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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수 Aug 10. 2016

그림 같은 추억을 짓다(상)

# 첫 번째 공간, 서울특별시 마포구 연남동 경의선 숲길

우리는 710번 버스를 타고 잠원동으로 갔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한강시민공원 잠원지구였다. 이유? 그런 건 없었다. 셋 중에 하나라도 '거긴 싫어'라고 말하지 않는 유일한 장소라고 할까. 굴다리 앞 구멍가게에서 캔디바 세 개를 샀다. 우리는 하드 하나씩을 입에 물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서 굴다리 밑을 통과했다. 시민공원도 부글거리는 태양 아래 있긴 마찬가지였다. 벌겋게 익은 얼굴로 연방 목의 땀을 닦아내는 준모를 쓱 쳐다보다 지혜가 중얼거렸다.

"준모야, 긴 바지 진짜 덥지? 내가 남는 교복 치마 한 벌 가져다줄까?"

우리는 함께 픽 웃었다. 자주 있는 순간은 아닌데, 내가 꽤 좋아하는 순간이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더라도 다 같이 엇비슷한 어떤 느낌에 도달한 것 같은 착각 때문이다. 한강 역시 펄펄 끓고 있었다. 이열치열이라는 한자성어를 실천할 의도는 없었지만 마땅히 배를 채울 만한 건 사발면뿐이었다. 매점 주인이 용기에 뜨거운 물을 부어 건네주었다.

"설마 강물을 퍼다 끓인 건 아니겠지?"
"끓이면, 킁, 킁, 살균돼서 괜찮아. 씨팔, 킁."

라면은 기막히게 맛이 없었다. 아무도 먼저 일어나자고 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일사병으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까지 제일 전망 좋은 곳에 앉아 강을 바라봤다. 정수리에 직사광선이 정통으로 내리꽂혔다. 어디선가 목청껏 매미가 울었다. 주차된 자동차 지붕이 지글지글 익어가는 냄새가 먼지에 뒤섞여 풍겨왔다. 강물은 눈부시게 반짝였다. 눈을 감고서 나는 여름을 콧속으로 흠뻑 들이켰다.*

- 소설 『안녕, 내 모든 것』 중 일부


8월의 토요일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홍대입구역으로 갔다. 숨이 턱턱 막힌다. 경의선 숲길에 다다르니, 실감 난다. 이미 지하철에서 내렸을 때부터 예감한 일이었다. 꿈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구름 한 점 없을 정도로 하늘은 푸르렀다. 우와, 오늘은 진짜 별로 걷지 않았는데도 땀이 쏟아진다. 등줄기는 벌써 땀으로 젖은 지 오래다. 이마와 인중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재빠르게 손부채질을 해도 소용없다. 흔들어대는 팔만 아파온다. 몸을 움직여서 더 더워졌다. 괜한 헛수고였다. 땀은 마르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


살갗은 햇살이 닿는 모든 부분이 따가웠다. 머리카락은 불에 타는 듯한 느낌이었다. 정말로 타는 걸까.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계속 내 코를 스쳐간다. 잠깐의 소나기라도 맛보고 싶다. 시원한 소나기조차 내리지 않는 지금은 상당히 짜증 나는 토요일 오후다.



올해는 1994년만큼이나 덥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때가 기억나지 않는다. 어렸기 때문일까. 어쨌든 나는 올해가 내 인생에서 가장 더운 것 같다.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는 폭염과 열대야의 습격이 올해는 유난히 심하게 느껴진다. 터널 안의 어둠을 뚫고, 덜컹덜컹 달려가는 지하철의 에어컨 바람이 정말 절실하게 그리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무더위에 숲길까지 찾아간 이유? 있다. 종원이의 프로젝트 때문이다. 종원이가 며칠 전부터 재밌는 프로젝트 하나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궁금해서 따라왔다. 여태까지 종원이가 몇 번의 프로젝트를 했는데, 가까이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아, 종원이는 내 대학 후배다. "공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소통도구를 만드는", 내가 '유일하게' 아는 예술가다. 예술가 일을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다. 6개월 정도 됐나? 벌겋게 익은 얼굴의 종원이를 보고 나는 중얼거렸다.***


"종원아, 이 날씨에 프로젝트 진짜 하는 거야? 너무 더운데? 이러다 진짜 쓰러질 것 같아. 다음에 하는 게 어떨까?"


종원이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한 번 훔치고, 이야기한다.


"형, 그래도 오늘은 꼭 해야 해. 며칠 쉬었어."


