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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림 Aug 18. 2020

유학 한번 가기가 뭐 이리 힘드니

영국은 멀긴 멀다

교수님께서 유학을 추천하시고, 바로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다. 그전에 인터넷으로 등록금 및 생활비에 대해 알아보고, 영국으로 유학을 갈 경우, 미국보다는 이런 점이 좋다 라고 강조하며, 유학을 다녀오기만 하면 밝은 미래가 바로 내 앞에 펼쳐질 것 마냥 부모님을 설득했다. 부모님께서는 오랜 고민 끝에 유학 비용을 지원해 주시기로 결정하셨다. 우리 집이 잘 사는 편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날 때쯤 사우디로 파견을 다녀오셨었고, 한국으로 돌아오신 후 서울에 작은 자동차 공업사를 차리셨다. 어머니도 같이 아버지를 도와 지금까지 두 분이 함께 그 일을 하고 계신다.


영국 대학 편입과 무사히 졸업만 하면 대학원도 갈 수 있었다. 영국은 학사가 3년제였고, 나도 한국에선 3학년까지 학업을 마치고 졸업했으니 영국 학교에 마지막 학년으로 편입하면 정식 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다만, 영어가 문제다. 고등학교 때 수능 공부를 하고, 대학 때 잠깐 교양 과목으로 영어 수업을 들은 것 이외에 난 영어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다. 일상생활에서 영어가 필요하지 않았고, 유학 갈 생각은 꿈에도 없었으니, 영어로 말하거나, 듣거나, 읽거나, 쓸 일이 없었던 것이다.




영어, 그 힘든 여정의 시작


대학 졸업 쯔음, 강남역에 위치한 영어 학원을 다녔지만, 기초가 부족한 터라, 수업을 따라가기 조차 힘들었다. 내가 알고 있던 단어들의 의미는 이미 다 뒤죽박죽이었고, 문법 체계도 엉망이었다. 기초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고, 부모님의 지원 사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영국을 못 가게 된 것이다!! 결국, 난 대학 조교를 하기로 했다. 당시 실습 조교님께서 그만 두려 고민하시던 찰나, 내가 지원을 하고 후보자가 되었다. 학교에서 일을 배우며, 시간 날 때 영어 공부를 하면 되겠다 싶어 나 자신이 만들어 낸 유혹의 손길을 너무 쉽게 잡았고, 내 유학 생활은 이렇게 일 년이 연기되었다.


조교 업무를 마치고 다니던 학원은 너무 멀었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지하철을 타고 수업을 듣고, 다시 집에 오는 일정이 너무 힘들어, 집에 오면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그게 다 핑계야’라고 지금은 말할 수도 있지만, 조교를 하면서는 유학 준비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학원만 다니기에는 금전적으로 부담이었고, 이렇게 마냥 유학 준비 만을 할 수 없어 두 번째 자의적 유혹인 학원에서 가까운 교수님 스튜디오에 취직을 한다.




내 생의 첫 번째 직장 생활


내 생의 첫 번째 직장 생활은 에나 디자인이라는 교수님 스튜디오였다. 교수님께서는 진주 출신 이셨고, 에나는 서부경남 방언으로 진짜? 진짜? (진짜. 참.)이라는 뜻이다. 직원은 교수님과 나 그리고 후배 두 명을 포함해 총 네 명이었고, 교수님께서 디자인을 하시면 우리가 기획 도면을 치고, 프레젠테이션 보드를 만들었고, 세부 도면과 시공은 다른 업체에 외주를 줬었다. 우리 회사는 머핀 및 피자 전문점, 패밀리 레스토랑과 같은 F&B 분야를 맡았었다. 교수님의 디자인에 대한 철학들 앞으로의 이야기에서 또 등장한다.


그래서 유학은 가긴 가는 거냐고? 아직. 한 단계가 더 남았다.


유학을 가기 위해선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점수가 동일하게 일정 점수를 유지해야 했다. 세 과목은 어떻게 따라잡았는데, 죽어라 공부해도 스피킹 점수가 안 나왔고, 학원에서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이랑 연습도 많이 하고, 예시 문장들을 외우고, 반복도 많이 했지만, 실기시험 장에서는 머리가 하얗게 된 채 도저히 입이 열리지 않았다. 마지막 결정을 해야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마지막으로 스피킹에 몰두하느냐. 유학을 포기하고 지금 다니는 회사를 꾸준히 다니느냐. 이제 돈도 조금 모아 놨고, 수개월은 이 돈으로 버틸 수 있었다. 학원 선생님과 해외 어학원에 대해 상담하니 영국이고, 호주고, 필리핀이고, 우선 영어로 말을 트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다. 지금 가지고 있는 버짓으로 영국 및 호주는 무리였고, 별다른 준비도 없이 며칠 만에 필리핀으로 4개월간 어학연수를 떠났다.




