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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톨이 Jun 17. 2023

지금 펜이 필요하세요?

쓰고 싶은 마음


런던 출장 마지막 날 히드로공항 출국장의 텍스리펀 사무소였다. 면세구역 뒤편 복도를 따라 들어갔더니 마른 체격의 백인 여자가 투명한 가림막 뒤 창구에 앉아 있었다. 출장 기간 동안 만났던 어떤 이들보다 신경질적이고 불친절한 사람이었다. 마치 수색과 추궁을 당하는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여권과 소지 물품을 모두 확인받은 뒤에 마침내 텍스리펀 신고서를 작성할 차례가 됐다. 수중에 펜이 없었다. 혹시 빌릴 수 있겠냐고 물었다. 


"No.”     


야박한 답이 돌아왔다. 단칼의 거절이었다.  



여자는 사무실 뒤편의 동료와 잡담하기 위해 창구를 떠났다. 황망했다. 잠시 정지화면처럼 서 있는데, 저편에서 젊은 백인 남성이 다가왔다. 내가 이곳에 처음 올 때 그랬던 것처럼 두리번거리며 캐리어를 끌고 오는 걸 보니 텍스리펀 받으러 온 외국인이 분명해보였다. 나는 창구에서 주섬주섬 비켜 서 줬고 그는 내가 서 있던 자리로 갔다. 여자는 새 민원인을 맞기 위해 창구 앞으로 왔다. 그리고 과연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친절하고 상냥한 말투로 남자와 대화했다. 소리 내서 웃기까지 했다. 한 걸음 옆에서 인내심 있게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다가 여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펜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도착 이후부터 그는 창구 앞에 자신의 펜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 펜이 꼭 필요했다. 공무원이 민원인에게 펜도 빌려주지 않는 이런 나라에 세금까지 더 뜯기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왜 창구직원이 아니라 내게 펜을 빌려달라고 하는 거지?’ 아마도 그런 의문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그게 의문인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곧 아무려면 하는 표정으로 흔쾌히 펜을 내줬다.

 

나는 세관 여자가 남자의 서류를 들고 금방 돌아올 것이고 나처럼 그 역시 이 많은 서식을 채워야 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여전히 뭔가를 쓰고 있는 나때문에 호의를 베푼 남자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제때 펜을 돌려주기 위해 미친듯한 속도로 글자를 써내려갔다. 손가락에 쥐가 날것처럼 거침없이 휘갈겨 썼다. 여자가 다시 돌아와서 창구에 앉았을 때 막 결승선을 통과한 단거리 육상 선수처럼 펜을 그에게 도로 돌려주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남자는 내 전력 질주가 무색한 여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가지세요.”   


그는 또 다른 펜을 재킷 안주머니에서 꺼냈다. 


“언제 또 필요할지도 모르잖아요.”      


인생은 언제나 물 반 컵 같았다. 그 출장에서 유독 나쁜 경험을 여러 번 했고 출국장에서의 그 경험은 단연 하이라이트였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좋은 일도 있었다. 분명히 그랬다. 그 남자가 준 펜처럼 말이다. 좋은 일과 타인의 호의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잊어버리지만 않는다면, 세상은 어느 때든 좋은 일과 나쁜 일의 균형 가운데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불편한 사건이 아니라 내 마음의 선택이다. 나는 펜을 빌려주지 않은 여자의 매우 인상 깊은 야박함 대신 펜을 선물해준 남자의 지극히 평범한 선량함을 기억하기로 했다. 감사 인사를 하는 나를 향해 그가 가볍게 웃어보였다. 낯선 두 여행자 간에 갑자기 오가는 훈훈한 웃음의 교환을 창구 뒤편에 앉은 여자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작성을 마친 서류를 창구 안으로 밀어넣으며 생각했다. 어이, 싸가지…, 봤냐. 인류애라는 건 이런 것이다. 펜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기꺼이 빌려주는 것. 심지어 가끔은, 그냥 주기도 하는 것.           





