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갉아먹은 타인을 맞닥뜨려 밑바닥까지 보지 않아도 된다. 나를 때린 이를 찾아가 있는 힘껏 화를 낼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집으로 돌아가 그놈에게 하고 싶었던 수많은 말들을 방구석 베개 속에 파묻어도 된다. 조직 속의 불편한 사람들에게 나 자신이 스스로 ‘절대복종’을 표현하는 수많은 표정들에 지쳐갈 때, 얼굴의 거추장스러운 표정들을 떼 버리고 가만히 무표정한 채로 있어도 된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들을 나는 하지 못했고, 당당하지 못하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깨뜨리지 않은 유리잔에 대한 잠재적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갔다. 아직 깨지지 않은 유리잔을 손에 쥐고 고개는 심장을 향해 놓은 채, 일을 하며 밥을 먹고 대화를 하며 살았다. 이유 없는 죄책감은 나를 물 웅덩이로 이끌었다.
잔잔한 연못을 가장한 웅덩이였나 싶다. 비 온 뒤에 움푹 패인 아스팔트 바닥에 고인 물 웅덩이. 탁한 물 위에 비친 나의 표정은 비로소 정직했다.
수많은 지겨운 관계 속에서 미소 띤 가면을 쓰고 살아가다 문득 그 웅덩이에 나의 무표정을 발견하면 술 한 잔을 따라 마셨다.
술이 심장을 지나 혈관에 퍼지면, 인생의 불순분자들이 하나둘씩 웃으며 우스꽝스러운 농담을 하는 듯했다. 몽롱한 기분 속에서 증오의 얼굴을 한 자들이 나타나 술잔을 건네며 회포를 풀고자 했고, 이름 없는 자들이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듯했다.
중학교에 다닐 무렵 집단 따돌림을 당하던 나에게 담임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이 있다.
“너는 너무 색깔이 없어. 더 당당해져야지. 너만의 색깔을 찾아봐.”
아무 색깔이 없던 나의 잠재적 죄책감이 수면 위로 올라와 스스로 나를 괴롭혔다. 삶의 문제에 당당하게 직면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 미안했다. 존재하는 것이 민폐 같았다.
비록 나의 영혼을 옭아맸던 사람일지라도, 내가 힘껏 한 대 때려 마땅한 사람일지라도, 분노하는 습관이 배어있지 않은 사람은 불의를 참는 것보다 분노하는 게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속으로 삼키고 며칠 참아낼 수 있는 정도의 외부 영향력도, 얼토당토않은 분노를 표출하면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도 여전히 생각이 나며 또 한 번 죄책감에 빠진다. 그래서 술의 힘을 빌려가며 모든 것이 다 우스꽝스러운 광대 모습을 하고 있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관조하는 데에 일념 한다.
괜찮다. 무서우면 피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분노하는 습관이란 너무나 찬란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을 땐 혼자 괴로워도 된다. 오히려 나의 잘못과 실수로 인해 나에게 분노했을 이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