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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수 Aug 11. 2016

그림 같은 추억을 짓다(하)

# 첫 번째 공간, 서울특별시 마포구 연남동 경의선 숲길

<그림 같은 추억을 짓다(상)>과 이어집니다.


저녁 8시 즈음


어느새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후와 저녁의 색이 오묘하게 겹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 여름밤의 더위는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풀밭에는 발 디딜 공간조차 부족할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공원다운 모습으로 변해갔다. 공원은 시끌벅적했다.



최성우 씨가 프로젝트 중간쯤에 합류했다. 성우 씨는 지난번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만큼, 나와는 안면이 있었다. 소셜벤처 투자업체에서 커뮤니티 매니저로 일한다고 했다. 종원이와는 이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성우 씨도 함께 ‘옐로플래그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제 프로젝트를 하는 인원은 넷으로 불어났다.


비둘기들이 숲길 주위를 어슬렁어슬렁한다. 비둘기 떼는 나는 걸 포기했다. 차가 와도 짧은 다리로 엉거주춤 달리고 있었다. 그동안 도시에서 달리기 실력을 연마한 것 같았다. 재빨랐다. 정말 급박할 때에만 날갯짓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의 공원에 남은 음식 부스러기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늘을 거리낌 없이 날아다니면, 거리의 음식을 먹는 축복 따위는 누리기 어려울 것이다.


비둘기 떼 주변에 할머니와 세 명의 장난스러운 꼬마들이 있었다. 킥보드를 타는 꼬마들은 골목을 왔다 갔다 했다. 밖에서 얼마나 놀았는지 얼굴이 검게 그을렸다. 티 없이 해맑은 표정이었다.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가 귀엽기 그지없었다.


아이들은 어느새 할머니에게 다가가 놀아달라고 보챈다. 할머니는 아이 셋을 데리고 노는 게 힘들어 보였다. 손주들이 할머니에게 소리친다.


"할머니! 나 봐봐. 잘 타지?"

"어디 보자. 그래, 우리 새끼들 잘 타네."


아이들은 킥보드를 타고, 쌩쌩 소리를 내면서 숲길 사이 골목길을 요리조리 달려간다. 할머니는 아이들을 따라다니기 바빴다. 아이들이 골목으로 다시 사라질 때쯤, 손깍지를 하고 숲길을 거니는 연인이 보였다.



그렇다. 숲길은 데이트하기에 최적의 공간이었다. 숲길 중간쯤에도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는 한 쌍의 연인이 있었다. 앳돼 보이는 남자친구는 스포츠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여자친구가 남자친구에게 말을 꺼내고 있었다.


"오빠, 내일 영화 보자."

"영화? 요즘에 영화 뭐 개봉했는데? 보고 싶은 영화 있어?"

"음…. 나는 <덕혜옹주> 보고 싶어."

"손예진 나오는 거? 그래. 그럼, 그거 보자."

"알겠어, 오빠. 내가 <덕혜옹주> 지금 예매할게. 잠깐 기다려봐."


여자친구는 스마트폰으로 영화 예매를 시작했다. 여자친구가 예매를 끝내고 남자친구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깨가 쏟아졌다. 남자친구의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때마침 지카바이러스 탓에 모기에 물리지 않으려고 뿌린 화학약품 냄새가 난다. 이 알싸한 냄새는 바로 모기퇴치제 특유의 향이었다. 그사이 모기가 나의 살결에 살포시 앉기 시작한다. 무더위에 모기가 별로 없다고 하는데, 어느새 내게 나타났다. 피를 수혈한다. 이미 눈치챘을 때는 모기의 수혈이 모두 끝마쳐진 상태였다. 모기의 게릴라성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유유히 다른 채혈 장소로 날아간다. 모기한테 채혈한 곳의 살갗이 빨갛게 부어오른다. 그리고 가려웠다.


모기가 내 피를 빨고 있을 때쯤이었다. 한껏 차려입은 청년들이 종원이가 꽂은 깃발 주변에 돗자리를 깔고 있었다. 깃발이 마치 시민들의 자리 배치를 도와주는 것 같았다. 신문지 위에 걸터앉은 두 젊은 여성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거 뭐지, 신기한데? 뭐라고 쓰여 있어?"


노란 깃발을 한 번 뽑더니, 깃발의 문구를 큰소리로 읽었다.