숲길 주변의 아스팔트는 펄펄 끓고 있었다. 아지랑이가 부글부글 피어오를 정도였다. 직사광선이 정수리에 내리꽂는데도, 돗자리 위에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있는 젊은 여성들이 숨넘어가듯 웃고 있었다. 무언가 재미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숲길 양쪽 끝에 길게 늘어선 벤치에도 '올빽머리'의 젊은 남성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원하게 맥주 한 잔을 들이켜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사이로 우리는 걸어갔다. 종원이가 왼손에 들은 은빛 양동이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햇빛을 반사하는 양동이에 사람들의 눈빛까지 더해진 것이다. 공원에서 곧 공사를 하는 인부가 아닐까, 머릿속으로 한 번쯤 추측하는 듯한 얼굴들이었다. 맞다. 오늘 공원에서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공사를 하지 않는가.


홍대입구역 3번 출구 주변에 카페 하나가 보였다. 그곳에서 한 여성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얀 피부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 종원이는 잘 아는 분인지 반갑게 인사를 한다.


"형, 아까 말씀드렸던 분이요. 조예운 씨예요."


아까 지하철 안에서 종원이가 말한 게 생각났다. 한 분이 더 와서 자신의 프로젝트에 도움을 줄 거라고 했다. 그분이 바로, 방금 마주한 예운 씨 같다.


예운 씨는 갑작스레 종원이의 프로젝트에 동참했다고 한다. 종원이가 어제 프로젝트에 동참할 지인을 급하게 찾았는데, 마침 예운 씨가 참석하겠다고 연락한 것이다. 둘은 '디웰살롱'이란 커뮤니티 공간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 인연이 오늘의 프로젝트 참여로까지 이어졌다. 어쩌면 예운 씨는 예술가 종원이의 열렬한 팬이 아닐까. 나는 반쯤 고개를 숙이고, 예운 씨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김동수입니다."


그리고 다시 종원이는 예운 씨에게 나를 소개해줬다.


"예운 씨, 이분은 김동수 씨예요. 글을 쓰고 있는 작가고요."



나와 예운 씨는 서로 어색한 미소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대화를 나눌 틈도 없이 우리는 곧바로 종원이를 따라 햇빛이 쨍쨍한 숲길로 따라갔다. 이제부터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오후 6시 즈음 


매미가 목청껏 울어댔다. 아직까지 지글지글 타들어가는 태양 아래서 매미가 소란스럽다. '매앰매앰매앰매앰매앰'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누가 더 목청이 큰지 대결하는 것 같다. 더 힘껏 내질렀다. 매미들의 불협화음에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 숨어서 소리를 지르는 걸까. 너무 궁금하다. 어느 순간부터는 고막이 찢어질 듯 괴로워졌다.


우리가 걷고 있는 경의선 숲길은 길가 바로 옆에 있는 공원이다. 좁은 길가에는 자동차와 사람이 한데 뒤엉켜 있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차도를 자유롭게 움직였다. 차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다, 다시 쌩쌩 달렸다. 위험천만했다. 사고 위험이 많아 보였다. 공원과 길가의 흐릿한 경계 사이에서 분명히 여유로움과 위험함이 공존했다.


원래는 지금의 숲길 자리에 경의선 기차가 지나다녔다고 한다. 경의선의 폐선으로 지금의 숲길 부지로 선정된 것이었다. 작년 6월쯤에 경의선 기찻길이 숲길로 탈바꿈된 것이었다. 숲길 조성에 수많은 주민들의 땀이 깃들어진 듯싶었다. 이제는 경의선 숲길 바로 아래에 지하철이 지나간다고 한다. 경의선과 공항철도 기차가 바로 그것이다. 내가 방금 전에 타고 왔던 지하철이 숲길 아래를 달리는 것이다. 내 발 밑에 지하철이 왔다 갔다 하는 게 신기했다. 도심 속에서 자연의 향기를 콧속으로 무한히 들이켤 수 있는 이곳 주민들이 나는 부러웠다.


이제 정말로 프로젝트 준비를 했다. 종원이는 가방에서 프로젝트 준비물들을 하나하나 꺼냈다. 방금 전까지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던 양동이 안에는 노란 깃발들이 가득했다. 신기한 물건들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종원이의 양동이는 종원이의 프로젝트 도구들을 모두 쓸어 담는 마법의 도구였다.



종원이는 숲길 안에서 양동이에 가득 쌓인 노란 깃발을 꺼내서 모내기하듯 한 땀 한 땀 잔디밭에 꽂아놓기 시작했다. 깃발에는 '#어때요?'라는 문구가 있었다. "이 공원은 맥주병을 버릴 쓰레기통이 없어요. 이렇게 어때요?"라면서 '산다 → 즐긴다 → 샀던 곳에 버린다'는 간단한 이미지 설명이 뒷면에 덧붙여졌다. 이걸 종원이는 '옐로플래그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간간히 벤치 틈 사이에 기대어 놓기도 했다.



