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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수 Aug 02. 2016

어느 도시의 시간

# 프롤로그

구호소리가 역전을 메아리쳤다. 광부들은 거대한 산을 등지고 선탄장 위에서 보다덩이를 움켜쥔 채 레일을 따라 횡으로 우뚝 서 있다. 해는 이미 서산 너머로 사라지고 하늘은 회색물감을 번져놓은 것 같이 뿌옇다. 뱀 떼같이 얽혀 있는 레일 따라 고압선이 어지럽게 걸려 있다. 전신주의 그림자는 늘어질 대로 길게 늘어져 그 형체를 잃어가고 있다. 역사에서 2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전신주의 그림자를 밟고 3백여 명이나 되는 또 다른 광부들이 철로를 점거하고 있다. 전투경찰들은 플랫폼을 중심으로 그들과 대치하고 있다.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돌멩이를 막기 위해 방패가 일렬로 벽을 형성하고 있다. 그 위로 총류탄 발사기가 플랫폼의 불빛을 받아 날카롭게 번쩍거리며 광부들을 향해 있다. 검은 침목과 레일 위에는 최루탄가스가 하얗게 곳곳에 있어 치열하게 싸운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 소설 『활화산(하)』 중 일부


11월의 감촉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잿빛 하늘에 뿌연 물방울 조각들이 부유했다. 차가운 바람 앞에 사람들이 뿜어내는 따뜻한 입김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것 같았다. 바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골목길에 피어오르는 안개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 혼자 그렇게 느낀 걸까. 안개가 나를 휘감은 채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 말 좀 들어줄래? 나 이야기할 게 많거든. 그런데 사람들이 잘 들어주지 않아. 제발, 잠시만 내 사정 좀 들어주라. 밖에 나와서 아무리 떠들어도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거든. 딱 한 번만이야. 내 이야기 좀 들어주면 더 이상 매달리지 않을 거야. 나 정말 절박해. 너만이라도. 제발….'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물방울들이 정말로 내 귓속에 속삭인 걸까. 멈춰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호소가 뒤섞여 들린 걸까. 나 스스로의 생각이 입버릇처럼 혼잣말로 흘러나온 걸까. 혹시나 피곤한 탓에 생긴 환청을 착각한 걸까. 현재 상태에서 쉽사리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 호소를 들은 이후부터 온 신경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가느다란 빗방울이 추적추적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듯 내려온다.

 

하얀 안개는 뭉게뭉게 흘러 다니면서 점점 더 뿌옇게 짙어져 갔다. 오늘따라 덕수궁 돌담길의 정취를 느끼려는 나들이객의 행렬은 보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파로 넘쳐났다. 깔깔대는 웃음소리보다 거친 쇳소리가 잔잔한 호수에 파동을 일으키듯 정동길 주변에 공명했다.

 

"비정규직 철폐하라!"


투쟁 구호의 울림 속 돌담길은 울긋불긋했다. 톡톡 떨어지는 부슬비의 재촉임에 못 이겨 나뭇잎이 하나둘 바닥으로 떨어진다. '낙엽 비'가 부슬비 사이로 드문드문 내려온다. 이미 빗물에 흠뻑 젖은 노란 은행잎 무리가 바닥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손을 맞잡은 엄마와 딸이 낙엽에 '보이지 않는 발자국'을 남긴 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다. 어린 딸이 많은 인파에 놀랐는지 엄마에게 이야기한다.

 

"엄마,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다 놀러온 사람들이야?"

"아니야. 다들 사정이 있어서 여기에 모인 거야. 저 아저씨들 보이지. 아까 무슨 말했는지 혹시 들었어? 비정규직 철폐, 뭐 이런 구호를 외쳤었지? 저 아저씨들은 잘못된 걸 바로잡으려고 밖으로 나온 거야. 아까 봤던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엄마와 딸은 남색 조끼를 입은 아재들로 가득한 정동길을 재빠르게 걸어간다. 피부가 검게 그을린 아재들이 이미 정동길을 점령한 상태였다. 구릿빛 피부에는 지난 노동의 흔적이 나이테처럼 남아 있었다. 그사이 앰프를 타고 민중가요가 흘러나온다.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듯 느껴졌다. 그야말로 전운이 감돌았다. 민중가요는 마치 영화 효과음 같은 느낌이었다.


"아이, 씨발. 이게 말이 되냐고. 경찰들 와서 벽 만들고 광장에 못 들어가게 하는 게 민주주의 사회냐? 표현의 자유가 있는 게 맞는 거야? 후유…."

"세상 참 잘 돌아가는 것 같아. 아주 우리 피 말려 죽이려고 환장했어."


