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팬텀 스레드>
영화가 시작하고 총 러닝타임의 3/4 지점 정도에 도달했을 때, 레이놀즈와 알마의 결혼식 장면이 등장한다. 직전의 쇼트에서부터 시작된 배경음악은 둘의 결혼식 장면까지 연장되어 있고, 덕분에 영화는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서사에 있어서나 연출에 있어서나 레이놀즈와 알마의 사이는 이제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릴 것만 같다. 그러나 우리가 안심하려는 순간 영화는 의미심장한 쇼트를 결혼식 장면 뒤에 이어서 보여준다.
결혼식 장면이 끝나도 주례사의 성혼선언문 낭독은 이후 쇼트까지 들려온다. 이후의 쇼트는 결혼식 이후의 이야기로, 첫 번째가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끼리의 식사 쇼트, 두 번째는 신혼여행에서의 식사 장면이다. 성혼선언문은 신혼여행 장면에서 신부에게 키스하라는 말과 함께 끝난다. 그 순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둘의 키스가 아닌, 다소 게검스럽게 오트밀을 먹는 알마의 모습이다. 앞니로 수저의 오트밀을 긁어내듯이 식사를 하는 알마를, 레이놀즈는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다. 카메라가 레이놀즈만 찍고 있는데도, 알마의 오트밀을 먹는 소리는 화면 밖에서 날카롭게 침투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알마는 요란하게 빵을 잘라서 입에 넣고 먹기 시작한다. 신경질이 난 듯 고개를 돌려 한숨을 쉬는 레이놀즈의 쇼트를 마지막으로 식사 장면은 끝난다.
갈등극복 이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보편적인 서사구조와 달리 영화는 주인공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낭만적인 방향으로 진행되길 거부한다. 서사구조상 <팬텀 스레드>는 두 번의 갈등과 두 번의 극복으로 이루어져있다. 오히려 이 점에서 영화 <팬텀 스레드>는 사랑의 낭만적인 측면보다는 그 반대의 내용에 관심이 더 많아 보인다. 영화의 초점은 조화가 아니라 불화에 놓여있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영화는 이와 같은 구조로 불화의 서사를 전개해나가는 것일까. 영화 속 두 번의 갈등을 서로 비교분석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을 구하고자 한다.
결혼식 이전에 레이놀즈와 알마 사이의 갈등과 충돌을 일으켰던 것은 보이지 않는 수직적 권력관계이다. 이들의 사이는 알마의 표현대로 ‘기다림’이라는 단어로 설명이 된다. 레이놀즈는 알마에게 기다리라는 명령을 내리고 알마는 그의 말대로 그를 기다린다. 명령을 내리는 사람과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 간의 관계는 곧 권력관계이고, 수직적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는 비단 레이놀즈와 알마 사이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알마 외에도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인물들이 레이놀즈와 수직적 관계에 놓여있다. 그의 의상실에서 일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그의 드레스를 원하는 고객들까지도 레이놀즈와의 관계에서는 을의 자리에 위치한다.
영화에서 인물 간의 수직적 관계는 레이놀즈의 의상실(동시에 레이놀즈의 집) 계단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레이놀즈는 자신의 의상실 계단 위에서 직원들이나 자신의 고객들을 맞이한다. 영화의 초반부, 레이놀즈의 하루 일과와 의상실의 일정이 시작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계단의 난간을 따라 유연하게 움직이면서 직원들이 올라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직원들을 레이놀즈는 계단 위에서 한명씩 인사하며 맞이한다. 이는 드레스를 입어보러 온 고객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레이놀즈의 공간에서 남성상위-여성하위의 배치는 하나의 질서처럼 작동한다.
레이놀즈와 알마의 충돌은 남성상위-여성하위의 배치가 전복되면서 발생한다. 레이놀즈에게 깜짝 선물을 해주고 싶은 알마는 시릴과 직원들을 모두 의상실에서 내보낸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는 레이놀즈 그리고 그를 찍고 있는 카메라. 레이놀즈가 계단에 다가오는 것과 동시에 카메라는 천천히 각도를 올려서 계단 위에서 그를 기다리는 알마의 모습까지 화면에 포함시킨다. 그렇게 화면 속 인물들은 여성상위-남성하위의 배치로 서있다. 알마는 지금 단순히 계단 위라는 물리적 위치에 서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서있는 자리는 곧 레이놀즈의 위치로 집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수직적 관계 최상위이다. 레이놀즈와 알마의 뒤바뀐 자리로 인해 그들은 이어지는 식사자리에서 전쟁 같은 싸움을 하게 된다.
