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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상 Mar 15. 2020

기억이란 정신의 물질화

영화 <지구 최후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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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기억의 가장 큰 차이는 영화는 가짜라는 것이다. 몇 개의 장면으로 구성된 가짜 세계! 하지만 기억은 진실과 거짓이 섞인 채 수시로 눈앞에 떠오른다.” (영화 <지구 최후의 밤> 중 뤄홍우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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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치원을 찾아 그녀가 일하는 술집에 도착한 뤄홍우는 잠시 시간을 죽이기 위해 영화관에 들어가 영화를 관람한다. 어두워지는 화면. 그 위에 영화의 제목인 <지구 최후의 밤>이라는 타이틀이 등장한다. 그 다음, 영화는 뤄홍우(와 관객들을)를 정체모를 시공간으로 데려다 놓는다. 그렇게 영화 <지구 최후의 밤>은 지금까지 진행된 내용과는 구분되는, 만약 영화를 1부와 2부로 나눠 부른다면 2부라 부를 수 있을 내용을 전개한다.


1부에서 2부로의 전개. 영화는 뤄홍우가 완치원을 찾아간다는 동일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1부와 2부 사이에 구분을 가능케 하는 게 있다면 그건 서사구조의 차이다. 1부에선 그 이야기가 현실과 과거 사이를 수시로 오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2부에선 정체모를 시공간 속에서 그 어떤 시간의 이동 없이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 차이점은 형식상의 극명한 차이로 연결된다. 1부가 숏 편집을 통해 현실과 과거의 장면을 번갈아 보여주고 있다면 2부에선 그 어떤 숏 편집 없이 장장 50여분에 달하는 롱테이크 쇼트가 등장한다.


1부와 2부를 하나의 키워드로 설명(또는 구분)한다면, 1부는 현재와 (뤄홍우의)기억, 2부는 꿈 또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전술했듯이 1부는 현실과 과거를 오가는 방식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이를 현재라는 시점과 과거의 기억이라 말하는 건 쉽다. 반면 2부를 꿈 또는 영화라 하는 건, 1부의 마지막 영화관 장면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뤄홍우의 앞뒤로 앉은 사람을 볼 수 있는데, 한 명은 영화를 볼 준비(3D 안경을 착용)를 하고 있고 다른 한 명은 이미 잠을 자고 있다. 이처럼 영화를 보는 자와 꿈을 꾸는 자를 배치하여 영화는 2부의 정체가 꿈인지 영화인지를 불분명하게 만든다.


여기까지 전개된 내용이라면, 다소 도식적이긴 하지만 1부는 현실과 기억을, 2부는 꿈 또는 영화를 다루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영화 중 뤄홍우의 대사(1-1)를 적용한다면 이 평면적인 도식은 보다 복잡해진다. 1부의 기억에 관한 쇼트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영화에서 뤄홍우가 환각이라 부르는) 거짓인지 진위여부 문제가 결부되며, 2부의 내용은 그 정체가 꿈인지 영화인지에 따라 가짜 세계에 관한 것이 될지 아닐지가 결정된다. 기억과 꿈은 이미 영화사에서 많이 사용된 소재다. 그럼에도 <지구 최후의 밤>은 이제는 진부해져버린 그 소재들을 사용하면서, 기억과 환각 사이 그리고 영화와 꿈 사이에 불분명한 경계를 만들어냄으로써 새로운 영역의 발견을 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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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차이를 갖는 1부와 2부는 마치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는 작용을 한다. 마치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처럼, 1부에서 등장했던 것은 2부에선 다른 무언가로 바뀌어 등장한다. 이를테면 2부에서 뤄홍우를 도와 오토바이를 태워주는 아이는 1부에서 완치원이 지운(낙태한) 아이 또는 뤄홍우가 기억하는 백묘를 떠오르게 하고, 당구장의 카이전은 완치원의 모습을, 광장의 붉은 머리 여성은 백묘의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서 나타난다. 여기에 1부에서 백묘가 허탕을 치고 돌아온 날이면 먹었다던 사과, 주문을 외우면 회전하는 집, 심지어 뤄홍우를 버리고 간 어머니의 이야기까지 다시 등장하는 것을 우리는 2부에서 볼 수 있다.


