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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보람 Feb 20. 2024

전동 휠체어를 멈추게 만든 엄동설한

잠시나마 나의 온기를 나눌 수 있다면 시간 쯤이야

   오후 9시 15분, 그날도 어김없이 하루를 마무리하고 문을 잠근 후 도서관을 나왔다. 아주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시장은 마트 한 곳을 제외하고는 모든 점포가 문을 닫아 바람만 드나들어 더욱 을씨년스러운 느낌이었다. 최저 기온이 영하 18도까지 떨어졌던 날이라 장갑과 목도리, 마스크까지 꽁꽁 싸맨 후 차가운 공기를 뚫고 시장을 나서는 길, 갑자기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저기 아가씨!"


   혹시 날 부르는 건가? 뒤를 돌아봤더니 아무도 없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찰나,


   "거기 아가씨, 이것 좀 밀어줘요."



   시장 입구에서 전동 휠체어를 탄 아주머니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 화면 속 시계를 보고는 '아직은 괜찮겠지'라는 생각에 휠체어 주변으로 갔다. 아주머니는 댁으로 가려면 시장을 지나가야 하는데, 휠체어가 방전되어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했다.



   "이게 한 번 충전하면 2시간은 가는데, 이제 겨우 20분 왔는데 꺼졌어"


   "아직 갈 길이 먼데 갑자기 멈춰서 많이 당황하셨겠어요."



   아주머니는 도심에 위치한 한 꽃집에 양해를 구하고 전동 휠체어를 완전히 충전한 후 집으로 가기 위한 여정에 나섰다고 한다. 그런데 너무나 추운 날씨 탓에 배터리가 금세 방전되어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고 한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 시장 입구에서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다 지나가는 나를 보고 소리쳐 붙잡은 것이다.



   "우리 남편이 여기까지 오는데 1시간이나 걸린대. 저기 시장 끝까지만 밀어줄 수 있어요?"


   "아, 네."



   전동 휠체어의 팔걸이 아랫부분을 잡고 휠체어를 미는데, 내 팔과 허리에 걸리는 무게가 정말 보통이 아니었다. 5년 전 아빠가 발목 골절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아빠와 함께 병원 곳곳을 수동 휠체어를 밀며 돌아다녔는데 그때도 이 정도의 무게는 아니었는데.. 전동 휠체어는 수동 휠체어보다 훨씬 무겁고 잘 굴러가지도 않았다. 사이드 브레이크가 풀린 자동차를 미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힘을 줘서 밀어도 마음처럼 쭉쭉 나갈 수 없었고, 힘이 다 떨어진 탓에 시장 끝에 거의 다 왔을 무렵 멈추게 되었다. 도서관 앞을 지나면서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도서관으로 들어가 남편을 기다리면서 잠시 충전하시라고 말할까 했지만, 나는 이미 '도서관 직원 오보람'이 아닌 '오보람'으로 돌아온 상태여서 굳이 다시 일터의 문을 열고 싶진 않았다.



   무거운 전동 휠체어를 밀다 결국 몸에 힘이 빠진 나는 시장 중간쯤의 치킨 집 앞에 멈춰 섰다. 치킨 집은 문이 굳게 닫혀있고 불도 모두 꺼져 있었지만 넓은 차양이 있어 잠시 머물러도 괜찮을 것 같았다. 휠체어를 세워두고 아주머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알렸다. 아주머니가 전화를 끊자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 남편 분은 언제 오신대요?"


   "한 40분쯤 걸린다네. 아가씨 고마워요, 수고했어."



   현재 온도 영하 15도, 아주머니는 두꺼운 패딩을 입고 무릎 위로 담요도 덮고 있었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날씨에, 아무도 없고 불까지 다 꺼진 시장에 혼자 두고 갈 수 없었다. 밤 9시 30분, 엄동설한은 여전히 매서웠다.



   "아저씨 오실 때까지 여기 있을게요. 혼자 계시기엔 너무 추워요."


   "아냐, 됐어, 어서 가던 길 가야지."



   처음엔 괜찮다며 사양하던 아주머니도 내가 물러서지 않으니 아주머니는 만류하기를 멈추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엔 성남에서 일을 했었고, 지금은 서울에서 무역 사업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큰 병원을 세울 거라는 자신의 꿈을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나에게도 나이는 몇 살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물었지만 나는 그냥 웃으며 공공기관에서 일한다고만 짧게 대답했다. 아주머니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자기에게 연락하라며 명함을 건네주었고, 계속 내 전화번호를 물어봤지만 알리고 싶지 않아 말하지 않았다. 그냥 명함에 적힌 번호로 연락하겠다고 했다. 물론 실제로 연락할 생각은 없지만.



   오후 10시가 조금 지난 시각, 아주머니의 남편이 도착해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아까 받았던 명함을 다시 꺼내 적혀있는 회사 이름을 검색해 보니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주머니의 정체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그냥 오랜만에 좋은 일을 한 것 같았다. 머릿속에 나만 볼 수 있는 칭찬 스티커를 하나 더 붙이고 뿌듯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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