: 응! 현수군.
(고개를 돌려서) 여기 현수 군이 왔어요.
할머니랑 우리 만월 도서관 터줏 마님 두분 다 안에 계셔.
들어가 봐.
현수: (안으로 들어가며) 네, 감사합니다.
홍여사: (반쯤 일어서며) 우리 수야 왔어요?
현수야. 일로 들어온다.
현수: (할머니 옆에 앉으며) 네, 할머니.
홍여사: 오 관장님, 오 관장님도 같이 가십시다.
오 관장: 어휴.
저는 만월 도서관에 남아야지요.
홍여사: 그라믄 오 관장님, 저녁은 드시지 마시소.
오늘 가는 한정식집에 말해가가 도시락으로 해서 보내라고 하께예.
오관장: 예.
염라 대왕님께 보고 올리고 먹도록 하겠습니다.
뇌물이 아니라도 보고는 해야 하는 게 먹을 수 있는 게 저승 법도라서요.
홍여사: 예.
편한 대로 하시고 인원수만 알려주시소.
오 관장: 네네.
그럼, 말씀들 나누세요.
‘철컥’.
그렇게 오 관장님이 문을 닫고 나가고 관장실에는 나와 할머니, 꽃분 이모와 홍란 할매만 남았다.
늘 도서관 매점이나 할머니 따라가던 목욕탕에서 보던 이들을 도서관 관장실에서 보니 조금 어색했다.
현수: (고개를 숙이며) 안녕하세요.
홍란 할매: 오~ 목소리 들으니 우리 현수 이제 건강해졌나 보네.
할매 보게 잘생긴 얼굴도 좀 들어보세요.
현수: 안 잘생겼어요...
홍란 할매: 아효, 잘생겼다고 하면 아니라는 거 보니깐.
우리 현수 맞네. 맞아.
홍여사: 다~ 언니야네 저승 사서님들 득분이다.
우리 현수가 마이 좋아졌다.
꽃분 이모: 현수야. 다행이당~
별 일은 없었고?
꽃분 이모의 말에 현수는 일순간 얼어붙었다.
모두가 있는 이 자리에서 현수는 자신이 타인의 기억을 빌려줄 것이 있다는 걸 말해도 좋을지 몰랐다.
더 이상 할머니인 홍판덕 여사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
설희와 자훈이가 거짓말을 하게 만든 것 같은 죄책감.
도대체 어떻게 설희에게 자신의 기억을 빌려주게 될 건지 모를 의문점.
고작 초등학교 4학년인 현수가 혼자 고민하기엔 너무 큰 문제였다.
#4
설희와 자훈이는 숨 가쁘게 만월 도서관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장을 보고 걸어오는 아빠인 하씨 아저씨와 엄마인 박 무당을 본지도 모르게 쏜살같이 지나갔다.
하씨 아저씨: 설희. 저거 저거! 그냥 가뿟네.
(뒷목을 주물럭하며) 가스나 다 키워봐야 머스마 생기면 다 소용읍다더니.
벌써부터 현수캉 손을 잡고... 즈그 부모는 보도 못하고~
참말로!
박 무당: 여보!
아까 같이 뛰어가던 애는 자훈이던데?
하씨 아저씨: 음마야, 진짜가?
우리 양가에 바람쟁이는 읍는데! 저 가시나 저거 양다리믄 안 되는데...
박무당: 아효. 아저씨...
유난이다. 정말! 쟤네 아직 초등학생이네요.
저때는 다 친구야~
하씨 아저씨: 아지메요. 이리 세상을 몰라 우짤라꼬 그랍니까?
요즘 초등학생들도 다 연애한다!
으째꺼나 내 맴 속에 사웃감은 현수 밖에 없다.
박무당: 에휴... 내 딸이지만, 현수가 왜?
우리 딸이 이 아빠 닮아서 ‘얼빠’지 ‘얼빠야.
어떻게 얼굴만 보고 사랑에 빠지냐~
하씨 아저씨: 아이고~ 아지메요.
(능글맞게) 그라니깐, 당신이랑 결혼했지요~
얼빠라서요.
박무당: 어후~ 몰라!
(먼저 쑥하고 가버리며) 미쳤나바.
하씨 아저씨: 아따마!
또또~ 심장 벌렁벌렁거리게 확 마 팅기뿌네!
거기요~ 이쁜 아가씨요~
같이 좀 갑시다~ 으디까지 갑니까?
설희도 설희지만 하씨 아저씨도 다정하고 살가운 현수를 좋아했다.
‘아저씨~ 아저씨~’ 하면서 거의 매일 슈퍼에 오는 뽀얀 현수에게 정이 듬뿍 들었다.
하씨 아저씨는 아내 몰래 현수랑 설희 궁합을 보고 흡족해했더랬다.
딸 가진 아빠로서 누가 봐도 고운 현수가 나중에 커서 인물값을 할까 봐였다.
현수랑 설희랑 결혼하면? 여자가 진짜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만큼 남편 복이 있는 거라고 했다.
이런 엄마·아빠를 보지도 못한 설희는 자훈이와 헐떡거리며 뛰어 만월 도서관에 거의 다 도착했다.
그때 막 현수가 나오는 게 보였다. 자훈이가 이름을 부르며 앞으로 튀어 나가려 했다.
자훈: 현... 우웁.
설희: (자훈을 뒤에서 안아 손으로 입을 막으며) 현수가 혼자가 아니야.
현수와 일행들이 나오는데 보였다.
자훈이는 남자로 태어나 처음으로 뒤로 안기를 당하며 심장이 간질거리는 걸 느꼈다.
‘심장이 고장 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