둘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은 알마에 의해 해결된다. (정확히는 알마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몸에 이상이 생긴 레이놀즈는 알마의 병간호 덕분에 쾌차한다. 그리고나서 그는 갑작스레 알마에게 사랑한다는 고백과 함께 청혼을 한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알마가 이전에 두 번이나 레이놀즈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다는 것이다. 레이놀즈의 고백은 앞선 알마의 두 번의 고백에 뒤늦은 응답에 해당한다.
결혼식 이후에 발생하는 갈등은 결혼식 이전의 갈등과 본질적으로 다른 원인에 의해 발생한다. 결혼식 이전의 갈등이 앞선 내용처럼 둘 사이의 수직적 관계가 전복되면서 발생했다면, 결혼식 이후의 갈등은 취향의 차이, 더 나아가 문화의 차이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영화에서 알마는 줄곧 레이놀즈와 취향에 있어서 차이를 드러낸다. 드레스의 원단에 대한 선호도를 가지고 서로 시비가 붙는다거나, 아스파라거스 요리방식에 있어서도 선호하는 방식이 다르다. 레이놀즈의 취향이 영국 상류층의 취향을 대변한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알마가 어느 문화에 속해있는지 알지 못한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알마에 관한 정보를 제시하지는 않지만 주어진 정보로 추측하건데, 알마는 유태인인 것으로 추측된다. 바바라 로즈의 결혼식 직전에 기자회견에서 유태인에 관한 질문을 하는 기자의 쇼트 이후 알마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는 쇼트에서 그녀의 표정은 불쾌함이 가득하다. 결정적으로 알마의 출신에 관한 이야기는 신혼여행 장면 직후의 파티 시퀀스에서 나온다. “난 인종차별 안 하지만 쟤네 나라에선 밤에 이상한 짓을 하는 관습이 있다던데...”라는 발티모어 부인의 대사가 바로 그것이다.
영화에서 주어진 정보로 알마의 인종을 맞추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결국 레이놀즈와 알마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이 문화적 차이에 의한 갈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화의 차이는 단순히 차이에 그치지 않고, 또 하나의 수직적 위계를 갖는다. 신혼여행 쇼트에서부터 영화는 레이놀즈와 알마 사이의 차이를 계속해서 보여준다. 오트밀을 먹는 장면에서 시작해, 산을 두고 레이놀즈는 밑에서 관조하는 반면 알마는 트래킹을 하러 가는 장면, 백개먼 게임의 장면 그리고 새해맞이 파티의 장면까지. 이 과정에서 레이놀즈는 자신의 취향을 알마의 것보다 고상한 것으로 생각하며, 반대로 알마는 레이놀즈의 취향을 불편하게만 받아들인다. 그들 사이엔 문화적 권력을 둔 갈등이 아직 남아있다.
마침내 둘 사이의 갈등이 폭발하게 되는 건 본 부인이 드레스를 입어보는 장면이다. 알마의 취향에 질린 레이놀즈는 결국 시릴에게 불편함을 토로하고, 이를 결국 알마가 듣고 만다. 여기서 알마는 디포커스 되어 흐릿하게 화면 후경으로 들어오는데, 동시에 전경에서는 레이놀즈가 그녀의 뒷담화를 하는 중이다. 레이놀즈의 진심이 드러나는 순간. 영화는 인물의 배치와 화면의 심도를 통해 인물 간의 거리감을 드러내고 있다. 결국 레이놀즈와 알마는 그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수직적 관계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그 까닭에 영화는 결혼식 시퀀스에서 키스장면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그 자리에 문제의 오트밀 식사 장면을 배치한 것이다.