마치 새판을 짜듯이 1부와 2부 사이에 연결고리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달리, <지구 최후의 밤>에선 뤄홍우의 존재를 1부와 2부에 동일하게 남겨둔다. 그로 인해 영화의 1부와 2부는 뤄홍우를 매듭으로 하나로 묶이게 되는데, 이는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뤄홍우를 누빔점으로 1부와 2부를 겹쳐보도록 만든다. 뤄홍우의 개인적인 경험을 다룬 1부와 뤄홍우의 꿈 또는 그가 지금 보고 있는 영화 사이에 애매하게 놓인 2부. 나는 이 둘을 하나로 매듭짓고 또는 겹쳐보기 위해선 단순히 그 매듭을 뤄홍우라 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뤄홍우의 무의식이다.


뤄홍우의 무의식. 이건 2부의 내용이 뤄홍우의 꿈이라 했을 때 당연하게 연결되는 지점일 것이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을 해석하기 위해 꿈이라는 비물질적 대상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가. 그러나 2부가 1부의 마지막 장면에서 뤄홍우가 보게 될 영화라고 한다면, 영화관에 앉아있는 뤄홍우가 어떻게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영화에 출연하는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선 푼크툼의 개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2부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스크린 위에 영사되는 영화가 아니다. 그건 뤄홍우의 경험과 무의식을 거쳐 지금 그의 내면에 영사되고 있는 영화인 것이다.


2부의 내용이 뤄홍우의 무의식으로 재구성된 영화라면, 그건 그 정체가 꿈이든 영화든 상관없이 뤄홍우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징후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1부에서 제공된 정보를 해석 틀로 사용함으로써 2부를 바라보게 된다. 개인의 무의식을 거치면서 재구성된 영화. 그렇다면 영화에 대한 뤄홍우의 대사(1-1)는 수정되어야만 한다. 영화는 몇 개의 장면으로 구성된 가짜 세계지만, 저마다의 관람 속에서 진실의 편린을 품은 하나의 텍스트가 될 수 있다고.



결국 <지구 최후의 밤>은 영화가 상상과 실재 중 정확히 어느 편에 서있는지가 중요한 건 아닌 듯하다. 동시에 이는 뤄홍우의 대사(1-1)에서 언급되는 기억에도 유사한 질문이 가능해진다. 뤄홍우의 기억 중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정확히 하는 것이 중요한가, 라는 질문을 말이다. 뤄홍우의 말대로 그의 기억은 진실과 거짓(또는 환각)이 혼재해있다. 그리고 이 기억들은 수시로 눈앞에 떠오르듯이 현실 시점의 장면들 사이에 틈입한다. 마치 뤄홍우의 여정에 따라서 우리가 보게 되는 과거 시점의 장면들처럼 말이다.


과거 장면을 전부 뤄홍우의 기억이라 동일하게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 장면들을 뤄홍우의 기억으로 볼 경우 잉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백묘가 줘홍위안에게 살해당하는 장면과 백묘의 시체를 갱도에 처리하는 장면은 뤄홍우의 기억에 해당하지 않는다. 또한 어떤 장면들은 기억 속 주체가 뤄홍우인지 백묘인지 불명확하게 만들곤 한다. 뤄홍우가 완치원을 기차에서 미행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백묘가 뤄홍우 대신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되고, 백묘가 사과를 통째로 먹는 장면에서는 이를 언급하는 문장에 누가 사과를 먹는 것인지 설명하는 주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결국 과거 장면들은 기억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여도, 그 기억 속 행위의 주체만큼은 불분명하게 남겨진다.


진실인지 환각인지 알 수 없고 그 주체도 불분명하지만, 뤄홍우의 기억들 중 완치원과 관련된 기억만큼은 현재의 뤄홍우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영화는 완치원과의 기억을 물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다루는데, 공식처럼 현재 시점의 장면에서 흐르는 물이 등장하면 완치원과의 기억이 따라붙곤 한다. 뤄홍우가 고장 난 트럭을 밀고 터널을 지나는 장면에서 빗물이 화면을 가리더니 영화의 시점은 순식간에 과거로 넘어간다. 뿐만 아니라 뤄홍우가 교도소에서 완치원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화면 후경에선 벽을 타고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역시 그 장면 직후엔 완치원이 등장하는 장면이 따라붙는다. 영화 속 물이 화면 밖에서 안으로 흐르듯이, 완치원과의 기억 또한 화면 밖에서 안으로 불려온다.