이야기를 나누던 한 아재가 긴 한숨을 내쉰다. 그 아재는 '단결·투쟁' 단어가 적힌 빨간 끈을 머리에 묶고 있었다. 투쟁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빨간 끈 아재'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진 담배는 빨갛게 타들어갔다. 그렇게 피어오르는 담배연기가 뿌연 안개와 뒤섞였다. 안개 속에서 담배 타는 냄새가 난다.


'빨간 끈 아재' 주변에 있는 또 다른 아재들의 표정과 행동도 가지각색이었다. 대머리 아재는 짝발에 팔짱을 끼고 있었다. 상당히 태연한 모습이었다. 머리를 빡빡 깎은 아재는 집회에 처음 참석한 듯 겁먹은 눈빛이었다. 무척 두려워했다. 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아재는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전광판 화면을 보는 데에 오로지 집중했다. 다 피고 남은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리는 아재는 열이 받았는지 소리를 질렀다. 꽤나 분노한 상태였다. 그렇게 여러 감정이 뒤섞인 골목은 투쟁의 물결로 출렁였다. 투쟁 구호는 끊임없이 정동길을 뒤덮었다. 다른 때와는 많이 다른 상황이었다. 자연스레 정동길에 모이는 사람들의 투쟁 밀도는 점점 높아졌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겨울바람이 점점 온몸을 휘감는다. 그때쯤이다. 다정하게 손깍지를 끼고 걷는 연인이 노동자들의 구호가 가득한 거리와의 이별을 시도한다. 투쟁을 외치는 아재들을 피하려고, 발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오늘 진짜 사람들 많다. 다른 데로 갈 걸 그랬어. 여기로 괜히 들어온 거 같아. 설마 정동길까지 사람들이 많이 모일 줄은 몰랐는데…."


한껏 차려입은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에게 미안하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집회 탓에 돌담길 데이트를 망친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 둘은 조용한 곳을 찾으려고 분주하게 다른 데로 간다. 정동길에 일렬로 늘어선 노동자들의 투쟁은 계속됐다. 걸걸한 목소리의 사내가 거침없이 욕을 내뱉는다.


여러 명의 중국인 관광객들은 노동자들의 집회가 신기한지 가던 걸음을 멈춘 채 멍하니 바라본다. 짐짓 심각한 표정이었다. 이런 일이 생소하게 느껴진 걸까. 이내 스마트폰으로 아재들이 모인 집회 현장을 찍고 있었다. 어디서인가 민중가요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단발머리의 젊은 여성이 스마트폰을 셀카봉에 꽂고 농성 현장을 촬영하면서 지나간다. 바로 옆에는 마스크를 쓴 친구가 단발머리 여성이 비를 맞을까봐 우산을 씌워 주고 있었다. 둘은 다시 돌담길 쪽으로 천천히 방향을 돌린 채 아까 찍은 영상을 확인한다. 그 바로 옆에는 투명 우비를 입은 두 젊은 남성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야, 저기 먹을 거 파는데? 우리 뭐 좀 먹고 움직이자. 배고파 죽겠어."

"어디?"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쓴 청년이 노점 쪽으로 손가락질한다. '안경 청년'이 손으로 가리킨 쪽에는 노점상 하나가 서울광장과 돌담길 사이에서 우두커니 장사를 하고 있었다. 집회 현장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장사는 잘됐다. 사람들이 핫도그를 하나씩 사갔다.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팬 어느 중년 남성이 노점상에게 받아든 핫도그 하나를 한 입 베어 물고 걸어간다.


"저기, 안 보여? 저기 있잖아. 저 아저씨, 핫도그 사는 거 보이지? 나 배고파. 빨리 와봐. 하나 사 먹자."

"그래. 가자, 가."

     

광장의 기억


돌담길 끝, 서울광장 앞은 복잡했다. 한 여성의 우렁찬 목소리가 광장을 뒤덮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듯싶었다. 그곳은 울분을 토로하는 장이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라는 이름으로 모여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무시하는 정부의 모습에 지금 민중들이 광장으로 나와 총궐기를 시도한 것이다. 단체의 이름이 적힌 대형 깃발들이 나부낀다.


"제가 집회에 참석한 이유가 뭐냐면, 단순해요. 좀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거예요. 노동 악법이 개혁법이라고 치켜세워지는 사회에서 이거 잘못됐다고 이야기해야죠. 그냥 방바닥에 따습게 앉아 있으면 바뀔까요? 당연히 안 바뀌죠. 물론 나온다고 해도 곧바로 노동 악법을 다시 거둔다는 보장은 없죠. 그래도 나와야 해요. 우리 국민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죠. 그래서 저도 광장에 나온 거고요."


