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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림 Aug 21. 2020

내가 영국에서 살아남은 방법

영국 도착, 그 전쟁의 시작


안녕, 영국 신사 숙녀 여러분


드디어 영국 런던 히스로 공항에 도착했다. 대략 직항으로 12시간 정도의 처음 겪어 보는 장거리 비행이었지만, 영국을 간다는 설렘에 비행기 내에서 잠도 잘 수 없었다. 기내식을 두 번 먹고 눈이 빠지게 영화를 몇 편 보고 나니 이미 런던에 도착했고, 당시 영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던 후배 둘이 마중을 나왔다. 런던 시내 남쪽에 핌리코라는 지역 한인 민박집에 짐을 나 두고 바로 펍으로 향했다. 너무 나도 낯선 영국 펍에서 맥주를 마시며 우린 수다 삼매경에 빠졌고, 결국 난 겁도 없이 입국 첫날 새벽에 야간 버스를 타고 숙소에 돌아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잠도 못 자고 런던을 맞이 했다.

학교 수업 시작 전까지는 대략 2주 정도 남아 있었다. 그 기간 동안 영국 어학원을 등록해 두었고, 집도 알아봐야 했다. 핸드폰을 개통하기 전에 단기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유심칩을 사고, 학원을 다니며 지역 사이트에서 집도 알아보기 시작했다. 어학원에서 우리 반에는 한국인이 나밖에 없었다. 일본인 한 명과 중국인 한 명 그리고 나머지는 프랑스, 이태리 등 주변 국가에서 온 유럽피언 들이었다. 미리 시험을 치고 반 배정을 받았기에 영어실력들은 다들 고만고만했으며, 나를 포함 한 동양인을 제외하고는 다들 밝고 활동적이었다.




자취생의 노하우가 빛을 바랄 때


영국 유학을 준비하며 적응을 한답시고 몇 년 전부터 매일 아침을 빵으로 때웠다. 아침 점심 저녁을 밥으로 해결해야 하는 밥돌이였는데, 막상 영국으로 올 때쯤에는 빵이 너무 질려 결국 파스타로 대부분의 끼니를 해결했다. 마트에서 소스를 사서 빨간 소스, 하얀 소스, 때론 둘을 섞어가며 먹기도 하고, 올리브와 마늘, 소금으로 간단히 만들 수 있는 알리오 올리오도 참 좋아했었다. 나중에 아는 형이 알려준 비법으로 아이들이 밥에 뿌려먹는'밥이랑'을 파스타에 뿌려 먹었더니 또 다른 신세계였다.


영국 생활이 조금씩 적응돼가며, 한국에서 무겁게 들고 온 밥통으로 밥도 해 먹었고, 한국에서 부모님은 김치와 밑반찬 류를 만들어 종종 보내시기도 했다. 한 번은 집에서 보낸 김치가 거의 한 달 만에 도착했다. 다 쉬어 터졌으리라 예상하고 택배를 찾으러 우체국에 갔는데 역시나 김치는 이미 다 터져서 또 다른 큰 비닐봉지 안에 담겨 있었다. 부모님께 전화로 확인을 하니 혹시나 김치가 비행기에서 터질까 봐 끝 부분을 살짝 풀어 두셨고, 그사이로 냄새며 국물이며 다 넘친 것이다. 우체국 직원들이 얼마나 당황하고 애를 먹었을지 상상이 간다. 지금은 집에서 가끔 담가 먹기도 하지만 종종 집에서 김치를 가져올 때면 랩으로 두껍게 둘둘 말아 마치 누에고치처럼 포장해 가져 온다. 김치가 아무리 익어도 두꺼운 비닐 때문에 터지거나 냄새가 나지 않아 좋은 방법이다.


대학 자취 생활 때 부모님께서 가끔 방문하시며 된장찌개 거리나 제육볶음을 일인분씩 봉지에 넣어 냉동실에 넣어두신 게 살면서 하나의 생존 팁으로 작용했다. 국물 요리를 위한 무도 미리 썰어 놓고, 멸치는 미리 가루로 갈아두었으며, 감자도 봉지로 팔기에 남는 것들은 미리 썰어두고 얼려 다음 요리에 사용한다. 카레나 하이라이스도 한 봉지씩 담아 냉동실에 얇게 쌓아 두면 한 끼씩 먹기에 매우 좋다. 장이 민감해 MSG를 많이 먹으면 바로 탈이 나기에 조미료는 많이 사용하지 않고, 소금이나 간장으로만 간을 맞추었다.




조용한 다락방 젊은이


학교 근처에 방을 얻었다. 학교에서 버스로 15분,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였다.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딸이 한 명 있었으며 주인아주머니는 변호사였다. 내가 종종 집에 일찍 들어갈 때면 보통 아빠가 딸을 돌보고 있었고, 아주머니가 오기 전에 간단히 저녁을 해 두는 가정적인 남편이었다. 1층에는 다른 가족이 살고 있었고, 집주인 가족은 2층. 나는 집 안에 있는 급 경사진 계단을 올라 3층의 다락방에 살았다. 뾰족한 지붕 때문에 내방 외곽 부분은 경사져 있었고 초반에는 적응이 안돼 머리를 부딪치곤 했다.


화장실 및 설거지 이외에는 거의 다락방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집주인이 너무 조용해 무슨 일이 있나 하며 몇 번 올라와볼 정도로 쥐 죽은 듯 지내고 있었다. 당시에는 담배를 폈기에 천창을 열고 의자 위에 서서 바깥세상을 보곤 했고, 다른 집들 지붕 위로 구름과 어우러지는 하늘의 풍경이 나름 운치 있어 보였다. 한 번은 집에 쥐가 들어와 주인이 며칠을 고생하길래 내가 가지고 있던 참기름을 몇 방울 뿌려 두었더니 다음날 바로 잡혔고, 집주인은 그때 처음 본 듯한 참기름또 다른 효능에 깜짝 놀랐다.


