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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톨이 Jun 09. 2023

쓰는 마음 국민 대축제

쓰고 싶은 마음

신춘문예 철이면 신문사로 문의 전화가 많이 온다. 하루는 어떤 남자가 전화해 이렇게 물었다.

      

“시 부문으로 응모하려고 합니다. 응모작 맨 뒤에 제 시에 대한 해설을 첨부하면 될까요?”     


자신의 습작품에 자작 해설 첨부하겠다는 건…어떤 자신감(혹은 무모함)인가.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응모작만으로도 신춘문예 마감을 앞둔 문화부는 충분한 서류폭탄을 맞는다. 하지만 남자는 정말 해설이 필요 없는 게 확실하냐고 되물었다.    


“해설이 없으면 제 시가 어떤 의미인지 읽는 사람들이 대체 어떻게 알고 평가를 할 수 있다는 거죠?”

     

해설이 필요 없다는 대답에 그는 좀 화가 난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그게 가능하니까 심사위원이신 것 아닐까요?”


갑자기 저편에서 아…, 하는 낮은 탄성이 들려왔다. 그의 풀리지 않는 의문 ㅡ왜 모든 신춘문예 공모 요강에는 작품해설을 첨부하라는 내용이 없는가ㅡ의 답을 마침내 찾게 된 것처럼. 





봄이었다. 회사 로비에서 전화가 왔다. 문학 담당 기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있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일단 좀 내려와 봐야 할 것 같다는 답만 돌아왔다. 의아해하면서 로비로 내려가니 할아버지 한 분이 서 계셨다. 한눈에 봐도 묵직한 원고지 뭉치를 들고 있었다. 붉은색 깍두기 칸이 그려진 오래된 200자 원고지였다. 할아버지는 신춘문예에 응모하고 싶어서 갖고 왔다며 두껍고 뭉툭한 손으로 원고지를 내밀었다. 난처했다. 구부정하게 선 남루한 차림의 할아버지. 그 뒤편 로비 창밖으로 보이는 가로수의 여린 나뭇잎과 바람이 불 때마다 거기에 부딪혀 잘게 부서지던 봄 햇살.


아, 아직 신춘문예 공고가 나려면 몇 계절이나 더 바뀌어야 하는데.      


지금의 나라면, ‘어르신, 그럼요!’ 하고 그 원고를 받아뒀다가 신춘문예 공모 기간에 대신 넣어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입사한 지 만 일 년을 겨우 넘겼던 그때의 나는 이 두꺼운 원고지를, 언제까지, 어디에, 어떻게 보관해야 할지에 대해서나 막막해하는 일머리 없고 고지식한 신입이었다.


“죄송한데 아직 신춘문예 공고가 안 났어요!”     


신춘문예는 연말이나 돼야 공고가 날 거고, 그걸 보고 접수하셔야 한다고 여러 번 반복해서 설명했다. 할아버지는 잘 이해하지 못하셨고 내가 그냥 그 원고를 받아주길 바라셨다. 나는 재차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 


왜 그랬을까?     


우선은 몇 계절이나 저 두꺼운 원고를 회사 서랍에 넣어 두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서랍 안은 내 짐만으로도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읽다 만 책, 이런저런 보도자료, 상비약, 호치키스와 연필, 취재 수첩, 칫솔 치약 세트 사이에 저 원고를 끼워 넣고도 서랍이 무리 없이 잘 닫힐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반기에 다른 부서로 인사가 나버릴지도 몰랐다. 게다가 접수 기간도 아닌 데 작품을 받아두는 건 엄밀히 말해서 공모 규정 위반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실은 다 핑계였다. 잡동사니로 꽉 찬 것 같은 내 마음 안에 그 낯선 원고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그때 그 손때 묻은 원고지는 이미 너무 많은 문제로 포화상태인 내 일상에 던져진 또 다른 짐이었다. 그것도 가늠할 수 없는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긴 불편하고 무겁고 어찌할 바 모르겠는 짐. 결국 나는 ‘선공고 후접수에 예외란 없다’는 불굴의 신춘문예 원칙주의자가 되어서 어렵게 신문사까지 찾아오셨을 할아버지가 원고를 품에 안고 그냥 돌아서시도록 안내했다.

