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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톨이 Jun 25. 2023

나의 보그체 도전기

쓰고 싶은 마음 

이른바 '보그병신체'(무분별한 외래어 사용)라 일러진 것에 대해선 나 역시 거부감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프레임으로 분류해서 자유로울 수 있는 분야는 사실 단 하나도 없다. 문학계간지를 펼쳐보면, 거기에는 '학보사병신체'(설익은 사상과 현학의 과잉)가 있고 일간지 보도를 보면 '역삼각스트레이트병신체'(6하 원칙에의 과도한 집착)가 있다. 간단히 말해서 어떤 분야에서 그런 문장을 쓰는 데는 어쨌든 이유가 있다.       


육아 휴직에서 복직한 뒤 패션 분야를 맡게 됐다. 사시사철 미완성 패션 전문으로 살았던 내게 패션기자란 참으로 호사스러운 명칭이었다. 하지만 이왕 새로운 분야를 맡게 된 거, 열렬하게 패션을 이해한 사람처럼 쓰고 싶었다. 비록 나는 SPA 브랜드 면바지에 국산 의류기업 온라인 떨이행사로 건진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을 지언정, 내 글에서만은 오뜨꾸뛰르 정신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복직 후 첫 패션기사를 잇백 트렌드로 쓰기로 했다. 정말로 열심히 썼다. '안나 윈투어'에 빙의된 것처럼 썼다. 주문을 외웠다. 이제부터 너는 안희 윈투어다. 비록 패알못으로 평생을 살아왔지만 쫄지 말고 자신감을 가져라. 자기 체면을 걸며 한 땀 한 땀 장인정신으로 완성한 나의 첫 패션 기사를 본 동기의 반응은 이랬다.           


'뭐라고 해야할까. 이건 정말이지…보그 같네'          


잘못 들으면, 만약 뒤에 '병신체'가 생략됐다고 생각한다면, 디스라고 오해할 수도 있는 평가였다. 지극한 우리말 사랑 정신으로 무장한 대부분의 일간지 기자들은 소위 보그체라 불리는 것들을 계도해야할 언어적 방종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예스!'라고 생각했다. 내가 원한 건 바로 그거였다. 그 느낌. 안희 윈투어의 느낌! 하지만 데스크는 나의 그런 성취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데일리 백을 뭐라고 써야 하지? 매일 매일 들고 다닐 수 있는 가방?"     


나는 반사적으로 방어했다.     


"굳이 해석하면 그런데 관용어로 자리 잡은 것이라 그렇게 바꿔 쓰시는 게 더 어색합니다 "     


그는 또 질문했다.     


"플로럴 프린트는 무슨 뜻이야?"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쉽게 말하면, 꽃무늬입니다. "     


그리고 조급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설마 그렇게 쓰실 건 아니죠? "          



플로럴 패턴을 꽃무늬라고 쓰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건 어렵사리 보그체로 완성한 내 기사에  4음보 시조를 얹는 느낌이었다. 물론 데일리백을 '매일 착용할 수 있는 실용적 형태의 가방'이라고 할 수도 있고 플로럴 프린트를 '꽃무늬'라고 거두절미 직역할 수도 있다. 올화이트 스니커즈는 그냥 '흰 운동화'이고, 하이 플랫폼은 '통굽' 네온은 '형광'이다.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게 쓰고 싶지 않았다. 느낌이 다르기 때문다.           


문제는 기사의 중요한 묘사들이 나랏말쌈이 정신으로 무장한 데스크나 어문교열팀의 프로들에 의해 고쳐질까 너무 신경 쓴 나머지 맨 마지막에 덧붙인 스타일리스트의 코멘트가 바뀌어 있는 것을 나중에 발견하고 말았단 거였다.  원래 내가 인터뷰한 스타일리스트의 조언은 “베이직한 아이템을 착장하고 액세서리에 포인트를 줄 경우 모던한 느낌을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던한 느낌’이란 구절이 '현대적인 느낌' 이라는 말로 고쳐져 있었다.     

 

생각해봤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모던한 것은 현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심플한 것이 깔끔한 것이라는 것, 니트한 것이 단정한 것이라는 것 따위의 단순번역으로는 치환되지 않는 어감의 차이가 있었다. 모던에서 현대로 건너뛰는 것은, 마치 최첨단 디지털 시대에서 산업화시대로 빨려 들어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갑자기 때앙볕이 내리쬐고, 모래바람이 부는, 개발도상국의 고속도로 건설 현장 한 복판에 서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스타일에 대하 논하며 튀어나온 '현대적'이란 말이 내게 주는 느낌은 그랬다. 그 말은 너무 웅장했다. 그러니까, 느낌이 달랐다.      


하지만 그 단어를 다시 '모던' 으로 바꿀순 없었다. '모던'이란 단어를 굳이 '현대적'이라고 고치고 있었을 누군가의 마지막 결기, 타협할 수 없는 비장함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손을 댔다가는 왠지 한 대 맞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몇 초 고민하다가 그냥 노트북을 덮었다. 데일리백과 플로럴을 받고, 모던을 내줬다. 완전히 진 게임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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