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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선미 Oct 03. 2021

오늘도 옷을 세 개 버렸다 #short

버리는 일기

# 21년 9월 28일

작은 집의 미학은 뭐 하나를 들여놓으려면 기존에 있던 것을 보내줘야 한다는데 있는 것 같다. 오늘은 폭 140짜리 큰 책상이 하나 들어왔고, 작은 가구 두 개를 내보낸다. 버려도 버려도 또 버릴 것이 있다니 놀랍다. 더 단순하게 살고 싶다.


# 21년 9월 30일

매일 옷을 세 개씩 버리고 있다. 어제도 버렸고 오늘도 버렸다. 갑갑해서 몇 번 안 입은 브라렛, 불편해서 손이 안 가던 바지, 숏 레깅스를 입고 나서는 한 번도 안 입은 간절기용 바지. 내일도 딱 세 개만 버려봐야지.


# 21년 10월 1일

오늘도 옷을 세 개 버렸다. 옛날에 욕심내서 샀는데 사이즈가 안 맞아서 몇 번 안 입은 가을 중기장 코트, 동남아 여행 가면 꼭 챙겼었는데 지금은 입지 않는 여름 점프 슈트, 낡은 속옷 한 장. 속옷은 일반쓰레기이고, 다른 옷 두 개는 누군가가 입기에도 충분히 좋은 옷이라서 수거함에 넣을 예정이다.


생각해보면 원래도 옷이 많지 않다. 교복처럼 똑같은 옷을 두세 개 사놓고 돌려 입기 시작한 지 꽤 됐다. 패션보다 청결이 중요하다는 철학을 가진 이후로 새 옷은 주로 기존 옷이 낡았을 때 구매했기 때문이다. (이런 철학은 영혼의 노숙자에 월간 이반지하를 듣고 또 들은 반복학습의 결과다.) 견물생심이라고 새로운 옷을 인터넷이나 매장에서 보지 않으니 사고 싶은 욕구도 없는 것 같다.


옷 버리기는 며칠만 더 하고, 하루에 물건 3개 버리기로 일일 목표를 수정하려고 한다. 제발 냉장고와 책상 서랍, 그리고 보일러실이 비워지길 바라며. 단순하게 살기 위해 더 부지런해져야 하는 아이러니가 재밌다.


# 21년 10월 2일 낮

오늘도 옷을 버렸다. 동거인 옷까지 합해서 두 박스쯤 버린 것 같다. 의류 분리수거함과 일반쓰레기에 나누어 담았다. 덕분에 행어 하나를 버리게 됐다.


# 21년 10월 2일 밤

오늘 버린 것. 

행어 1개

자취러라면 꼭 산다는 이케아 사다리형 조립식 선반 1개

옷 두 박스쯤

폭이 1.5미터쯤 되는 대나무자리

캐리어 하나

모기를 잡아줄 줄 알고 샀지만 전혀 효과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던 기계

책상 스탠드 등 하나

낡은 운동화

비싸게 샀지만 마시지 않는 술 두 병 (버리면서 몇 년 전의 나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쓰겠지 싶어 모아둔 비닐봉지나 종이백

잡템 잡템 잡템 끝나지 않는 잡템

믹서기, 스마트 스피커는 가족에게 나눔 하고 동거인은 열심히 전자 장비들을 당근마켓에 팔고 있다. 저번 달에도 몇 십만 원어치를 팔아 재끼더니 이번 달엔 더 많이 팔 것 같단다. 집이 오늘 막 이사 온 날 같다. 행어가 있던 자리에 공간이 뻥 뚫려 볼 때마다 속이 시원하다.


# 21년 10월 3일

물건을 버리면, 남은 물건들을 더 아끼게 된다. 구석에 박혀있던 향수를 꺼내 먼지를 털고, 청소를 하면서 발견한 이어폰을 눈에 잘 보이는데 뒀다가 한 번 더 사용하고,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핸드크림을 결국 바닥까지 싹싹 쓰게 된다. 물건이 나간 자리에 공간이 남으니 청소도 더 열심히 한다. 가스레인지에 세제를 뿌려 솔로 문지르고, 가구가 나간 자리에 쌓여있던 먼지를 닦아낸다. 빈 공간에는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들어와 화분 사이를 가르고 이파리를 흔든다. 구석구석 햇빛이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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