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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상 Sep 30. 2020

<테넷>에 관한 사소한 투정

영화 <테넷>

영화 말고 잠시 다른 이야기. <드래곤볼>의 작가인 토리야마 아키라는 자신의 만화에 인물들이 경주를 하는 내용을 그리면서 지인들과 누가 이길지 내기를 했다고 한다. 자신이 그리는 작품의 내용을 두고 내기를 했다는 게 웃기는 일이지만 아무튼 그 내기는 진행됐고, 결과는 황당하지만 작가 자신이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인물들의 성격을 고려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다 보니 결과가 자연스레 정해졌다는 것이 그 이유.


크리스토퍼 놀런의 <테넷>을 보고 토리야마 아키라의 이야기를 떠올린 건 다름 아니라 과정과 결과 간의 관계 때문이다. 토리야마 아키라의 이야기에서 결과는 연속된 현재들이 누적되어 도달한 자리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시간으로 보자면 미래라는 시제는 현재로부터 결정되는 것이다. 반면 <테넷>에서 미래(또는 결과)는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다. ‘할아버지의 역설’에 대해 이야기하며 주도자(존 데이비드 워싱턴)와 닐(로버트 패틴슨)은 미래에서 자신들이 사토르(케네스 브래너)의 작전을 막았기 때문에 현재에도 자신들이 살아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테넷>에서 현재 시제는 미래라는 결과물에 수렴해가는 과정으로, 앞서 토리야마 아키라의 이야기와 달리 결과가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관계가 된다.


과정보다 결과가 우선시된 까닭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테넷>은 크리스토퍼 놀런의 전작들에 비해 결과로 수렴하는 과정이 흥미롭지 않았던 영화였다. <테넷>이 놀런의 전작들과 완전히 다른 내용이나 구성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셉션>과 <인터스텔라>처럼 감독 자신의 상상력과 과학적 가설을 실제로 구현시킨 스펙터클한 장면이 여럿 등장한 것도 동일했고, <메멘토>처럼 관객들이 서사를 조립해가며 영화를 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 것도 동일했다. 다만 <테넷>은 전작들에 비해 덜 복잡한 플롯을 가졌는데, 여러 인물들을 여러 세계(시공간)에 배치하여 다중 플롯을 사용하던 전작과 달리 <테넷>은 마지막 시퀀스 외에는 줄곧 주도자의 시점으로 서사가 진행된다(물론 <메멘토> 역시 레나드(가이 피어스)라는 고정된 인물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지만, 10분마다 기억을 잊어버리면서 새로운 시퀀스가 시작한다는 점에서 <테넷>보다는 다른 작품들과 더 가깝다.).

 

주도자의 시점으로 서사가 진행된다는 것은 영화에서 작동하는 시간이 주도자가 지각하는 시간과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프리포트 시퀀스인데, 주도자가 회전문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미래서 온 주도자)과 격투를 벌일 때 우리는 주도자의 시점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지만 후반부에 이 장면이 반복될 때는 회전문에서 튀어나온 주도자의 시점으로 보게 된다. 다시 말해, <테넷>의 핵심이자 영화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주었던 인버전이란 개념은 주체가 지각하는 시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를테면 주도자가 회전문을 통해 과거로 가도 그를 제외한 대상들의 시간만 거꾸로 흐를 뿐 그의 시간은 원래대로 흘러가는 중이다. 그와 동시에 영화의 시간 역시 주도자의 시점을 따라 선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인물의 체감시간을 늘리거나 줄여가면서 다중 플롯을 만들던 전작과는 달리 말이다.


단순해진 플롯 때문인지 <테넷>은 마지막 시퀀스에서 기존의 놀런 영화와는 다른 곳으로 수렴한다. 언제부턴가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기시감이 들곤 했는데, 놀런의 영화들은 후반부에 다다를 때면 그의 전작들에서 봤던 것만 같은 연출과 효과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덩케르크>에서 세 가지 시간이 교차편집과 함께 하나로 수렴하고 그 위에 처칠의 연설이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얹어지는 마지막 시퀀스는 <다크 나이트>(그리고 <다크 나이트 라이즈>나 <인터스텔라>)의 마지막 시퀀스를 떠올리게 한다(모든 것을 혼자서 짊어진 채 달아나는 배트맨과 그(가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는 고든(게리 올드만), 배트맨을 뒤쫓는 경찰들의 숏이 번갈아 등장하고 그 위에 얹어지는 고든의 음성까지). 지금까지 영화를 구축해 온 모든 시공간들이 마침내 하나로 엮여나가며 일종의 감동을 발생시키던 그 방식이 어쩐지 <테넷>에서는 부재한다. 아니, 정확히는 비슷한 방식을 취했지만 그 효과는 동일하지 않았다. 스탈스크-12에서의 협공 작전 시퀀스에서야 영화는 주도자의 시점에 닐과 캣의 시점을 추가해 교차편집으로 서사를 진행시키지만 작전의 성공은 어쩐지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스탈스크-12의 시퀀스에서 교차편집이 놀런의 전작들과 달리 어떠한 감동도 발생시키지 못한 건 줄곧 주도자 혼자만의 시점으로 진행되던 영화에 닐과 캣의 시점을 욱여넣으려던 까닭이다. 생각해보면 <테넷>의 인물들은 관계를 형성하기보다는 주도자를 중심으로 구조를 만들고 있다(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영화는 공을 들여 설명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주도자와 닐, 또는 주도자와 캣처럼 말이다. 기존의 놀런의 작품에서 후반부의 교차편집이 효과를 발휘한 것은 각 인물들의 플롯들이 동등한 지위에서 유기적으로 맞물려서 엮여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넷>은 주도자의 시점을 중심으로 전체 서사가 진행되다가 일시적으로 보조적인 플롯이 생겨나 교차할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프리야(딤플 카파디아)를 죽이기 전 주도자는 자신이 테넷의 창시자임을 밝히고 그녀를 죽인 뒤 ‘임무 완수’라 말한다. 스탈스크-12의 작전에서도 말해지지 않은 ‘임무 완수가’ 언급된 이 장면이 <테넷>의 종착지다. 화면 안에는 지금까지 영화를 끌고 온 시점의 주인인 주도자뿐이다. 닐은 없고 캣은 프레임 밖에서 아들과 집으로 향해 가고 있다. 영화 속 미래가 정해져 있었다면 이 결과를 놀런은 이미 알고 있었을까. 지금까지 그가 <메멘토>의 구조를 변용한 작품들을 선보였다면, <테넷>은 <메멘토>에서 교차하던 서로 다른 두 시간대의 시퀀스를 마침내 하나의 프레임 안에 담아낸 작품이다. 하지만 프레임 안에 현재와 미래(또는 과거와 현재)를 같이 담아내면서 그는 그 시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선 고심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저 과거와 현재 사이를 그저 “일어난 것은 일어난 것이다.”라고 넘기고, 현재와 미래 사이를 ‘할아버지의 역설’로 설득하려 들뿐. 그래서일까. 그는 시간의 방향성을 계산에서 배제한 대가로 과정보다 결과가 앞서는 작품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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