제거된 키스장면은 두 번째 갈등이 알마와 레이놀즈 간의 충격적인 합의에 의해 극복된 다음에야 등장한다. 독버섯으로 만든 음식을 먹은 레이놀즈와 그를 바라보는 알마, 쇼트가 교차하며 알마가 먼저 자신의 진심을 이야기한다. 바닥에 쓰러지길 바란다는 알마의 진심. 레이놀즈의 손에 든 포크는 그의 오버숄더 쇼트에서 마치 알마의 목을 겨냥하는 듯하다.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하는 몇 번의 교차편집 이후, 레이놀즈가 말한다. “키스해줘. 쓰러지기 전에” 그제야 레이놀즈는 알마의 단독 쇼트로 들어와 키스를 한다. 그 어떤 수직적 구도도 거리감도 없이. 마침내 그들은 성혼을 완수한다.
두 번의 갈등과 극복의 과정에서 영화는 서로 다른 계층의 남녀가 사랑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관계에서의 권력을 두고 갈등하는 레이놀즈와 알마는 위계의 해체 또는 공존을 승인하면서 문제를 극복한다. 그러므로 이들이 마침내 이룬 성혼은 단순히 남녀의 물리적 결합이 아니다. 그들은 문화적 공존을 이뤄냈고, 그 완수를 키스로 선언했다. 이제 권력관계의 해체와 문화 간의 공존의 텍스트로서 <팬텀 스레드>가 있다.
특이한 점은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다. 영화의 배경은 1950년대 영국 런던으로 60년대 유행의 시대 직전에 자리한다. 다시 말해 영화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접어들기 직전의 시대를 보여주고 있다. 레이놀즈의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 그는 모더니즘 시대의 사람이다. 그는 유행이란 단어를 천박하게 여기고 옳은 것은 옳기 때문에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레이놀즈에게 지금 다수의 사람들이 좋아하면 그게 곧 옳은 것이 되어버리는 유행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영화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레이놀즈의 첫 고객인 헨리에타는 이미 다른 의상실로 다니기 시작했으며 다른 사람들 역시 그럴 것이다.
영화의 시대상은 이 텍스트가 내포한 주제와도 맞아떨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조라도 되듯이, 영화에선 중심과 주변의 관계 속에서 권력이 해체되고 있다.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팬텀 스레드>가 현재에도 무언가 의미를 던져준다는 것이다. 약 60년 이전의 시대상을 그리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스트롱맨’의 국제사회 출현에 대한 내용이다.
알마를 자신의 시골집으로 초대해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는 레이놀즈는 알마로부터 강한 척하는 것 같다는 말에 대답한다. “아니, 난 강해요.”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강하다고 말하는 남자. 분명 레이놀즈는 자신의 공간에서 강한 면모를 보인다. 직원들에게 명령을 주고 고객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드레스를 제공할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자신의 애인이 일과에 방해될 경우 내보내기도 한다. 그런 공간에 알마가 들어와 있다. 의상실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또는 레이놀즈와의 관계에서 그녀는 약자다.
권력자로서 남성과 그 공간, 그리고 그 공간에서 언제든지 추방당할 수 있는 약자로서 여성. (이 구조는 페미니즘적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관계를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본적 있을 것이다. 강대국과 약소국. 구체적으로는 트럼프의 미국과 미국 안에서 약자로서 살아가는 자들. 이 점을 들어 영화 <팬텀 스레드>가 최근 개방과 폐쇄를 두고 강대국들이 국제사회에서 벌여온 행태들을 알레고리로서 보여주고 있다 말하는 것은 너무 과장된 것일까?
영화의 감독인 ‘폴 토마스 앤더슨’은 전작들에서 줄곧 영화의 배경을 미국으로 하여 미국인의 불안에 천착해왔다. 그런 그가 <팬텀 스레드>에서는 영화의 전체 배경을 영국으로 옮겨갔다. 어쩌면 미국인으로서 현재 그가 느끼는 불안의 근원은 트럼프의 미국에도 기인하지만, 이제 미국이라는 공간 내부의 요인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개방과 폐쇄를 두고 다른 국가들에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를 우리는 하나 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영화 <팬텀 스레드>는 트럼프의 미국, 더 넓게는 스트롱맨들이 출현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국제사회에 대한 감독의 비평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