그들은 대부분 감자칩, 파스타, 빵, 피자를 주식으로 먹었고, 된장찌개, 김치찌개 등 한국 음식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 한두 달 뒤에 2층 작은방에 들어온 한국인 친구와 같이 만들어준 불고기가 그들이 맛본 첫 번째 한식이라고 했다. 3층 다락방은 아늑하고 편하기는 했지만, 원하는 한국음식을 만들어 먹기가 힘들어 한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보고 연락해 손뼉 치며 대 환영하는 한국인 누님 집으로 이사했다. 마지막 한 달은 대략 이십 며칠 정도 살았는데, 남은 일수까지 계산 해 월세의 일부를 돌려 줄만큼 집주인은 꼼꼼했고, 아무런 문제 없이 쥐 죽은 듯 조용히 사는 다락방 젊은이와의 작별을 아쉬워했었다.

다락방 천창을 열어두고 밖을 바라보며 런던의 공기를 즐기곤 했다.




내가 만난 외국인 스승님들


우리 과 담당 교수는 흑인이었다. 나를 영국으로 추천한 교수님의 스승이자 나의 스승이기도 했다. 키가 꽤 컸고, 배가 남산만 하게 볼록 나왔으며, 걸음걸이는 항상 약간의 리듬을 타는 듯했고, 나이가 많으신데도 불구하고 장난기가 심했다. 교수님의 영어 발음은 몇 달이 지나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준비 해온 작업물을 보며, 랩을 하듯 중얼중얼 코멘트하시는 중간에 교수님과 나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교수님께 고개를 돌리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빠른 말속에 질문이 들어 있던 거다!!! 당연히 질문을 모르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내 얼굴은 빨개지고, 교수님은 마치 그걸 즐기는 듯 배꼽이 빠지게 웃으셨다. 그 교수님의 성격이 어떤지 이미 파악을 했기에 그 웃음이 기분은 나쁘지 않았지만, 매 순간 아찔했다.


부교수는 백인이었다. 내가 잘 못 알아들을까 봐 세심하게 신경 쓰는 듯했고, 내 작품에서 어떤 부분을 더 연구해야 하는지 어떤 건축가며 디자이너의 작품을 참고하고 어떤 식으로 적용하고 개발시켜야 하는지 방향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매번 다른 시도를 해볼 수 있도록 스케치로 자신이 생각하는 아이디어를 참고차 그려주었고, 한 줄 한 줄 코멘트를 써주기도 했다. 어찌나 그렇게 많은 정보들이 참고 노트를 보지 않고도 줄줄줄 나오는지 마냥 신기했다. 흑인 교수님은 큼직큼직한 아이디어를 줬고, 이 교수님은 세세한 디테일을 담당하는 역할을 했다.


 

학교는 모든 공간이 열린 구조였다. 조금 시끄럽긴 했지만, 다른 과에서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쉽게 볼 수 있다.




내가 학교에서 살아남은 방법


처음 학교에 가서 3학년 학생들에게 인사를 했을 때 다들 놀란 듯했다. 편입생은 나밖에 없었고, 심지어 동양인이 3학년 졸업반으로 들어왔으니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을 듯싶다. 수업을 들을 때면 뒤통수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으며, 내 이름이 들어가며 수근 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같은 학년에 한국인이 두 명, 한국계 일본인이 한 명 있었음에도 적응 하기는 쉽지 않았다. 다만, 교수님이 내주는 과제를 준비해 가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어 텃세고 뭐고 신경 쓸 틈조차 없었다.


난 매일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도서관에 있었다. 아침, 점심, 저녁을 전부 학교에서 해결했고, 허락만 된다면 학교에서 잠도 잘 수 있을 정도였다. 영어 표현이 서투르고, 잘 못 알아듣기도 했기에 내 결과물을 교수님께 설명하려면 남들보다 더 많 준비해야 했다. 이미지 작업물을 다양하게 만들고, 질문을 미리 대비해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부분도 추가로 준비해 갔었다. 작업이 끝나면 그것들에 대한 설명을 종이에 일일이 써 뒀고, 잠시 쉴 때는 노트를 들고, 도서관을 빙빙 돌면서 수십 번을 읽었으며, 밖에 나가 소리 내어 읽어 보기도 했다. 교수님과 이야기할 때는 최대한 눈으로 읽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해야 했으므로, 입에 착 달라붙는 쉬운 영어의 조합으로 문장을 꾸려 나갔다.


하지만 교수님이랑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용이 뒤죽박죽 되기 일쑤였고, 미리 만들어 놓은 스크립들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노트에 내용을 쓰는 것 자체가 내 뇌의 자율 문장 구성 기능을 방해하고 있던 거였다. 나중에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중요 단어만 써놓고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문장을 만드는 법을 연습해 대학원쯤 가서야 조금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난 영어 공부를 시작하면서 한국 음악은 아예 듣지 않았다. 해외 빌보드 차트를 매달 다운로드하여 팝송만 들었고, 그렇게 좋아하던 한국 드라마를 끊고, 미드와 영드를 봤으며, 한국 영화도 되도록 안 보고 외국 영화 위주로 봤었다.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무작 정 틀어 두었으며, 인터넷에 떠도는 해외 뉴스 및 토픽들을 다운로드하여 들으며 잠들기도 했다.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도서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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