물은 현재 장면에서 흐르는 상태로 제시되지만 기억의 장면에선 잔잔히 고여 있거나 어딘가에 담겨있다. 이를테면 뤄홍우와 완치원이 사랑에 빠져 서로 키스를 하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이동하여 보여주는 물처럼 말이다. 명심해야 될 건 숏의 순서가 현재 장면 다음에 과거 장면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과거 장면에서 등장한 물이 현재 장면으로 흐른다는 게 아니라 그 흐름이 반대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의 흐름은 프레임 밖에서 안으로 흘러와 고이게 된다. 이걸 기억으로 치환한다면, 기억은 현재 시점에서 불려와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바라보는 과거의 기억은 그 기억의 진실성을 보장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회상의 주체와 회상의 시점에 따라 기억의 왜곡 가능성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이를 의미하듯 영화는 화면 속 대상을 똑바로 바라보기보다는 무언가에 한번 걸쳐서 바라본다. 예를 들어 거울에 반사나 유리 너머로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영화는 무언가를 본다는 행위, 더 나아가 기억을 떠올려 보는 것에까지도 왜곡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이 지점에서 기억은 뤄홍우의 말대로 진실과 거짓이 섞여있는 것이 된다.



5

요약하자면 <지구 최후의 밤>의 줄거리는 고향 카일리에 돌아온 뤄홍우가 자신의 옛 연인 완치원과 사라진 기억들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는 지금 얼굴도 나이도, 심지어 함께 했던 기억도 나지 않는 여인을 찾아가는 것이다. 뤄홍우가 완치원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그녀를 찾아왔을 땐, 그녀는 이미 그 자리를 떠나고 없다. 1부의 내용은 이 끊임없는 미끄러짐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 시작하는 2부. 뤄홍우는 완치원을 만나기 위해 이 정체모를 장소에서 빠져나가고자 한다. 다행히 뤄홍우는 동굴에서 만난 아이와 당구장에서 만난 카이전의 도움으로 출구를 찾는데 여기서 갑작스레 그 탈출을 지연시킨다. 카이전의 노래를 듣고 싶다는 핑계로 말이다. 카이전은 완치원을 찾아가라며 뤄홍우를 밀어내고 계단을 올라 광장으로 이동한다. 카메라는 카이전이 계단을 오르는 장면을 프레임 안에 발만 담는 방식으로 찍었다. 우리는 이 장면과 똑같은 방식으로 촬영한 장면을 몇 분 후 보게 된다. 이 장면에서 계단을 오르는 주체는 바로 뤄홍우다. 시간차를 두고 반복하는 장면을 통해 뤄홍우와 카이전 사이에는 시간적 거리감이 발생한다.


1부와 마찬가지로 2부에서도 뤄홍우는 자신이 찾아가는 여성보다 뒤늦게 도착한다. 그러나 2부에선 그 사이에 놓여있는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촬영된 동일한 행위가 반복되기까지, 롱테이크로 촬영된 영화는 광장을 중심으로 마을을 크게 한 바퀴 돌아 뤄홍우를 방금 전 카이전이 오르던 계단으로 데려다 놓는다. 그 사이에 뤄홍우는 거절을 연속적으로 경험한다. 그는 카이전에게 거절당하고, 광장에서 붉은 머리 여성을 따라가 그녀를 도와주지만 선물로 준 사과는 거절당한다. 그리곤 그는 백묘가 그랬듯이 사과를 통째로 먹어버린 후, 계단을 올라 카이전과 다시 만나게 된다.


