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들에게.
묘하게 겉돈다는 건 무엇인가. 공적인 친분을 사적인 친분으로 확장하는 능력 혹은 의지의 부족, 중심부와 주변부의 경계에서 내가 생각한 ‘겉돌다’의 정의는 그랬다.
- 어느 맑은 날 약속이 취소되는 기쁨에 대하여
항상 누구든 편하게 해주고 웃게 해주는 사람이 있고, 묘하게 불편하고 낯설며 겉도는 사람이 있다. 요즘은 이 둘을 ‘인싸’와 ‘아싸’로 구별하는 추세다.
그렇다면 나는 묘하게 겉도는 사람이다. 13살 즈음, 청소년기에 자아가 형성된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집단에 대한 애착을 가진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어떤 집단에 속해 있었던 이유는 ‘의무감에서 비롯된 책임감’ 정도 였을까. 아 딱 한번 진심으로 좋아했던 집단이 있다면 중학교 3학년 때, 내가 만들었던 진선여중 밴드부. 평생 가질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나 애착을 거기에 다 쏟아부은 것이 틀림없다.
‘공적인 친분을 사적인 친분으로 확장하는 능력 또는 의지의 부족’이 ‘겉돈다’라는 정의에 공감하면서도 의아함을 가진다. 애초에 공적인 친분과 사적인 친분을 구분하는 것이 나에게 의미가 있을까. 나에게 학교, 회사, 그 외 어떤 형태의 계약으로 묶여 있은 사람들은 다 공적인 친분이다. 딱 정해진 시간에 그 공간에 묶여있는 동안 의미가 있는 관계들. 그렇다면 사적인 친분은 어떤걸 말하는 거지? 사교모임이나 동호회는 돈 받고도 안가는 성격이다. 아마도, 나에게 사적인 친분은 남자친구, 10대나 대학교 시절에 우연찮게 공적인 친분에서 사적인 친분으로 넘어온 사람들 그리고, 가족들이며 앞으로도 큰 변함은 없을 것이다.
그냥 소심하고 내성적이고 낯가리는 성격에 대한 자기합리화가 아니냐고 물어본다면 뭐 그럴수도 있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고, 사람들은 다양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누군가는 낯가리는 성격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차가운 성격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세심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거만하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물은 어느 측면에서 보기에 따라 그 생김새가 다르다. 하물며 각각의 사람에 비춰진 나는 어떻겠는가. 나는 가만히 있을 뿐인데 모두들 저마다의 시선으로 나를 본다.
엄청난 과거도 없고 상처도 없고 트라우마도 없다. 계기는 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별로 큰 사건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성격이 발달되었고, 불편함이 없어서 이렇게 살고 있다.
집단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을 안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정확히 말하자면 집단에서 겉도는 내 자신이 힘들고 불편하다.
혼자, 술 없이 만나도 전혀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으며 같이 있어도 그리운 사람들라면 100명도 한번에 만날 수 있다. 그저 술과 소속감을 빌려 집단에서 벌어진 해프닝으로 떠들어야 하는 3인 이상의 모임이 어딘가 불편한 것이다.
그렇다면 묘하게 겉돈다는 것은 무엇일까,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모래에 섞여있는 소금 또는 소금에 섞여있는 모래 같은 것이다. 멀리서 보면 조화되어 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위화감이 느껴지는 주체라고 해야되나. 모래인지 소금인지는 뭐, 본인이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이 글에 공감하면서 굳이 여기까지 읽었다면 우리들은 소금인 걸로 하자.
온갖 시덥잖은 것들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나같은 사람도 좀 고장난 채로 잘 살아가고 있다. 타인에 대한 적절한 무관심 덕분에 타인과 비교하며 불행해 하거나, 타인의 불행에 행복해하거나, 타인을 수단으로 교두보 삼아 나아가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잘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