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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림 Aug 16. 2020

내 삶을 통째로 바꾼 은인들

안산에 자리 잡은 서울예대는

학장이 대빵이라 교수도 대빵

교수가 대빵이라 학생도 대빵

모두가 대빵이다

영광 영광 서울예대

영광 영광 서울예대

영광 영광 서울예대

실디과 만만세


대학 입학식 전 어느 술집에서 예비 선배님들과 어깨를 마주하며 부르던 저 노래 말을 시작으로 나와 디자인 과의 기나긴 인연은 시작되었다. 미술을 처음 시작하기 위해 내겐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마침 나의 사춘기의 절정인 시기와 마주했다. 중학생 때 미술 선생님이 미술반에 들어오라고 권유하셨으나, 백과사전을 보고 예술 작품을 따라 만드는 정도였고, 당시엔 어딘가에 소속되어 무언가를 하기는 싫었다.


고등학교도 인문계로 이과를 다녔고, 어려서 부터 수학을 너무 좋아했으나, 1학년 때부터 담임 선생님께 찍히는 바람에 수학선생님 이셨던 그분은 항상 어려운 문제를 앞에 나와 풀어보라 권하셨고, 풀지 못하면 호되게 혼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른 공경에 대한 그 선생님의 호 된 가르침이 추후 선배님들과 교수님들, 나보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께 예의라는 것을 지키게 만든 시발점이라 생각한다. 다만, 그때부터 수학과는 담을 쌓았고, 2학년 때 이과로 반이 편성되면서부터 난 학교와 학원에서 되풀이되는 반복 학습이 너무 싫었다.




날 예술의 길로 인도하시니


공부와는 점점 멀어지고, 교내 방송반에 내 모든 정열을 쏟았으며, 내 미래를 위해 뭔가 다른 전환 점이 필요했다. 부모님께서도 방황하는 아들을 인지 하시고는, 주변 아주머니 들과 친구 어머니들, 선생님과 면담도 하시다가 결국 친구 어머니 조언으로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 선생님은 도덕을 가르치고 계셨고, 어렴풋이 기억하기로는 철학을 전공, 박사 과정을 준비하고 계셨으며, 매우 총명하신 분이셨다. 선생님과 면담이 시작되었고, 답은 의외로 간단히 풀렸다.


“아드님이 하고 싶은 미술을 지금부터 가르치시고, 예체능 반으로 전환하여, 미술 관련 전공으로 대학에 들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정답이었다. 정확히 문제 파악하시고, 내가 뭘 잘하는지 알고 계셨고,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도 알고 계셨다. 수개월 동안 풀리지 않던 답답함이 단 몇 분만에 풀려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내겐 너무 나도 큰 은인이셨다. 다만, 아버지가 반대하셨기 때문에 미술을 바로 시작하진 않았다. 아버지 친구분은 유명 대학의 서양학과를 나오셨고, 그 당시 별다른 직업이 없으셨다. 아버지는 그게 싫으셨던 거다. 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돈을 벌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미 답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늘어지는 듯한 나의 미래가 너무 걱정되었고, 또다시 방황은 시작되었다. 집에서는 항상 신경질적이었고, 부모님께 가슴 마음 아픈 말도 많이 했다. 결국, 2학년 중반 미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난다 긴다 하는 학생들이 다니는 홍대 미술 학원가에 가장 유명하다는 학원에 등록하고, 담임선생님께 상의드린 후 야간 자율 학습에 빠지고 매일 미술 학원을 다녔다. 당시 학원에 다니던 학생들에 비하면 난 너무 늦게 시작한 케이스였다.


마침 같은 꿈을 가지던 중학교 동창과 같이 학원을 다녔고, 방학 때면 고시원에 머물며 하루 종일 미술 실기 시험 준비에만 전념했다. 내 친구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100% 학원에만 몰두했으나, 내 계획과는 달라 따르지는 않았다. 수능시험 이후 기나 긴 실기 시험을 거친 후, 그 친구는 어느 4년제 대학 시각디자인과에 들어갔고, 난 서울 예대 실내 디자인과에 들어갔다.




잊지 못할 대학 생활


서울예대는 입학식부터 화려 했다. 각과의 입학생들이 무리 지어 학교 입구부터 입학식 행사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주변에서 각과 선배들의 박수갈채가 이어졌으며, 입학생들은 각자의 과에 걸맞은 예장가를 목이 터져라 부르며 행진을 하고 있었다. 바닥에는 빨 레드 카펫이 깔려 있었고, 다양한 동아리에서 밴드 공연 및 퍼포먼스가 이어졌으며, 예대 출신 유명 연예인들도 입학을 축하해 주기 위해 자리를 빛내고 있었다. 아 이런 곳을 내가 다니게 되다니, 꿈에 그리던 그런 곳이었다.