계단에서 시작해 다시 계단으로 돌아오는 이 과정을 영화는 원의 운동으로 그려낸다. 시간 차이를 두고 벌어지는 술래잡기 같은 이 운동을 가능케 하는 건 뤄홍우의 욕망이다. 뤄홍우가 1부에선 완치원 한 명 만을 찾아가는 반면 2부에선 카이전과 어머니를 연상케 하는 여성 둘을 따라간다. 하지만 사실상 사람의 숫자는 무의미하다. 고장 난 시계에서 찾은 얼굴 부분만 훼손된 사진처럼, 욕망의 대상은 고정적인 주인을 갖지 않은 채 서로 유사한 객체들로 그 구멍을 메우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뤄홍우는 그 사진을 완치원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어머니와 그녀가 닮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 구멍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해당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메워지지 않는 그 구멍 자체, 그리고 그 구멍에서 뤄홍우가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행위이며, 영화는 이를 원을 그리며 뤄홍우를 자꾸만 같은 자리로 데려오는 중이다.


뤄홍우가 자꾸만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1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의 행위는 완치원의 행방을 찾고 그녀가 있다는 장소에 도착하지만 그녀는 이미 그곳을 떠나고 없다. 이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뤄홍우는 완치원이 이미 떠나고 없는 곳으로 자꾸만 돌아온다. 결국 뤄홍우는 영화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완치원과 만나지 못한다.


 

6     

하지만 2부의 마지막에서 뤄홍우는 카이전과 회전하는 집에서 키스를 한다. 아마도 누군가는 이를 두고 뤄홍우가 결국 완치원과 만난 것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장면과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진다. 만약 카이전과의 만남이 완치원과의 만남과 동일한 것이라면 슬픔이 느껴질 이유는 없지 않은가. 완치원과 카이전은 동일한 인물이 아니라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결국 카이전과의 만남에도 뤄홍우는 완치원과의 만남을 완료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마지막 장면에서 느껴지는 슬픔은 무언가 다른 것을 설명하기를 요구한다. 아마도 그건 2부의 내용이 끝나도, 그러니까 2부의 내용이 꿈이라면 그 꿈에서 뤄홍우가 깨어나고, 아니면 그 영화가 끝나고 뤄홍우가 완치원을 만날 수 있을지, 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슬픔은 결국 2부가 끝이 난 후에도 뤄홍우는 완치원을 만나지 못할 것만 같은 불안감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이 불안은 뤄홍우가 그의 무의식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한 어떤 정신적 영역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영역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그건 2부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뤄홍우가 자꾸만 탈출을 미루기 때문이다. 카이전은 대놓고 이 공간을 감옥이라 표현하며, 그 탈출구의 문은 1부의 교도소 면회 장면에 등장하는 문양과 동일하다.


1부에서 등장하는 소재가 2부에서 다른 성질의 무언가로 재등장한다고 했듯이, 이 정신적 영역은 결국 뤄홍우의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에 상관없이, 심지어 회전하는 집의 이야기가 나오는 초록색 책마저도 말이다. 그리고 이 정신적 영역은 뤄홍우의 꿈이나 그가 보는 영화에 발현된다. 2부가 꿈이라면 그건 영화의 첫 장면에서 뤄홍우가 말하는 사라진 여인의 꿈과 같을 것이고, 만약 2부가 영화라면 그건 완치원이 포멜로를 먹으며 뤄홍우와 함께 보았던 영화와 같은 감상으로 이어질 것이다. 마침 2부가 끝나고 영화의 클로징에서 나오는 노래는 Naoko Ken의 ‘アザミ嬢のララバイ(번역하자면 ’엉겅퀴양의 자장가‘)’인데, 이 노래는 뤄홍우와 완치원이 함께 보는 영화의 클로징 곡으로 등장한다.


오랜만에 자신을 찾아온 뤄홍우에게 백묘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산사태가 뭐가 무서워? 기억 속에 사는 게 진짜 무섭지.” 기억 속에 사는 것. 아마도 앞서의 정신적 영역에 대한 정의는 저 대사로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기억이라는 정신. 영화 <지구 최후의 밤>은 순간이지만 영원에 걸쳐 영향을 미치고, 또 영원에 걸쳐 구속이 이어지지만 한 순간이면 떠오르지 않는 것으로서 기억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순간의 영원 또는 영원의 순간. 이 모순된 표현을 보여주듯, ‘잠깐’을 의미한다는 폭죽은 마지막 장면에서 끝날 듯 끝나지 않은 채로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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