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난이 아닌 애도가 먼저입니다.
연일 라디오에서는 추모의 그리고 그리움, 슬픔에 대한 노래들이 흘러나온다.
이태원에서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귀한 이들이 하늘의 별로 우리 곁을 떠났다.
‘Halloween’이란 낯선 외국의 축제를 즐기려던 수많은 젊은 청춘들이 다시는 돌아오질 못했다.
핼로윈은 원래 켈트 족의 축제에서 시작되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면 음식을 마련해 죽음의 신에게 올리고 이들의 혼을 달래고 귀신을 쫓았다고 한다. 그리고 귀신들이 사람에게 해를 끼칠까 두려워 기괴한 분장을 한 것이 바로 핼로윈 문화라고 한다.
사고가 있기 며칠 전 OO소 매장엘 갔었다.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입구부터 핼로윈 축제 관련 용품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몇몇 엄마들은 앞다투어 새로운 아이템? 들을 구매하느라 손이 바빠 보였다. 글로벌한 아이로 키우려면 외국의 문화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며 쇼핑 바구니 가득 담던 그들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이 들었었다. 그런데 그 후 이태원 사고가 났다.
지금은 물론 글로벌 시대다. 그런데 그전에 귀하다는 말로도 표현이 부족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무엇을 먼저 가르쳐야 할까?
‘개도국도 아닌데 이런 사고?’라는 언론사의 뉴스 타이틀이 마음에 콕 박혔다. 이제 한국은 선진국 대열에 속해 있다.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른 시간에 발전했고 선진국 대열에 올랐다. 그런데 그러한 시간의 흐름에서 우리들 놓치고 말았던 것은 무엇일까?
팔십을 앞둔 엄마와 통화를 하는데..
“이게 무슨 난리냐? 우리 땐 먹고살기 바빠서 자식들 교육도 제대로 못 시켰는데.. 지금은 너무 먹고살기가 편해 이런 사고가 나는 거 아니냐?”
“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시대도 먹고살기 힘들어요”
혹시 우리가 놓친 게 이것일까?
우리네 부모님들께서 해결해준 먹고사는 문제를 등한시하고 지금 이 시대에 주어진 것이 당연한 듯 오만하게 살아온 건 아닐까 싶다.
죽어 마땅한 사람은 없다. 죽을 만한 사람도 없다.
2022년 10월 29일,
누군가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식을, 피를 나눈 형제를, 마주 보기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는 가장 친한 친구를 잃은 날이다. 누구의 잘못인지를 따지기 전에 우리가 놓치고 만 아까운 그들에 대한 깊은 애도가 먼저일 것이다. 그곳에 뭐하러 갔는지 탓하기보다는 그곳을 좀 더 안전하게 만들어 주지 못하고 지켜주지 못한 세상 어른들의 안일함을 꾸짖어야 할 것이다.
내 아이들의 잠든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자식을 놓치고 만 부모들의 아픔이 뼛속까지 전해진다.
부디 떠나간 그곳에서는 아프고 힘들었던 이 세상 기억 지우고 평안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