대학 생활 역시 너무 환상적이었다. 방송연예, 연극, 영화, 무용, 문학, 광고 창작 전공자들과 같은 교양 수업을 들었고,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오를 때면 높은 건물 위에 혼자 올라 발성 연습을 하는 연극과 학생, 가로수 등을 붙잡고 스트레칭을 하는 무용과 학생, 학교 계단과 도서관에서 영화 촬영을 하는 영화과 학생들. 그야말로 예술의 천국이었다. 학교 근처 술집에서는 어느 과가 더 크게 노래를 부르는지 목에 핏줄을 드러내며 노래를 불렀고, 축제나 체육대회에는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서울예대에서의 삶은 너무 행복했다. 군대에서 학교 동기들에게 매일 편지를 쓰며 우리가 함께 했던 기억들을 매일 곱씹으며 추억에 젖어 있기도 했다.


대부분의 동기 들처럼 1학년을 마치고 바로 군대에 갔으며, 2년 1개월의 복무기간을 마치고, 2학년 복학할 때쯤 학교가 3년제로 바뀌었다. 2학년 복학 후, 3학년 2학기까지 만점이 아니면 수석을 하지 못할 정도로 장학금 경쟁이 치열했다. 나는 동기 및 후배들과 대부분 학교에서 과제를 했고, 술을 신나게 먹고도 다시 학교에 올라가 야작을 했었다. 우린 같은 강의 실에서 함께 작업을 했었고, 어떤 아이디어가 있는지 공유하며 같이 밤을 세기도 했으며, 새벽에 학교를 내려오며 맡은 그 찬 공기가 가끔 생각이 난다.


건축, 가구, 공간 디자인, 프레젠테이션, 예술문학, 예술교육 등등. 실내디자인이라는 전공 교과목 이외에 교양으로도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다. 신입생부터 건축 사랑이라는 동아리에 가입해 건축을 공부하고, 직접 작은 모델로 만들어 보기도 하고, 유명 건축가들의 작품을 분석한 것이 나중에 내가 건축 회사를 다니고, 유명 호텔 디자인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호텔 디자인에 관한 글을 쓸 때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다.


학교에 다니며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다. 선배님들이 이미 인테리어 회사에 다니고 계셨고, 인력이 부족할 때면 경력을 쌓아 보라며 종종 일을 부탁하셨다. 보통 청소나 기자재 운반 정도의 가벼운 일이었으며, 동기와 둘이 화장실 한 개의 타일을 기계로 걷어 내 본 적도 있다. 다른 곳에서 일하는 것보다 시급이 많이 높았으며, 밤새거나 주말에 일을 하면 가격은 거의 두배로 뛰었다. 목공 반장님 옆에서 나무를 잡아 드리거나, 타일 반장님을 도와 시멘트와 모레를 같이 섞거나, 준공 청소 반장 아주머니와 창틀을 닦고 가구에 광을 내는 등등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한 것 같다.




날 유학의 길로 인도하시니


3학년 2학기쯤, 담당 교수님께서 면담을 요청하셨다. 졸업반이니 학생 한 명 한 명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의논을 하시기 위함이겠다 싶었으나, 교수님께서 유학을 추천하셨다. 졸업 후 바로 영국으로 유학을 가는 게 어떠냐고 하셨다. 당시 담당 교수님은 같은 과 대 선배님이시다. 우리 학교를 졸업하시고, 회사를 다니시다가 영국으로 유학을 가셨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바로 사회생활을 했을 때의 어려움과 서러움을 몸소 경험하셨고, 제자이자 후배가 되도록이면 안정적인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조언해 주셨다. 아, 갑자기 영국 유학이라니.


나 유학 갈 수 있을까?


+

현재 학생이라면 학점 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나도 1학년 때 학점은 2점대였다. 1학년 2학기 과대표였는데도 불구하고 교수님께서 "자네는 복학생인가?" 할 정도로 출석률도 엉망이었다. 다만 졸업할 때까지 점수를 메꿔 나중에 유학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너무 높을 필요도 없다. 기업에서 원하는 수준, 유학을 갈 수 있는 점수를 인터넷에 찾아보고 한 학기 한 학기 내 학점의 평균을 신경 써야 한다.


내가 미술을 어렵게 시작한 것처럼 자신의 원하는 바를 주위에게 알리고, 조언을 얻자. 내가 만약 부모님이 시키는 공부만 하고, 내 적성에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는 과를 선택하여, 졸업 후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면.. 난 이만큼 행복하지 않았을 것 같다. 최소한 자신의 미래에 목소리를 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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