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톨이 Jun 21. 2023

쓰는 사람입니다만

쓰고 싶은 마음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보통 소속과 이름, 직함을 병치해서 간단히 자신을 소개하게 된다. 그런데 내가 만난 소설가나 시인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무엇을 쓰는 누구’라고 소개했다. 문단에서 통용되는 일종의 암묵적 전통 같아 보였다. 평소 친하게 지냈던 소설가와 또 다른 시인을 서로에게 소개해준 적이 있었다. 나는 둘 다와 잘 알았지만, 둘은 서로 초면이었다. 대학로 한 소극장 앞에서 만난 그들은 이렇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소설 쓰는 염 아무개입니다.” 

“반갑습니다. 시 쓰는 김 아무개입니다.”      


그들은 항상 ‘쓰는 누구’였다.      




쓰는 행위로 자신을 소개하는 문인들의 관습은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누군가가 부여한 직업 분류나 명칭이 아니라 쓴다는 그 행위만이 그들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다고 여기는 긍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는 행위로 직업을 설명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 “치료하는 장준혁입니다”, “변호해주는 최강석입니다”라고 하는 의사나 변호사는 없다. 이것은 작가들이 다른 직업군보다 동사형 사고방식이나 삶에 더 가치를 두고 있다는 방증 같았다.


명사형 삶이 완료형, 확실성, 성취와 보상의 상태를 뜻한다면, 동사형은 미완이자 불확실한 현재진행형이다. 의사면허를 따면 의사가 되고, 변호사자격증을 가지면 변호사가 된다. 의사든 변호사든 모두 명사다. 명사형 삶은 일종의 면허이자 증명서이고, 어느 정도 보증된 부와 명예와 소속과 직위가 뒤따라오는 삶이다. 그래서 깔끔명료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어떤 조직이나 어떤 직급의 누구라는 사회적 소개도 명사형에 가깝다. 지금까지 쌓아온 경력, 잠재적 연봉, 사회적 가치 같은 것들이 강력한 정보로 함축돼있다. 


하지만 동사형 삶은 어떤가. 동사는 진행형이다. 쓰고 있다. 밑도 끝도 없이 쓰고 있다…. 대체 무엇을, 왜, 어떻게 쓴다는 말인가. 여기에 확실한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쓰고 있는 게 그래서 대체 어떻게 됐다는 것인지, 과거의 영광도 미래의 영예도 불확실하다. 당연히 그 행위에서 유추되는 돈도 명예도 소속도 직위도 없다. 이렇게 막연하고 종잡을 수 없는 직업 소개가 있을 수 있는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들에게는 오직 쓰는 것만이 중요하다. 쓰는 누구, 라는 말은 작가의 정체성은 쓰고 있을 때만 확실해진다는 고결한 자기 선언 같아 보였다.      



나는 쓰고 싶어서 신문기자가 됐다. 뭘 쓸지는 일단 되고 나서 생각하자는 주의였다.  신문 기자들은 기사 뒤에 바이라인이란 걸 단다. 이 기사를 쓴 사람이 아무개 기자라는 원산지 확인 보증마크 같은 것이다. 바이라인에 이름과 이메일 주소가 같이 실리기 때문에 기자들은 자신의 로고와도 같은 바이라인 이메일 아이디를 신경써서 정한다. 나 역시 고민 끝에 아이디를 ‘teller' 로 정했다. 말하다(tell)란 동사에 –er이란 접미어만 붙여 만든 조어였다. 쓰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을 바이라인에도 반영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주변에서 왜 굳이 은행 창구 직원을 뜻하는 단어를 바이라인 아이디로 정했냐고 의아해했다. 난감했다. 그때 타사 동기 한 명이 나를 이렇게 격려해줬다. 


“이 아이디를 보고 은행창구 직원 ‘텔러’를 떠올리는 사람들은 ‘명사형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야. 하지만 여기서 ‘말하다’는 뜻을 발견해내는 사람은 ‘동사형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지." 


그녀는 명사형 사고방식이 어떤 것인지, 동사형 사고방식이 어떤 것인지 굳이 부연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있던 모두가 명사형보다는 동사형 사고방식이 압도적으로 더 '있어 보이는' 사고방식이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명사형 인간들은 단순하고 표면적이며 일차원적이었다. 반면 동사형 인간들은 은유적이며 다차원적이고 훨씬 더 깊은 함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기자 생활을 오래했지만 나를  소개할 때 난처할 때가 많았다. 경제기사도 쓰고 문화기사도 썼다. 에세이도 쓰고 경제경영서도 썼다. 굳이 정리하자면 이것저것 아무거나 다 썼다. 전문성이 마치 남의 집 애 이름처럼 느껴졌다. 내 삶의 궤적은 여기저기 찍힌 산만한 점들 투성이일뿐, 도무지 하나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 왜 내겐 나를 표현할 그 딱 하나가 없을까. 그때 내 이메일 아이디에 동사형 사고란 의미부여를 해주었던 오래전 타사 동기가 떠올랐다. 한 인간의 삶과 열망은 명사형 사고의 틀 안에 고정돼 있는 게 아니었다. 동사형으로 나를 소개하고 싶어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명사형의 덫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쓰고 싶은 마음도 동사처럼 부단히 움직이는 거였다. 나는 여전히 내가 뭘 써야할지, 뭘 쓰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뭐가 되든,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내가 쓰고 있으리란 사실만은 확실했다.  



작가의 이전글 지금 펜이 필요하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