    

사무실로 다시 올라오면서 생각했다. 늦가을 신문이나 온라인으로 공고를 확인하면 된다는 내 설명을 이해 하셨을까? 과연 저분이 올해 겨울 양식에 맞춰 신춘문예에 응모하실 수 있을까? 층수가 높아질수록 그러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확신이 자꾸 강해졌다. 일방적으로 들이밀던 원고를 사양하느라 어쩔 수 없이 봤던 할아버지의 글자가 떠올랐다. 어디론가 떠내려가는 것처럼 흘려 쓴 글자들. 쓰게 하는 마음이 생각났다. 공모 절차도 방법도 모르지만 무작정 저렇게 많은 양의 글을 쓰게 하는 어떤 마음이. 아, 그냥 받아드렸어야 했는데.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사무실 대신 화장실 칸막이 형광등 불 아래 들어가 쪼그려 앉았다. 눈물이 났다. 회사 건물 밖에서만 눈부셨던 그해 봄 때문에. 천하의 행정편의주의자인 나 때문에. 쓰고 싶은 마음 때문에.            




신춘문예는 조용히,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잠재적 작가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게 해준다. 마감 날짜가 임박해오면 광화문 우체국 직원은 매일 박스 채 수천 편의 응모작들을 사무실로 실어 나르느라 바빠진다.


이 무렵이면 평범한 사람으로 가장한 슈퍼 히어로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면밀히 둘러보게 된다. 출근길 버스손잡이를 잡고 흔들리는 화장기 없는 중년여성, 쌤소나이트 백팩을 메고 지하철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남자, 스타벅스 창가 자리에 앉아서 토익 문제집 풀기에 여념이 없는 대학생, 점심시간 밀려드는 주문 속에 저글링 중인 바리스타, 음식물쓰레기통을 들고 종종 걸음질치는 아파트 주민, 대출 때문에 왔는지 예금 때문에 왔는지를 물으며 번호표를 뽑아주는 친절한 은행 청원경찰. 사실 그들은 모두 쓴다. 나는 알고 있다.      


진지한 작가 지망생들에게 신춘문예는 일종의 올림픽 같은 것이다. 신춘문예는 한국의 중앙문단에서 주목받는 엘리트 문인들을 배출해내는 가장 전통 있고 권위 있는 제도다. 실수가 있어서는 안된다. 모든 과정에서 공정에 만전을 기한다. 응모작의 신상정보는 모두 제거하고 일부 분야는 사본까지 구비해 둔다. 신춘문예 공모가 끝난 뒤 예심이 있기 전까지 신문사 한편은 박스 채 쌓인 수많은 원고와 그 원고를 분류하고 인적사항을 별도로 만드는 이들의 작업, 복사기 소리로 정신없다. 하지만 신춘문예가 올림픽과 다른 결정적 이유는 쓰는 이들의 다양한 참가 목적 때문이다. 프로 작가로의 등단이나 평단의 갈채만이 응모의 유일한 목표가 아니다.


때때로 작업자들이 응모작을 들고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찾아올 때가 있다. 신춘문예 응모의 기쁨을 담은 편지-정작 편지뿐 응모작은 없다, 볼펜으로 그린 그림, 독백이 몇 개 적힌 손바닥만한 쪽지, 시라고 하기엔 희곡처럼 대사로 구성돼 있고 소설이라고 하기엔 분량에 턱없이 미달하는 응모작을 어떻게 분류할지 결정해 달라는 이유에서다.


양념도 후라이드도, 치킨도 갈비도 아니다. 그리고 소설도 시도, 희곡도 시조도 아니다.  분류의 관점에선 난해하기 짝이 없는 그런 응모작을 작업자와 함께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고심하다 보면, 결국은 웃음이 난다. 이 응모작을 부치기 위해 우체국을 찾아 신문사 주소를 쓰고 신춘문예 담당자 앞이라고 기입 했을 이들의 마음 때문이다. 쓰는 목적은 다르지만, 하여튼 쓴다. 쓰는 방식은 다르지만, 그래도 쓴다. 누가 뭐래도, 쓰고 본다. 쓰는 마음 국민 대축제다.       



그림 Gabriele Mü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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