"'이 공원은 맥주병을 버릴 쓰레기통이 없어요. 이렇게 어때요'라고 쓰여 있어."


그리고 다시 제자리에 꽂아 놓는다. 그사이 노란 플라스틱통에 맥주병을 버리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다. 자신이 맥주를 샀던 곳에 버리라는 '옐로플래그 프로젝트' 때문일까. 자신의 가게에 노란 플라스틱통을 배치한 맥줏집 남 사장님의 아까 전 말이 떠오른다.


"맥주병을 따로 버리는 통을 설치해도, 일반쓰레기를 아무렇지 않게 버리기 일쑤예요. 맥주가 남은 병을 그냥 버리는 사람도 있고요. 옛날부터 고민을 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 것 같아요."


한 여름밤의 숲길



흰 모자를 쓴 아재가 막걸리를 더미로 쌓은 리어카를 끌고 간다. 굉장히 무거운지 리어카의 움직임이 둔탁하다. '흰 모자 아재'는 힘들었는지 잠깐 땀을 닦고 쉬다, 다시 리어카를 몰았다. 술 팔기에 적절한 시간대였다. 아까 전 남 사장님이 오늘은 너무 더워서 밤 9시는 넘어야 맥주를 마시러 사람들이 찾아올 거라고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밤 9시가 넘어가자, 숲길은 그야말로 불야성이었다. 가로등에 주변 상점의 불빛이 한데 섞인 채 숲길을 수놓고 있었다.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누군가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켠 후에 내는 "캬아" 소리에 짜릿한 기분이었다. 순간 더위가 사라지는 마법이 이뤄진 것 같았다. 하지만 숲길 아무 데나 무단으로 버린 맥주병도 덩달아 늘어갔다. 아까 전, 술 판매처에 설치한 노란 플라스틱 통에는 맥주병이 얼마나 들어차 있을까.


돗자리를 깔지 않고 풀밭에 그냥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니, 옛 군대 시절 대대장이 생각났다. 대대장은 매번 풀밭에 들어갈 때 쯔쯔가무시병을 조심하라고 했다. 그때는 설마 나도 걸릴까, 란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행동했다. 그러나 나이가 점점 들고부터는 잔디밭에 가면 항상 쯔쯔가무실병이 기억난다. 그 시절, 대대장이 신신당부했기 때문일까. 지금도 마찬가지다. 풀밭에 돗자리 없이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면 쯔쯔가무시병 조심하세요, 라고 말하고 싶다. '쯔쯔가무시병 예방 품목, 돗자리 팔아요.'하면서 돗자리 장사를 시작할까, 라는 물음이 시도 때도 없이 내 머릿속을 지배한다.



무한히 열기를 뿜어내던 해는 어느새 흐릿한 빛을 쏘는 초승달로 대체된 지 오래였다. 우리가 모내기하듯 꽂아놓은 노란 깃발을 이제는 수거해야 한다. 그런데 어둠에서 노란 깃발이 잘 보이지 않았다. 초록 풀밭에 노란 깃발은 자연스레 은폐·엄폐 중이었다. 그런데 예운 씨는 풀밭에 숨은 깃발을 기가 막히게 잘 찾았다.


한 여름밤의 숲길을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지난 철마의 역사를 보듬는 듯했다. 예전부터 철마는 달리고 싶었지만, 원래 종착까지 가지 못한 채 문산역에서 멈춰야 하는, 아픈 역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 중간에 위치한 숲길에는 예전의 기찻길은 사라지고 없다. 그렇지만 예전부터 쉴 새 없이 달리던 경의선의 숨결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다. 그게 순간순간마다 느껴졌다.



뿔테 안경을 쓴 여성이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한다. 개도 더운가 보다. 혀를 쭉 내밀고 헐떡인다. 그 맞은편의 기다란 벤치에 아주머니들이 앉아서 부채를 연신 흔들고 있었다. 그런데 나란히 앉아 있는 아주머니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머리 모양새가 비슷비슷했다. 먼발치에서 슬리퍼를 신고 오던 아주머니가 벤치에 털썩 앉으면서 말문을 연다.


"요즘은 에어컨이 있어도 못 틀어. 아무리 틀고 싶어도 참아야 해. 전기세 엄청 나오잖아. 그래서 밖으로 나오는 거야. 여기 의자에 앉아서 부채 흔들고 있으면 그래도 참을 만해. 사람 구경도 하고, 좋잖아. 집에만 있으면 어차피 테레비나 볼 텐데, 뭐. 자네도 그렇지?"