4개월간의 필리핀 어학연수


필리핀에는 어학연수 학원이 각 지역 별로 참 많았다. 학원 별로 몇 가지 수업 코스가 있었고, 당시 스파르타 코스는 주말에도 밖을 나가지 못하고, 일주일 내내 어학원 기숙사에서 머문 채 100% 공부에만 몰두해야 했었고, 세미 스파르타 코스는 주말에는 밖에 나가 쇼핑 및 문화체험을 할 수 있었고, 일반 코스는 평일에도 수업이 끝나면 밖에 나가 자유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스파르타는 너무 답답하고, 일반 코스는 너무 자유롭다 생각해 세미 스파르타로 결정했다.


다른 지역보다 물가 및 학원비가 싸다는 것이 필리핀 어학연수에 가장 큰 장점이었다. 게다가 걱정과는 다르게 발음이 좋은 선생님들도 상당히 많았다. 영어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풀고주말에 백사장에 누워 맑은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그동안의 근심 걱정이 모두 날아가는 기분이었고, 그야 말고 가성비 최의 어학코스였다. 다만, 스스로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했다. 카지노에 가도 뭐라 할 사람이 없고, 밤새도록 술을 마셔도 잔소리할 사람은 없다. 주변에 카지노에 빠져 어학 생활 동안 빚쟁이가 되거나, 고등학생이 방학 때 영어 공부를 하러 와 술을 마시러 다니는 일도 허다했다.


처음 난 비용을 절약하고자 다인실 방에 들어갔다. 남자와 여자 기숙사는 따로 건물이 분리되어 있었고, 다인 실은 8명에서 10명이 함께 생활하는 방이 었으나, 군생활 이후 한 번도 남들과 섞여 생활하지 않아, 너무 불편했었다. 게다가 수업을 듣고, 개인 적인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다. 떠들, 노래 듣고, 티브이 보고, 시험을 준비하러 온 사람들보다는 어학연수 자체를 즐기기 위해 온 사람들이 많았다. 가격은 두배 정도 비 샀지만, 결국 1인 실로 방을 옮기고, 혼자 집중하며 공부를 했다. 방은 1.5평 정도로 침대와 책상, 옷장과 에어컨이 있었고, 에어컨에는 전기 사용량 측정기가 따로 달려 있어 내가 쓰는 만큼 비용을 내면 됐다.


아침 8시부터 수업은 시작되었고, 오전에 주로 진행되는 읽기, 듣기 수업은 여러 명이서 같이 참여했으며, 쓰기 수업은 두 명, 스피킹은 일대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읽기와 듣기는 되도록 내가 준비하는 시험에 고득점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위한 팁 위주로 수업이 진행되었고, 쓰기 수업은 매일 250 자씩 두 개의 다른 주제로 써야 했다. 한 가지 주제는 수업 전에 준비하여 내가 다른 주제를 쓰는 동안 선생님께서 문법 및 표현에 대한 체크를 해 주셨고, 말하기 수업은 시험에서 출제될 주제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다만, 말하기 점수가 너무 낮았기에 정규 수업 이후에 따로 추가 수업 비용을 내 선생님을 바꿔가며 말하기 연습을 했다.


이때 익힌 거울 보며 3분 말하기 연습은 큰 도움이 되었다. 말하기 시험은 시험 감독과 일대일로 진행된다. 즉 누군가를 보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아이컨택도 중요했고, 상황에 맞게 다양한 얼굴 표정을 구사하는 것도 중요했다. 너무 긴장하거나, 무표정으로 상대를 한다면, 질문은 짧아지고, 그만큼 내 점수도 낮아진다. 최대한 시험 감독과 즐겁게 수다를 떨고 기분 좋게 악수하고 웃으면서 나와야 높은 점수가 나올 수 있었다. 필리핀에서 선생님들과 수업을 하고, 방과 후 수업에는 자율 토론 수업을 하면서, 영어로 말하는 게 점점 편해지기 시작했다. 영어 질문만 받으면 하얗게 바뀌던 내 좌뇌 전두엽도 이제 적응을 해가며, 자기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고, 영국으로 갈 길은 점점 가까워졌다.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난 영어 점수를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물론, 직장 생활을 하며 경력을 쌓고, 많은 경험을 하며 노하우들도 쌓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중간에 포기할 수도 있었고, 너무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지금은 유학을 준비하는 동생들에게 단 기간에 집중하고 빠른 준비를 하라고 이야기한다. 주변에 유학을 준비하다가 포기하는 친구들도 너무 많았다. 점수가 안 나와 지치거나, 회사를 다니며 맛본 돈 맛에 헤어 나오지 못하거나, 카드값을 갚으면서 월급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버티며 유학을 포기한 동생들도 많았다. 난 4년이라는 길고 긴 준비 끝에 유학 갈 수 있는 점수를 준비했다.


이제 드디어 영국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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