한쪽 귀에 마스크를 걸고 있는 한 시민이 상당히 격앙된 목소리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불어났다. 차 없는 서울광장은 꽤나 자유로웠다. 그리고 왁자지껄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모여들었다.


뿌연 하늘에 또다시 먹구름이 몰려왔다. 잠시 멈춘 듯한 빗방울이 다시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다. 빗방울은 땅바닥에 닿자 다시 가볍게 튕겨 올라온다. 팻말을 들은 대학생들이 광화문광장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야, 저기 사람들 광화문광장으로 간다. 우리도 가자."


광화문광장은 철저히 봉쇄됐다. 전투경찰들이 모든 통로를 막아선 채 대기하고 있었다. 돌담길 주변으로 풀뿌리처럼 잘게 뻗은 오솔길까지 차단한 상태였다. 전투경찰들은 촘촘히 각자 지정된 자리를 유지했다. 개미 한 마리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었다. 그렇게 경찰은 광화문광장만큼은 내주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시민들의 행진을 막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시민의 공간은 점점 경찰이 쳐놓은 차벽 때문에 외딴섬으로 변해갔다.


"그런데 경찰이 왜 광화문광장 가는 길을 막고 있는 거야? 우리가 무슨 죄지은 사람들이야? 정말 어이가 없어서…."

"광화문역은 아예 봉쇄해놨데."


이 모습을 크레인에 매달린 카메라가 비춰준다. 기자들도 분주히 광장 주변을 움직였다. 하지만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게 아니었다. 언론사의 이해관계에 맞게 잘게 썰어서 짜깁기한 채 각색됐다. 그도 그럴 것이 상당수 언론들은 '폭력'과 '불법'이란 단어에 집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언론들만큼은 집회의 본질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각각의 언론사들은 속보를 외치면서 현재 집회 소식을 전국 곳곳에 타진했다.


저쪽 끝은 광장에 있는 다양한 민중들의 이야기를 오독했다. 이번 집회를 단순히 불법 시위로 이해했다. 집회를 바라보는 표정부터 뜨뜻미지근했다. 오히려 역정을 냈다. 노동자와 농민, 학생, 시민들의 공간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교통체증이 일어나는 공간으로 불쾌와 짜증까지 동반한 상태였다. 왜 굳이 도심 한가운데서 집회를 여는 걸까, 이런 생각이 가득했다.


"아 진짜, 날씨도 안 좋은데 왜 이렇게 시위를 하는 거여. 복잡하게 길 막아놓고, 뭐하는 짓들인지. 이거 다 불법 아니여? 국가 다 알아서 해주거늘. 나라 꼬락서니 참 잘 돌아가. 나 원 참."


중절모를 쓴 한 노인이 집회 모습을 보고 쯧쯧 혀를 찬다. 옆에 있는 또 다른 어르신이 한마디 거든다. 하지만 시끌벅적한 광장 안에서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거의 혼잣말 수준이었다. 입모양을 봐서는 '중절모 어르신'의 말에 동조하는 듯싶었다.


교통체증의 여파 때문일까.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이 많았다. 시청역 역사 안은 돌아다니기 힘들 정도였다. 한눈팔다 다른 사람과 어깨를 부딪치기 충분한 곳이었다. 한 청년의 안경알에 뿌옇게 김이 서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잠시 멈춘 채 천으로 안경알을 닦기 시작한다. 저쪽 끝에는 집회 참석자로 보이는 시민들이 지하철 개찰구 앞에 서 있었다. 집회 준비물을 들고 시청역 6번 출구로 빠져나간다.


"형, 우비 챙겼어요? 지금 비 와요."

"아, 내 가방에 다 있어. 그거 빨리 입어라."

"오늘 진짜 날씨 별로다."


역사 안은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부슬부슬 내리는 겨울비 탓에 시청역 내부는 습한 공기가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그 때문일까. 지하철 이용객들의 살결에 끈적끈적한 불쾌감을 줬다. 지하철이 방금 들어왔다는 신호가 역사 안에 가득 울려 퍼진다. 지하철을 타려고 턱수염 아저씨가 뛰어간다. 출구로 나가는 계단 앞에 서 있는 꼬마들이 수많은 인파 속에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린다. 하얀 피부의 젊은 여성이 물기를 제거하려고, 분홍 빛깔의 우산을 툴툴 털어버리고 있었다. 잠시 비를 피하려고 들어온 학생들도 있었다.


"우산을 써도 비 다 맞네. 우산이 작나? 지금 우산 쓰나 마나야. 우비를 입든지 해야지."

"우비? 어디서 사지? 편의점 가야 하나? 어차피 광화문광장에 가려면 우비 입어야 돼."

