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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상 Aug 02. 2019

보름달이 되지 못한 반쪽짜리 세계에서

영화 <행복한 라짜로>

라짜로가 열병을 앓은 날 저녁, 창문 밖 하늘에는 인비올라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린 붉은 불빛, 그리고 보름달이 떠있다. 정황상 이 장면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정체모를 붉은 불빛이지만, 반달이 나타나는 직후의 쇼트는 오히려 보름달의 이미지를 환기한다. 보름달과 직후에 나타나는 반달. 하필이면 이 둘은 프레임의 동일한 위치에 놓여있는데, 그 까닭에 마치 보름달이 두 동강나는 것 같은 시각적 효과가 발생한다. 그렇게 영화는 보름달을 두 동강내어 그 절반과 붉은 불빛을 프레임 안에서 사라지게 하고 나머지 반달만을 화면에 남겨둔다.

   

반달만 남은 화면과 함께 인비올라타의 일상이 다시 시작된다.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전날 밤 자신들을 혼란에 빠뜨렸던 붉은 불빛에 관해 언급하는 장면이 없다는 것이다. 영화는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붉은 불빛의 존재를 무시하고 넘어간다. 이후 우리는 붉은 불빛이 바깥세계의 관측소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 붉은 불빛에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던 장면에서 우리가 본 건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공존하는 인비올라타와 바깥세상이다. 여기서 반달이 사라지자 인비올라타 바깥의 세상도 사라진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반달은 인비올라타와 도시라는, 같이 놓일 수 없는 반쪽짜리의 세계를 의미한다고.


공존할 수 없는 두 세계, 또는 두 세계의 이야기를 영화 안에서 하나로 묶어내는 건 경찰과 늑대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인비올라타에서 경찰과 늑대는 그 세계와 프레임 외부의 존재들로 경찰은 도시의 질서를 담당하는 역할을, 늑대는 인비올라타라는 세계를 가능케 하는 역할이다. 늑대가 인비올라타를 가능케 하는 존재인 건 마을사람들이 늑대가 두려운 까닭에 마을 안에 구속되기 때문이다. 구속을 통해 인비올라타라는 물리적 공간의 경계가 형성되고, 그 공간 안에서 노동의 착취가 발생한다. 그런데 이 경찰과 늑대가 프레임 안에 들어온다. 이는 곧 각 공간의 질서를 가능케 하는 대상들이 프레임을 경계로 서로 자리바꿈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는 안과 밖을 뒤집듯이, 누빔점의 역할을 하는 이 장면을 통해 인비올라타라는 세계를 도시로 뒤바꾼다.


생각해보면 인비올라타와 도시에서의 사건들은 반복적이다. 니콜라는 인비올라타에서나 도시에서나 착취의 대상을 선별하고, 라짜로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라짜로에게 일을 시키려 들며, 라짜로와 탄크레디는 같이 어울린다. 그러나 누빔점을 통과하며 반대로 뒤집힌 세계에서는 동일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결과를 얻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인비올라타에서 라짜로는 일을 위해 여기저기 불려 다니지만 반대로 도시에서는 일로부터 배제된다. 이는 각각의 세계에서 라짜로를 카메라에 어떻게 담아내는지에 여실히 드러난다. 담뱃잎을 수확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패닝을 해가며 라짜로를 화면 중심에 담아내는 반면, 도시에서 안토니아가 후작부인의 물건으로 사기를 벌일 때 라짜로는 프레임의 가장자리에 간신히 걸쳐져있다.


단절된 두 세계가 반복되는 이야기 속에서 차이를 발생시킬 때, 우리가 영화에서 보게 되는 것은 결국 다른 세계의 부재감이다. 인비올라타 사람들은 인비올라타에서는 도시라는 공간을 선망하지만, 도시에서 생활할 때에는 오히려 인비올라타를 그리워하곤 한다. 또한 우리는 인비올라타에서 보았던 마법적인 순간들을 도시에서는 다시 보지 못한다. 입으로 바람을 불었을 때 바람이 불어오던 장면은 더 이상 재현되지 않으며, 라짜로와 탄크레디가 함께 내는 늑대울음소리는 과거의 환상을 불러올 뿐이다. 영화는 하나의 세계만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거기에는 다른 세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영화 <행복한 라짜로>가 비극적인 것은 영화 속 두 세계의 단절이 시간 안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영화 속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 없듯이, 영화에서 도시에서 인비올라타로 돌아가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설령 물리적으로 돌아갔다 하더라도 이는 예전과 같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인비올라타를 가능케 하던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마치 슬퍼하기라도 하듯이 라짜로와 탄크레디가 인비올라타에선 달 표면을 닮은 땅을, 도시에서는 기찻길을 함께 걷는 장면에서 특별히 외화면 사운드를 사용하여 감상적인 연출을 한다. 이 장면에서 그들이 함께 걷는 장소는 현재 그들이 속해있는 세계의 가장 변두리지만, 동시에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곳이다.


다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보름달이 뜬 저녁에 라짜로는 열병으로 죽어간다. 이제까지의 내용들을 참고해 표현한다면, 조각난 두 반달이 동시에 뜰 때 라짜로는 죽어간다. 그건 인비올라타와 도시라는 두 공간이 공존하려할 때, 라짜로는 두 공간에서 각기 호명하는 착취의 대상과 노동에서 배제되는 대상으로 동시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두 반달이 사라진대도 마찬가지다. 세계 속에서 어떤 존재로도 자신이 규정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살아난 라짜로에겐 탄크레디와의 관계뿐이지만 그마저도 잃고 죽게 된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가능한 선택지는 완전하지 못한 반쪽짜리 세계들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늑대는 라짜로를 떠난다. 그리곤 마치 이 반쪽짜리 세계로부터 빠져나가려는 듯이 끊임없이 달리고 달린다. 그러나 영화는 프레임 밖으로 늑대가 빠져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저 늑대는 화면 한 가운데서 제자리걸음하고 있을 뿐이다. 불완전한 세계를 완전하게 만들려는 시도와 불완전한 세계로부터 빠져나가려는 시도 모두가 무용해지는 곳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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