바로 옆에서 머리띠를 매만지던 아주머니가 맞장구친다.


"요새 아주 에어컨이 애물단지예요. 사놓고 쓰지를 못하니. 그냥 팔아버릴 수도 없고. 여름에는 전기세 좀 낮춰줘도 좋을 텐데…."


오랜 시간 무더위에 지친 아주머니들의 이야기 주제는 에어컨이었다. 나도 아주머니들의 대화에 공감이 갔다. 너무 더운데, 그놈의 누진세 때문에 사놓은 에어컨조차 틀지 못하는 현실이 많이 구슬펐다.


종원이가 어둠이 깔린 초록 풀밭에 숨어 있는 노란 깃발을 하나하나 뽑을 때마다 주변의 사람들은 아까 전만큼의 관심은 보이지 않았다. 일부 깃발은 훼손된 채 버려져 있었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옐로플래그 프로젝트'의 결과를 알아봐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노란 플라스틱통에 얼마나 맥주병이 모였는지 확인해야 한다. 종원이가 플라스틱통 안에 있는 맥주병을 꺼내서 비닐봉지에 담기 시작했다. 성우 씨가 이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예운 씨는 종원이가 술병을 꺼낼 때마다 개수를 셌다. 하나, 둘, 셋…. 예운 씨의 목소리가 들릴 줄 알았는데,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었다. 종원이는 꽤나 유려한 말솜씨로 개인 방송을 이어갔다. 방송이나 강연을 해도 잘할 것 같다.



남 사장님 가게에서도 노란 플라스틱통 안의 맥주병을 수거했다. 맥주병을 꺼낼 때 가끔 술이 남아 있는 맥주병도 나왔다. 그걸 종원이는 혼자 다 처리했다. 키가 180㎝쯤 되는 외국인이 종원이의 모습을 보고 여자친구에게 이야기를 한다. 나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영어 말하기와 듣기 모두 안 되기 때문에 외국인과 대화하는 걸 포기해야 했다. 진짜로 영어를 좀 배워야겠다.


얼마 후, 종원이는 쓰레기통 안에 있는 맥주병 수거를 모두 끝마쳤다. 오늘 노란 플라스틱통에는 꽤나 많은 맥주병이 모아졌다. 종원이가 고생한 결과가 뚜렷하게 드러난 것 같다. 종원이가 맥주병 수거를 완료하자 가게에서 남 사장님이 나왔다. 종원이가 남 사장님에게 이야기한다.


"오늘은 플라스틱통 안에 일반쓰레기가 많이 적었어요."

"네, 오늘은 일반쓰레기가 적네요. 그게 요즘에는 숲길에 쓰레기통이 새로 생겨서 그쪽으로 일반쓰레기들이 많이 들어간 것 같아요."



드디어 오늘의 프로젝트가 끝났다. 종원이의 '옐로플래그 프로젝트'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공공소통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현장 일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종원이가 숲길에 쏘아 올린 작은 공은 희미하지만 아주 미세한 변화의 날갯짓을 일으킬 것이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오늘 하루가 떠올랐다. 오늘 우리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연남동 경의선 숲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는 자신의 단짝에게 사랑을 속삭이면서 달콤한 미래를 상상했다. 또 누군가는 가족들과 둘러앉아 주말의 여유를 만끽했다. 또 누군가는 이웃과 우연히 만나서 서로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또 누군가는 자신의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했다. 또 누군가는 집에 가는 길에 우연히 숲길과 마주했다. 또 누군가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카페에서 손님들에게 음료를 제공했다.


그렇다. 8월의 토요일, 수많은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저 푸른 숲길 위에 그림 같은 추억을 짓고 있었다. 물론 또 다른 누군가는 숲길이 악몽 같은 하루의 진원지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남동 경의선 숲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추억 하나쯤 남기려고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오늘처럼 내일도 녹음이 우거진 숲 속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는 만들어질 것이다. 지하철 창문으로 어둠이 짙게 깔린 밖을 바라보는 찰나에, 비 오듯 땀 흘리던 한 여름의 경의선 숲길이 갑작스레 그리워진다.




1. 설명

 <그림 같은 추억을 짓다>는 2016년 8월 6일의 일을 담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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