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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상 Jul 15. 2020

내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에 보내는 위로

영화 <사라진 시간>

초희(이선빈)가 형구(조진웅)에게 자신의 아픔을 고백하자 형구는 그 어떤 동요 없이 그녀에게 위로를 건넨다. 자신도 그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고, 다들 어쩔 수 없다며 혼자만 그런 거 아니라고 말이다. 이 순간 형구의 모습이 낯선 까닭은 이 장면 직전까지 자신이 지금 꿈에 들어와 있다고 믿고 이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던 형사 박형구와는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 없이 페이드아웃 이후 영화의 첫 장면에서 보았던, 형구가 읍내 어딘가를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다시 한 번 페이드아웃과 함께 “참 좋다.“라는 형구의 대사로 끝이 난다. 갑작스러운 중단과 서사의 단절. 영화는 그 마지막 장면까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정확히 하지 않은 채 둘 사이에 놓인 미완의 봉합을 우리의 몫으로 남겨두고서 물러난다.


이토록 불친절한 결말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모호하게 남겨진 영화를 두고서 그 어떤 부분도 건드리기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생각을 전개해보자면 처음엔 영화의 마지막에서 반복되는 장면을 두고 이것이 단순 반복이라기보다는 수미상관 구조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앞뒤에 같은 장면을 배치함으로써 매듭지어진 두 세계, 현실과 꿈(또는 꿈과 현실)의 시간을 영화가 갈무리 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장면의 차이, 색의 유무와 마지막 장면의 경우 페이드아웃 이후에 들려오는 “참 좋다.”라는 형구의 대사를 두고, 오히려 장면의 반복을 통해 영화의 시간이 한정되는 게 아니라 그 이후로도 새로운 시간이 연장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영화의 첫 장면 이후 페이드아웃-페이드인이 <사라진 시간>의 본격적인 시간을 열었듯이 말이다.


한 가지 질문. 그렇다면 <사라진 시간>은 누구의 시간인가.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형구일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그 제목대로 사라져버린 시간, 러닝타임의 중간지점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자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돼버린 시간의 주인은 형구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형구는 시간의 주인일 뿐 자기 존재의 완전한 주인은 되지 못한다. 그는 후반부에서는 자신을 형사라 생각하지만 세계는 그에게 선생님의 역할을 부여하고, 반대로 전반부에서 그는 형사로 등장할 뿐 선생님으로서의 정체성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세계-내-존재로서 시간이 지나가는 공간이지만 문제는 자신이 던져진 세계에서 정확한 고정점을 갖지 못한 채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의 존재가 무엇인지 정확히 규정되지 않는 만큼 영화의 두 세계 또한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단언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 영화는 그 어떤 공백 없이 선형적으로 흘러가는 까닭에 어느 지점에 이르기 전까지는 후반부의 내용이 형구의 꿈이라고 믿게 만든다. 이를테면 형구가 해균(정해균)을 죽이지만 그가 멀쩡히 살아있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우리는 이 비현실적인 장면이 후반부의 내용이 꿈이라는 사실의 증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전반)-꿈(후반)의 도식은 정신과 원장과의 상담 장면에서 수정이 요구된다. 원장은 형구의 살인에 대해 망상(또는 상상)이라 말함으로써 우리가 비현실적 장면을 통해 구축한 현실(전반)-꿈(후반)의 도식을 흔들어버린다.


꿈과 상상에 대한 원장의 설명대로라면 <사라진 시간>은 형구의 시점에서 그의 의식 또는 무의식에서 발생하는 징후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사라진 시간>의 주인에 대한 질문의 대답이 형구라는 것에 이유기도 하다. 그러나 주인인 형구가 등장하지 않는 시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형구는 영화의 초반부에서 수혁(배수빈)과 이영(차수연)이 등장할 때는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그 둘이 화재로 죽은 다음에야 화면에 등장한다. 원장의 설명을 끌어온다면 형구는 욕망의 쓰레기인 수혁과 이영이 소각되고 나서 모습을 보인다. 후반부에서 형구가 수혁의 자리로 이동한다는 점에서 둘은 같은 자리를 점유하는 인물이다. 둘은 현실과 꿈처럼 하나의 프레임에 담기지 못하고 서로 다른 시공간을 점유한다. 그래서 형구가 술에 취한 밤, 그는 수혁을 마주치지만 어둠 속 형구와 불이 있는 방의 수혁은 각자의 쇼트로 분리되어 있다. 분명 그들이 있는 공간은 붙어있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행복했어요. 다 이해해요.”라는 말과 함께 수혁은 프레임에서 완전히 퇴장한다.


문제는 형구가 초희를 만났을 때 발생한다. 초희는 형구가 뜨개질 수업을 배웠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영화에서 뜨개질 수업을 배운 사람이 수혁이 아니라 이영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영 역시 수혁처럼 형구가 없는 프레임에 존재하는 인물이자 화재로 죽는 인물이다. 이로써 형구의 무의식 속 욕망이 수혁으로 이어진다는 일차적 도식은 이영을 추가함으로써 복잡해진다. 형구는 수혁과 이영이 없는 세계에서 수혁의 자리를 점유하기도, 또는 이영의 자리를 점유하기도 하면서 번갈아 자리 이동을 하는 것이다. 마치 밤마다 다른 귀신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이영처럼 말이다.


결국 <사라진 시간>은 주체의 자리가 핵심으로 보인다. 형구는 형사로 등장할 때는 수혁과 이영의 자리에 존재하지 못하고, 수혁과 이영의 자리를 점유할 때는 자신이 형사라고 생각한다. 그는 마치 라캉이 코기토(cogito ergo sum)를 비틀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이러한 주체의 자리 점유를 통해 영화는 프레임에 현재라는 시간을 담으면서도 다른 시간을 상기시키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우리가 영화의 후반부에 진행되는 내용을 보면서 자꾸 전반부에 보았던 내용들을 떠올리듯이 말이다. <사라진 시간>에서 현재의 쇼트란 다른 시간과의 연결가능성을 내포하는 상태로 존재한다. 이것이 내가 <사라진 시간>의 마지막에서 다른 시간의 가능성을 짐작케 한 까닭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두 번째 페이드아웃 이후 형구의 “참 좋다.”는 말이 들린다.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국어시간에 아이들이 입을 모아 읽은 교과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힘이 되고 힘이 되는 말. 형구가 중얼거리듯 한 이 혼잣말은 수혁이 학교를 돌아보며 혼자서 “참 좋다.”고 말하던 장면과 조응한다. 하지만 형구의 말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화면 위에서 들려온다. 이 대사에 오히려 바로 직전의 쇼트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장면과 동일하나 색이 돌아온 그 장면에서 형구는 어디론가 나아간다. 아마도 그는 그가 나아가는 곳에서도 역시 다른 시공간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아 헤맬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참 좋다.”는 그런 자신 그리고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위로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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