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걸어요, 우리
프로산책러. 이 단어를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나를 설명하는 수식어로 이 녀석이 제격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야말로 걷기를 습관처럼 해나가는 사람이 바로 나였으니 말이다. 매일 아침이면 창문을 열어 날씨를 확인한다. 먹구름이 잔뜩 낀 날씨라면 비가 몇 시쯤 올 지를 확인하는 것이 나의 주요한 일과 중 하나이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산책길에 나선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햇살을 쬐고 싶어서, 바람이 불면 하늘하늘 흔들리는 금계국이 궁금해서, 어제 길에서 만난 길고양이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네잎클로버를 찾는다는 다양한 이유를 들어 운동화를 고쳐 신는다. 물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산책’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한 마리의 강아지 때문이지만 말이다. 하루종일 밖에 나갈 궁리만 하고 있는 녀석 때문에 나는 외출을 나가서도 녀석의 산책을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군가는 유난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실은 나 역시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가면을 쓰고 에너지를 탈탈 털린 채 집으로 돌아오는 일보다는 행복한 강아지의 엉덩이를 보며 걷는 일이 더 보람됨을 느낀다. ENFP였던 인싸력은 강아지를 키우며 한 번, 아이를 키우며 한 번 누그러졌다. 어쩌면 현실보다 더 지독한 현실을 마주하며 체력과 함께 인싸력도 하강 곡선에 접어든 이유에서 일 것이다. 여하튼, 매일처럼 걷는 일을 해나가는 덕분에 신발장에 있는 운동화들은 모두 뒤축이 닳은 채로 끝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그래도 본인의 소명을 다 한 채 버려진다면 그것 또한 행복한 일이겠지. 어두컴컴한 신발장보다는 매일 계절이 피고 지는 모습을 가득 보았으니 운동화는 기꺼이 스스로의 임무를 다했노라 느꼈을 거라 믿는다.
나는 그야말로 걷기를 좋아하는 부류의 사람이다. 누군가를 알아가는 데 있어서 함께 걷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다고 믿고 있기도 하다. 그 경험은 필히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비롯되었을 텐데 한 달이 넘는 동안 꼬박 걸음을 옮기면서 타인에게 마음을 열어놓기에 그리고 또 다른 이의 아픔을 공감하는 데 있어서 함께 걷는 일이 내가 해온 일 중에서 가장 최선의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함께 땀을 흘리고 보폭을 맞추고 짐을 들어주고 이따금 손을 건네는 그런 일들은 섬세함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상대의 말속에서 들리는 숨소리와 발걸음을 미세하게 알아차리는 일들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배려 같다는 생각을 한다. 상대가 불편하지 않게 속도를 늦추고 또 그다음 반응을 살피는 그런 일들. 결코 부담스럽지도 또 어렵지도 않은 따스함이다.
조금 아이러니하지만 나는 걷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 일이 조금 덜 바빠지면, 결혼을 하면, 아이가 생기면 함께 걷겠다는 그 약속을 진심으로 믿은 덕분이다. 사람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결혼 5년 차에 깨달았다. 꾀가 많은 남편은 본인 대신 함께 걸어 줄 존재를 내 곁에 데려다주었는데 그게 바로 강아지였다. 그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덕분에 컨디션이 다소 저조하거나 피곤에 잔뜩 절어있는 날에도 나는 어김없이 운동화를 신는다. 남편은 하루쯤 쉬면 되지 굳이 나가야겠냐고 잔소리를 하지만 이건 암묵적으로는 강아지와 나의 약속 같은 것이다. 어쩌면 공감능력이 뛰어난 덕분에 강아지의 눈빛을 읽은 이유에서 일 것이고 마음이 약한 탓에 그 눈빛을 뿌리치지 못한 탓이다. 그래도 막상 산책을 나서면 좀 전까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던 몸은 한결 가벼워진다. 아무리 우울하고 어두운 기분이라도 적당한 햇빛과 바람 그리고 계절에 순응하며 피고 지는 풍경들 앞에서는 무장해제가 된다. 산책길의 풍경은 언젠가 포르투갈에서 만났던 빨래가 바삭바삭 말라가는 평온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우울감에 젖은 사람일수록 걸으라는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이 일은 하루, 이틀 그리고 한 달, 일 년. 그렇게 차곡차곡 쌓이면 나도 모르는 새 더 나아진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 점점 더 단단해져 가는 몸을 보면서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꾸준히 해나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인생의 진리까지도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단련된 몸과 마음의 체력은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무언가를 조금 더 끈기 있게 해 나가는 열정이 되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걷기를 무엇보다 즐겨하게 된 것은 생각을 털어내기에 더할 나위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유에서이다. 생각과 걱정을 늘 달고 사는 나에게는 '비움'이라던지 '내려놓기'같은 단어들이 다른 별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프로산책러 5년 차가 된 지금은 신기하게도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머릿속이 고요해지는 잠깐의 평화를 얻게 된다. 어떤 날엔 그렇게 걸음을 옮기다 보면 거름망에 걸러진 생각의 잔해들 즉, 진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을 구분하게 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단지 걸음을 걸었을 뿐인데 가벼워진다는 것은 그야말로 경이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마흔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에서야 나는 내가 어떤 것들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지를 알아가고 있다. 어떤 날엔 나를 '걷는 세계'로 나를 인도해 준 한 마리의 강아지를 떠나보내는 일이 문득 두려워지곤 하지만 그 순간이 오는 날까지 그리고 그 후에도 나는 기꺼이 걷고 싶다. 나는 내가 늘 걷는 사람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무라카미 하루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