"비가 지금 그칠 것 같지는 않은데?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야, 그럼 빨리 올라가서 우비 사자."


6번 출구 바로 옆에는 촬영용 캠코더의 배터리를 교체하는 청년들이 있었다. 오늘 집회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곧 시작할 촬영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듯싶었다. 몇 분간 촬영 준비를 하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덩이를 툴툴 털면서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메고 1번 출구로 올라간다. 서울광장 주변을 천천히 살펴보더니, 캠코더를 들고 광화문광장 쪽으로 유유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구호소리가 서울광장에서 흘러나온다. 구름에 가린 해는 안 보인 지 오래였다. 북악산 너머는 뿌연 안개 벽에 흐릿한 실체가 눈에 들어오는 게 전부였다. 광장은 노동자, 농민, 시민, 학생 등이 한곳으로 합치면서 혼잡해졌다. 사람들은 하나둘 서울시청 청사를 등지고 우산을 움켜쥔 채 세종대로를 따라 행진한다. 형형색색의 우산 빛깔이 장관이다. 시민들이 하나둘 도로를 점거한 채 각자 구호를 외친다. 시민들의 개성 강한 산발적인 구호들이 하나둘 뭉치면서 하나의 거대한 함성으로 울려 퍼졌다.**


시민들은 전투경찰들이 막아선 외딴섬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곳이 민중의 목소리를 드높일 마지막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경찰의 차벽은 더욱더 공고해졌다. 그 때문일까. 광화문광장은 다른 곳과 비교될 만큼 텅 비어버린 상태였다. 시민 없는 광장이 되어버렸다. 때마침 비는 바람에 춤추듯 위태롭게 쏟아진다. 우산을 써도 빗방울이 얼굴을 찰싹찰싹 때렸다. 이게 하늘에 떨어지는 빗물인지 슬픔에 잠겨 흘리는 눈물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서울광장에서 1㎞ 남짓 떨어진 곳까지 10여 분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전투경찰들은 광화문광장을 중심으로 집회 참석자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두세 겹으로 가로막힌 차벽의 모습은 그야말로 통곡의 벽이었다. 시민들이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 사이에 포위된 형국이었다. 그 위로 물대포 발사기가 노동자, 농민, 학생, 시민들에게 조준됐다. 광장 너머로 가는 걸 막기 위한 장치였다. 다가오면 가차 없이 쏟겠다는 신호 같았다. 이제는 집회 참석자들과 전투경찰이 충돌 직전이었다. 어느새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이야기


나는 그렇게 11월의 어느 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왜 자꾸 떠오르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무채색의 공간들이 드문드문 떠오른다. 가끔 악몽을 꿀 때마다 일정 시간의 그곳이 생생하게 형상화된다. 그날의 공간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것 같다.


그때마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날의 공간을 곰곰이 다시 한 번 생각한다. 하지만 11월 어느 날의 광장에서 일어난 시간이 꽤나 흘러간 상황이다. 그날의 공간은 기억의 언저리 어느 곳에 남겨진 채 희미해진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 서울광장 주변에서 우리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가진 채 공간을 영유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한 공간에서 수많은 생각과 행동이 함께 숨 쉬고 있었다. 이를테면 나의 이야기가 있었다. 노동자의 이야기가 있었다. 농민의 이야기가 있었다. 노점상의 이야기가 있었다. 연인의 이야기가 있었다. 모녀의 이야기가 있었다. 학생의 이야기가 있었다. 시민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렇다. 그날 그곳에 머문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 공간에 첩첩이 쌓였던 것이다.


공간만큼은 사람들이 써내려간 이야기를 항상 기억한다. 물론 공간이 품은 이야기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매번 다르기 마련이다. 그날의 광장처럼 공간에 발을 내딛는 사람마다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각자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공간은 정말로 변화무쌍하다.


오늘도 잠시 눈을 감고 지난 하루의 이야기를 되뇐다. 여러 곳에서 일어난 일들이 먼저 생각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머무는 공간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흔적처럼 남기기 때문이다. 그때부터가 공간에 의미를 새로이 만들어내는 순간이다. 현재 서 있는 공간은 어떤 이야기들을 갖고 있을까. 이제부터 도시의 시간을 기록한다.




1. 이 글의 주

 * 이인휘, 『활화산(하)』, 세계, 1990, p188~189/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일부 단어를 수정했다.

 ** 『활화산(하)』 188~189쪽에 있는 문단을 11월 어느 날의 상황에 맞게 변형했다.

 *** 『활화산(하)』 188~189쪽에 있는 문단을 11월 어느 날의 상황에 맞게 변형했다.


2. 사진 출처

 커버 이미지, Ⓒ 박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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