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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e May 31. 2024

숱한 상처는 당신이 열심히 살아온 증거

내가 걸어온 흔적들

열심히 클라이밍을 해낸 흔적들 

 

 차로 10분이면 닿을 곳에 있는 친정에 자주 도움을 요청하는 편이다. 먼 곳에 있는 남편이 해야 할 일까지 홀로 두 명의 몫을 해나가야 함이 늘 힘에 부쳐서이다. 에너지 넘치는 강아지 한 마리와 아들 한 명을 키우는 일은 흡사 아이 두 명을 키우는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손 가야 할 일들이 많다. 자녀 계획을 이쯤에서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하는 것도 정착되지 않은 삶 그리고 강아지 한 마리가 나에게는 너무도 큰 이유에서다. (만약 계속 한국에 남아있는 삶이 보장되어 있거나, 남편이 나만큼이나 프로산책러였다면 나는 자녀 계획을 둘로 수정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열아홉에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며 어설픈 독립을 했던 딸은 서른이 한참 지나서야 부모 곁으로 돌아왔다. 뒤늦게 돌아온 만큼 효도라는 것을 해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하루종일 공장에서 육체노동을 하고 돌아오는 엄마에게 육아를 부탁하는 내가 가끔은 한심스럽긴 하지만 믿을 구석이라고는 엄마뿐이어서 나는 어설픈 당당함으로 친정집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다. 주말이면 조금 염치없지만 일찌감치 친정 엄마를 데리고 산책을 갔다가 점심 즈음 친정집으로 향한다. 아이가 낮잠에 빠져들면 그제야 엄마와 거실에 누워 입으로 무엇이 들어가는지 알아차리는 호사를 누린다. 배가 든든히 채워질 즈음이면 뒤통수에서 엄마의 뜨거운 시선이 나를 훑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이내 잔소리가 우박처럼 쏟아져내린다.








“너는 네 몸한테 미안한 줄 알고 살아야 해. 그렇게 혹사시키는데 버틸 수 있는 게 참 대단하다”

“네 발 좀 봐라. 대한민국에서 네 발보다 못생긴 발을 가진 여자는 또 없을 거다”

“너희 동생이랑 너는 아무래도 성별이 바뀌어서 태어난 것 같다”




 그렇다. 어른이 되고 돌아본 나는 정말이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일주일 중에서 일정이 없는 날은 하루 남짓이고 하루에도 집에 붙어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혼자 있을 반려견 생각에 중간중간 집에 들러 산책도 해줘야 하니 하루종일 차에 오르고 내리는 일만 대여섯 번은 기본이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 봐야 직성에 풀리는 성격인 데다 겁이 없어서 몸으로 부딪히는 탓에 나 스스로가 돌아봐도 내 몸은 여기저기 성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10년 전,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굳은살이 발바닥에 덕지덕지 생겨났고 그 못난 발은 달리기를 하며 굳은 살의 영광을 굳건히 품어주었다. 발은 그렇다 치지만 손은 그래도 꽤 양호한 편이었다. 클라이밍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클라이밍을 하다 보면 홀드에 쓸리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빠른 속도로 부딪히기 때문에 이럴 때면 긁혀서 상처를 입기보다는 화상을 입을 때가 더 많다. 의지가 활활 불 타오른 탓에 홀드에 긁힌 상처들은 까맣게 흉터가 되었고 클라이밍 1년 차가 다 되어가는 지금은 팔과 정강이 여기저기에 영광의 흔적들이 남았다. 성격도 대충대충을 외치는 탓에 흉터 연고를 바른다는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던 터라 한번 생긴 상처들은 대게는 흉터가 되고 만다. 건조한 상태로 약만 잘 발라두면 흔적 없이 사라질 상처들이지만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손은 물 마를 날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을 계속해서 해나가는 건 끈기 있게 무언가를 해나가는 내 모습에서 스스로가 용기를 얻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함에 있어서 ‘꾸준함’을 가장 어려워하는 나를 조금은 바꿔보고 싶었다. 몸을 움직이며 얻은 체력과 끈기로 책상 앞에서도 계속 써 내려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금은 스스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아주 조금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좌) 임신을 알아차리기 전까지 다닌 복싱장에서 만난 문장 / 우) 클라이밍을 하고 난 손


 푸릇푸릇한 10대보다 30대인 지금에서야 나는 ‘잘 다치는 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중이다. 이 말인즉슨 무언가를 도전함에 있어 두려움 없이 해나간다는 의미이기에 나는 여기저기에 남은 상처들에 크게 개의치 않고 산다. 물론 짧은 바지를 시원하게 입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겠지만 난 긴 바지가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니까 괜찮다. 이렇게 다치고 넘어지며 생겨난 상처와 굳은살들이 앞으로의 나에게도 몇 번이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용기가 되어주리라 생각하면 때론 그 흔적들이 자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어가면서 새로운 일들에 도전하고 낯선 곳에서 호기심 어린 눈빛을 마주하는 일들이 점차 두려워지겠지만 그런 것들에 조금은 의연한 사람이 되고 싶다.


 올 해가 가기 전에 남편이 있는 베트남으로 이주를 계획하고 있다. 혼자의 몸이었다면 이미 배낭 하나를 짊어지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겠지만 병원 신세를 자주 지는 어린아이와 강아지라는 변수 앞에서 나는 약자가 되었다. 자유분방하고 새로운 것들에 두려움이 없던 내가 ‘엄마’라는 이름표를 쥐어들고는 누구보다 새로움을 주저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럴 때면 언젠가 남편과 단칸방의 얇은 매트리스에 누워서 위로처럼 건넨 남편의 말을 떠올리곤 한다.


“우리 40대가 되기 전엔 꼭 해외에서 살아보자. 디지털 노마드가 되어서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고 살아보는 거야”


그땐 허황된 꿈같은 그 말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살아냈는데 막상 남편이 그런 삶을 눈앞에 펼쳐내니 어렵게 쌓아온 지금의 삶을 잃을까 봐 두려워서 발걸음이 채 떨어지지 않았다. 남편과 떨어져서 지낸 지난 1년 반의 시간 그리고 난생처음 도전했던 클라이밍을 통해 아주 조금은 그 두려움을 걷어내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두려움을 걷어내는 대가로 크고 작은 흉터를 얻었지만 무슨 일이든 대가가 있는 법이니 의연하게 이 상처들을 보듬으며 살아보기로 했다. 남편이 있는 베트남으로 이주를 하는 일도,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적응해 나가는 것도 그리고 그 후의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도 너무 무겁지 않게, 용기 있게 이제는 더 단단해진 모습으로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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