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이 붙이고 앉아 잘 굴려보자
계획을 세우는 일은 마음을 달뜨게 한다.
문득문득 하고 싶다고 느낀 일을, 오래 생각만 해온 일들을 종이에 적어 눈으로 보는 일은 퍽 설레는 일이다.
무언가 계획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특정한 때가 있다.
내 경우엔, 중간고사 시험 기간에, 따분한 수업시간에,
요즘이라면 업무를 시작하여 to-do 리스트를 작업하려 할 때, 곧잘 딴 길로 새곤 한다.
'시험만 끝나 봐라, 오랜만에 피아노 쳐야지'
'퇴근하고 집에 가서 영어책 좀 뒤져볼까'
'어우, 지금 그 책 읽고 싶은데. 밥 먹고 바로 읽어야지'
어떻게 보면, 계획으로 시작해서 도망칠 궁리로 가버린다.
때때로 연필로 적어 내려 가면서 벅차다고 느껴지는 계획이 있다.
대개 늘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들, 만년짜리 계획들
예컨대, '스페인어 다시 시작하기' '기타 줄 갈고 유튜브 보면서 따라하기' '기필코 영어공부 하기'
이제 보기 민망할 정도로 고정적인 레퍼토리다. 떠올리기만 해도 탄식이 새어 나오는 것들.
조금 변명을 하자면 조금씩 깨작여보긴 한다는 것.
이것 조금, 저것 조금, 그러다 훅 다 내려놓고 도망가기 일쑤다.
그래도 계획을 세우는 동안은 정말로 신이 난다.
저걸 이뤄냈을 때 내 모습은 얼마나 멋질 거냔 말이다.
여행지에서 만난 현지인과 금방 친구가 되고,
좋아하는 곡을 듣는 것뿐만 아니라 단숨에 기타로 연주해내고,
내 글이 두둑이 쌓여 좌라락 넘겨볼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다 스스로도 말만 늘어놓는 것처럼 느껴져, 조금씩 계획 세우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었다.
시도할 용기가 없으면 애초에 말자, 그럴 바엔 흐르는 대로 살고 말지, 싶어서였다.
게다가 '입만 산' 사람은 정말로 매력 없다.
그런데 하고 싶은 마음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이라 오래 감출 수는 없다.
이제는 왜 내가 계획한 일을 이루기가 어려울까, 심층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한다.
가만 보면, 나는 진득이 앉아 있을 때 계획을 세우곤 했다.
도서관에 앉아서, 강의실에 앉아서, 사무실에 앉아서
!!!!!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자꾸 하고 싶은 일들이 기어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도서관을 벗어나, 강의실을 벗어나, 사무실을 벗어나서는 좀처럼 진득이 앉아있는 곳이 없었다.
늘 텔레비전이 틀어져 있는 거실 소파를 제외하고는.
내 계획들을 돌볼 구심점이 없었던 게 이유였다.
유리구슬 같이 생긴 내 삶이 둥글둥글 잘 굴러갈 수 있게 만들 들 중심이 되는 점.
엉덩이 딱 붙이고 중심 잡을 '나의 공간'.
그래서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오늘의 집에서 보는 예쁜 방은 못되어도 내가 엉덩이 붙이고 책이든 노트든 펼쳐놓을 공간을 확보했다.
그곳에서 첫 글을 쓴다.
이것저것 계획 세우는 일이 다시 즐거워질 수 있도록 여기 자분히 앉아서 야금대 볼 작정이다.
부디 내 계획들이 매끈매끈 잘 굴러갈 수 있게, 나의 구심점이 되어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