이렇게 종원이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옐로플래그 프로젝트'를 하는 건 숲길 주변에 무단으로 쓰레기가 버려지는 걸 막으려는 예술적 시도다. 특히나 이곳에는 사람들이 먹고 버린 맥주병들이 많이 굴러다닌다고 한다. 쓰레기통이 없는 탓이다. 그 때문에 굴러다니는 맥주병을 이곳 주민들이 치워야 한다. 외지인이 무분별하게 버리는 맥주병에 주민들은 그동안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그래서 종원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자기가 먹은 맥주병을 구매한 곳에 버리는 게 어떨까, 라고 친구에게 물어보듯 권유하는 게 종원이가 내세운 '옐로플래그 프로젝트'의 취지였다.


종원이가 무릎을 꿇고 깃발을 꽂을 때마다 예운 씨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프로젝트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기록해야 했기 때문이다. 종원이의 주위를 쫓아다니면서 다양한 각도로 촬영했다. 예운 씨의 표정은 상당히 진지했다. 예운 씨는 가끔 종원이를 대신해서 노란 깃발을 풀밭에 정성스레 꽂았다.



노란 깃발을 분주히 설치하다, 남녀 외국인이 앉아 있는 곳으로 종원이가 다가갔다. 두 젊은 외국인은 길거리를 보면서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익스큐즈 미(Excuse me)." 종원이는 두 외국인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돗자리 바로 옆에 노란 깃발을 꽂으려는 순간이었다. 모자를 돌려쓴 남성이 이야기한다.


"나…, 그거…, 알아요. 리멤버(remember). 기억해요."

"리얼리(Really)?"


종원이는 의외의 답변에 깜짝 놀란 듯싶었다. 그리고 얼른 "땡큐"를 연발했다. 기본적인 영어단어의 조합으로 외국인과 간신히 대화를 이어갔다. 두 외국인 친구는 자주 경의선 숲길에 놀러오는 것 같았다.



저편에서는 또 다른 외국인 가족이 돗자리를 깔고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숲길로 소풍을 찾아온 듯싶었다. 이 가족들도 종원이가 깃발을 꽂는 게 재밌는 듯 가까이 다가간다. 왜 깃발을 잔디밭에 꽂는지를 물어본다. 세 꼬마들도 노란 깃발에 흥미를 보였다. 세 개구쟁이들은 깃발 주변에서 맨발로 뛰놀았다.



정말로 프로젝트가 흥미로웠나 보다. 종원이가 깃발을 꽂을 때마다 호기심 가득한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손바닥 크기의 깃발이 신기한 듯싶었다. 이름 모를 여성 둘이 갑자기 종원이 곁에 다가왔다. 종원이가 들고 있는 노란 깃발에 관심을 가진 것이었다.


"이쁘다. 이거 뭐예요?"


종원이는 두 여성이 프로젝트에 관심 갖는 게 좋았는지 한껏 미소를 지으면서 설명을 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건 '어때요?' 프로젝트예요. 대부분은 '맥주병을 버리지 말라.'고 금지하는 표현을 쓰지만, 제가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자신이 샀던 곳에 버리는 게 어때요?'라는 제안으로 시작해요. 플래그 뒷면에 쓰여 있는 대로 자신이 산 맥주병을 다 마신 후에는 샀던 곳에 다시 버리자는 의미입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려요. 그리고 페이스북에 젤리 장(Jelly Jang)을 검색하시면 제가 하고 있는 활동을 보실 수 있어요."


종원이의 설명을 들은 한 여성은 노란 깃발이 예뻤는지, 하나 달라고 했다.


"이거 하나 주실 수 있나요?"


종원이는 자신의 보물이나 다름없는 양동이에서 노란 깃발 2개를 꺼냈다. 그리고 두 여성에게 선물 주듯 흔쾌히 노란 깃발을 건네줬다.


"네, 물론이죠. 선물입니다."



갑작스레 햇살의 열기를 담은 바람이 불어온다. 습식 사우나 같다. 나는 습식이든 건식이든 사우나에 들어간 적이 한 번도 없다. 사우나실 문을 열 때 목까지 턱 막히는 그 뜨거운 기운이 나는 싫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딱 습식 사우나 안이다. 그야말로 불판이다. 잠깐씩 미지근한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엄마를 따라온 아이들이 풀밭에서 신나게 뛰어다녔다. 아장아장 걸어가는 모습이 천진난만하다. 엄마는 돗자리에 앉아서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애틋하게 바라본다. 엄마의 시선을 느꼈는지 아이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림 같은 추억을 짓다(하)>로 이어집니다.




1. 이 글의 주

 * 정이현, 『안녕, 내 모든 것』, 창비, 2013, p19~20

 ** 『안녕, 내 모든 것』 19~20쪽에 있는 문단을 상황에 맞게 변형했다.

 *** 『안녕, 내 모든 것』 19~20쪽에 있는 문단을 상황에 맞게 변형했다.

 **** 『안녕, 내 모든 것』 19~20쪽에 있는 문단을 상황에 맞게 변형했다.


2. 설명

 <그림 같은 추억을 짓다>는 2016년 8월 6일의 일을 담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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