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형 Nov 13. 2018

추적, 공공미술과 우리의 관계성

광주광역시 바림(Barim) 현대미술 관계읽기 (기획: 김보경, 박태인)

<현대미술 관계읽기>(이하 현미관) 추적, 공공미술과 우리의 관계성에 대하여 ?


       현대미술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이슈화 되고 있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수행자와 관찰자가 함께 그 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고, 단정적인 방안보다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을 선행(先行)한다. 

     관계는 단절이 아닌 소통을 통해 연결된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설득시키고, 또한 상대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생각의 종말이 아닌 생각의 재창조를 이루어낸다. 현미관을 통해 공공미술, 언어와 사대주의, 탈식민, LGBTQ와 페미니즘 그리고 센서쉽과 검열 등 여러 이슈들과 팜플렛을 통한 미술적 글쓰기와 읽기, 그리고 북클럽을 통해 현대미술의 재미를 알게 되었고, 그 재미를 통해 깊은 배움을 느꼈다. 깊이 있는 사고는 강요에 의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재미’라는 감정이 시초가 되어야 한다.

     본인은 현미관 프로그램 진행 중간쯤 우연한 계기로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인근 도시들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평소 공공미술에 대해 깊이 있는 생각과 연구는 아니지만 공공미술과 ‘감정선’은 닿아있었다. 그러다 현미관을 통해 그 감정선을 이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찾게 된 것이다. 프랑크푸르트와 몇몇 도시를 걸으며 만났었던 여러 공공미술(어쩌면 나에게 만큼은 공공미술로 느껴졌을 수도 있다)을 바라보고, 사진을 찍고, 나열하며 질문해 보고 싶었다. 

     공공미술은 공공의 영역에 공익을 추구하는 미술이라고 한다. 하지만 말처럼 공공과 미술의 역할을 함께 구현해 내기는 여간 쉽지 않아 보인다. 거리를 걷다 마주하게 되는 공공미술들을 보면 이 설치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하지만 그 의미를 생각하기도 전에 그 설치가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있을 때, 즉 사람들이 그 설치물을 좋아하고, 잘 사용하고 있을 때는 설치의 의미를 묻는 자체가 무색해 진다. 설치물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공공미술의 역할은 충분히 발휘되어졌다고 본다. 그래서 본인은 공공미술의 가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형성되고 발휘되어 진다고 보는 것이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와 비스바덴 이곳저곳에서 보았던 작은 분수대, 심지어 공공미술이라고 할 수 조차 없는 도로 위에 물이 뿜어져 나오는 그 시설마저도 아이들과 새들에게는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프랑크푸르트의 한 광장 옆에 약 5미터 정도의 높이의 임시 암벽등반 설치물도 단발성 행사이기는 하지만 이로 인해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니 나는 그 설치물과 장소의 관계성에 동의했다. 길가의 도서공유함의 디자인이 세련되지 않아도 괜찮다. 그 장소에 그 역할을 톡톡히 하는 모습에 동의했다. 하지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 유명한 강의 다리나 관광지의 난간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사랑의 자물쇠는 그들의 사랑을 영원히 붙잡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나 공공성과 미술성에 있어 이제는 조금 식상한 마음이 든다. 

 

     우리는 왜 도시에 공공미술을 설치하려고 하는 걸까? 우리는 도시에 살고 있고, 도시를 떠나고 싶어 하지만, 도시를 떠나지 못한다. 도시의 획일적인 모습과 도시의 여러 문제에서 벗어나고자 일부 도시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지만 도시의 문제는 도시에서 풀어야 한다. 직면한 문제를 회피하게 되면 결국 다시 그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도시에서 인간적인 것, 자연적인 것을 찾을 수 없다고 불평을 하기보다, 도시의 건전하고, 건강한 지속성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그려나갈지 고민하는게 낫겠다. 


     

     공공미술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국가주의 시대의 모뉴먼트(monument)이다. 우뚝 높게 서서 우리를 바라보는 그 높이의 위압감에서 뿐만 아니라 그 의미, 모뉴먼트의 헤게모니(hegemony)에 반발심이 생긴다. 그들은 모뉴먼트를 통해 국민의 생각을 통제하고 동의를 이끌어내려고 했다. 우리는 권위에 저항하지만, 익숙함에 머무르다보면 다시 권위를 찾는다. 작품도 마찬가지이지 싶다. 구도자의 심정으로 새로운 모델을 찾아 가는 자와 역사의 존속을 위해 유적을 만들어 가는 두 가지의 갈래가 있지만 현대미술과 공공미술에 대한 나의 관점은 새롭게 도전하고 시도하는 새로운 모델을 찾아가는 쪽을 응원하고 싶다. 

     또 우리는 도시 곳곳에서 작은 동상들도 많이 볼 수 있다.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 혹은 그 장소를 기억하기 위해 작은 동상을 설치하기도 하고, 장소의 대표성을 나타내기 위해, 그 장소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거나 새롭게 디자인하기 위해, 때로는 마케팅을 위해 만들기도 한다. 


     프랑크푸르트와 그 주변 도시를 걸으면서 나의 시선은 높은 모뉴먼트 쪽보다 작은 동상들에 이끌렸다. 뷔르츠부르크의 말을 형상화한 듯 한 동상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할머니와 사진 한 장에 들어올 때, 나는 그 알지도 못하는 동상의 의미에 개입을 해서 내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 낸다. 그 동상은 관찰자의 눈길을 빼앗고, 해석의 여지를 주었다. 프랑크푸르트 유로빌딩 앞의 유로화 상징물, 이 상징물 하나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이고, 이 앞에서 인증샷을 찍는다. 이런 성과를 보고 행정 하는 쪽에서는 뭔가 성과주의적인 랜드마크식 대형 상징물을 고민하고 있겠다. 여기서 떠오르는 질문 “공공미술은 누가 만드는 것인가?”. 

 

     언제가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뉴욕 월스트리트의 황소상 앞의 ‘두려움 없는 소녀상’.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 건물 앞에 설치된 황소와 곰상 앞에 뉴욕의 그 소녀상을 두었다면 이렇게 큰 이슈가 되었을까 생각해본다. 여기서 또 문득 드는 질문, “공공미술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려야 그 가치가 더 발휘되는가?”


     마지막으로 여러 질문들을 던지고 싶다. 미술관 안의 작품들이 공공의 영역으로 나와 공공성을 부여하면 공공미술이 되는가? 그 공공성은 누가 부여하는가? 공공미술에 관객은 존재하는가? 시민들에게 외면 받는 공공미술은 존재가치가 있는가? 공공미술은 공공성과 미술성중 무엇이 더 우선되어야 하는가? 공공미술이 행정에 예속되면 공공미술로서의 역할이 가능한가? 공공미술에 우리는 얼마나 참여하고 개입하는가? 공공미술을 시민들에게 얼마나 알리고 제작과정에 시민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가?


     결국 공공미술과 우리의 관계성의 추적에 대한 명확한 결론은 없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현대미술과 공공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하고, 함께 이야기하면서 그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고 싶다. 


현대미술 관계읽기 도록


작가의 이전글 [정치] 우리는 이런 대표를 원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