한겨울 수 많은 문호들이 즐겨 찾았다던 빈의 유서 깊은 카페에 혼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영혼까지 어둡게 만드는 춥고 우울한 겨울 유럽 거리를 한참 헤맸던 터였다. 카페 내부는 가족, 친구들과 커피를 즐기는 이들의 부산스러움 소음으로 가득했다. 혼자 여행중이었던 나는 하루종일 침묵 속에서 걸었던 터라 몹시 피곤했다. 며칠 동안 아무와도 말을 섞지 않아서 점원에게 주문 할 때 들리는 스스로의 목소리에 놀라거나ㅡ나도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 참!ㅡ 어색해했다. 도심의 카페처럼 다정한 교제가 이뤄지는 장소에선 혼자라는 사실이 좀 더 깊게 사무쳤다. 하지만 뭔가를 끄적일 수만 있다면 혼자여도 혼자가 아니었다.


커피를 주문해놓고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냈다. 쓰는 행위는 내게 그 자체로 합목적적이었다. 기록인 동시에 생존의 양식이었다. 쓸 수 있을 때 그곳이 얼마나 낯선 곳이든 나는 나만의 세계에 완전히 속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된 세계에 단단히 발 딛고 서 있다 느낄 때 비로소 안정감과 행복감을 느낀다. 내겐 글쓰기가 그랬다. 쓰고 있을 때 나는 부족할 게 없었다. 외롭고, 지루하고, 힘든 혼자만의 여행도 그 힘으로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가방을 아무리 뒤져도 펜이 없었다. 가방 전체를 찬찬히 다시 봤다. 역시 없었다. 잃어버린 거였다.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일어난 일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펜을 빌릴만한 사람이 있을지 주변을 흘깃거렸고 일어나려다 다시 앉기를 반복했다. 한참 안절부절해 봤지만 선뜻 물어볼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쓸 수 없으니 혼자 앉아서 할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다이어리 앞 뒷장을 뒤적거리며 그동안 쓴 글들을 읽었다.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이 아니었다. 단지 쓰는 행위에 합목적적 의의를 두고 쓴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나마 그것마저 금방 다 읽어버렸다. 나는 점점 더 초조하고 침울해졌다. 쓰고 싶었다. 포크로 점자로 찍어서라도 뭔가를 쓸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나이프로 벽에 작대기를 긋더라도, 쓰고 싶었다. 그때 대각선 맞은편에 남편과 함께 앉아 편안한 차림으로 차를 즐기고 있던 중년여성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내쪽으로 다가왔다. 가방을 뒤적거리는 동안 우연히 몇 번 눈이 마주쳤던 여자였지만, 그냥 우연이라고만 여겼다. 그녀가 내 음울한 눈을 보며 이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이게 필요해 보여서요.”     


여자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그것을 내밀었다. 그토록 간절하게 찾고 있던 그것. 쓸 수 있는 도구. 펜. 하지만 그녀가 내려놓은 펜을 보고 나는 고마움보다 훨씬 큰 부끄러움에 휩싸이고 말았다. 속마음을 완전히 들킨 것 같아서였다. 낯선 도시에 만난 이방인에게 쓰고 싶은 간절한 마음, 아무 말이나 끄적이고 싶어 타들어 가는 절박함을 다 들켜버렸다.      


나는 그녀의 호의에 내 방식으로 답하고 싶었다. 그녀가 일행과 커피를 다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까지 펜을 빌려준 데 많은 보람을 느끼도록 최대한 많이 뭔가를 써대려고 매우 노력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잘 써지지 않았다. 혼자로 꽉 찼던 내 세계에 이미 타인의 존재가 깊숙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기에 처음 본 뜨내기 관광객의 쓰고 싶은 마음을 그처럼 읽고, 부탁한 적 없는 호의를 베풀어주러 온 것일까. 나의 어떤 행동이 그녀의 주의를 끌었고, 그 순간 내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펜이라는 걸 알아차리게 했을까. 잠시 후 저쪽에서 짐을 챙기는 기척이 느껴졌다. 펜을 돌려주기 위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숄더백을 매고 이미 반쯤 출구 방향을 향해 돌아선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가지세요.”     


그녀의 얼굴도, 옷차림도, 배경도 지금은 모두 다 흐려졌다. 하지만 그 순간은 잊히지 않는 어떤 감각으로 여전히 가슴 한편에 살아 있다. 아마도 그녀는…, 아마도 그녀도…쓰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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