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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보씨 May 31. 2021

손으로 하는 독서

필사, 손의 고행으로 얻는 것

"어찌케 좋은 건 나 하나도 안 닮았으까."


어머니는 늘 우리 형제를 보며 말씀하셨다. 최진희를 좋아해서 <사랑의 미로>를 틈날 때마다 따라불렀던 어머니의 노래는 최진희의 그것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 그녀는 종종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촌구석에서 나고 자라서 그라제, 안 그랬으면 가수가 됐을 건디."


어머니의 저 말이 흰소리로만 들리지 않았을 정도로 당신의 노래솜씨는 훌륭했다. 하지만 나는 불행히도 어머니의 노래솜씨를 온전히 물려받지는 못했다. 박자 감각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 외의 다른 노래 재주는 나에게는 없다.






또 한 가지 어머니를 닮지 않아 유감인 것은 글씨체다. 어머니의 글씨는 지금껏 세상에서 본 어떤 사람의 글씨체보다 호방하고 아름답다. 어머니의 글씨체가 워낙 눈에 띄는 탓에 나는 대번 당신의 글씨를 알아볼 수 있다. 국민학교 5학년 때였던가. 내가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것을 눈치챈 것도 바로 선물 위에 놓여진 산타클로스의 쪽지 때문이었다. 쪽지의 보낸 이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라고 씌어 있었지만, 어머니는 왼손으로 글을 쓰거나 해서 내가 산타클로스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하게 만들 만큼의 센스는 없으셨던 듯하다.


그런 어머니의 글씨를 보고 자란 탓에 내 글씨체를 볼 때마다 자괴감이 들었다. 어쩜 이리도 악필일까.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손글씨에 컴플렉스를 갖게 됐다. 남들이 내 글씨를 볼 때마다 흉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요즘은 많은 글쓰기를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으로 대신하기에 손으로 글씨를 쓸 일이 어렸을 때보다 적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늘 내 글재주의 부족함을 한탄했다. 책을 읽다가 아름답고 훌륭한 문장들을 보면 감탄과 동시에 내 글이 떠오르면서 얼굴이 빨개졌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필사'이다. 훌륭한 글들을 베껴쓰다 보면 나도 그네들처럼 훌륭한 글을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컴퓨터로 옮겨볼까 했으나 노력이 있어야 결실이 있듯이 육체의 고통이 있어야 그 열매가 달 것 같아서 손으로 직접 베껴쓰기로 마음먹었다. 덤으로 악필까지 교정해 볼까 싶어 처음에는 연필로 베껴썼다.



하지만 흑연을 마모시켜 글씨를 쓰는 연필의 특성상 손목에 힘을 많이 줘야 하니, A5 사이즈의 노트 서너 페이지 정도를 쓰고 나면 손가락, 손목, 어깨가 동시에 비명을 질러댔다. 손가락과 손목의 통증이라도 줄여보기 위해 연필꽂이에서 한동안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던 만년필을 꺼내들었다. 4~5년쯤 전에 김승옥 작가의 단편소설들을 필사하려고 샀다가 시들해져서 연필꽂이에 꽂아놨던 것이다. 만년필을 사용하고 나니 손가락과 손목에 힘을 덜 주게 되어 확실히 통증은 다소나마 줄어들었다.


어떤 필기구로 쓰든 간에 필사는 손의 고행이다. 굳이 오른손을 고생시켜서 얻는 나의 문장력은 얼마나 좋아질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연히 느껴진 바는 눈으로 책을 읽을 때에 비해 글의 구석구석에 담긴 작은 의미들까지 정밀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눈으로 읽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인다고나 할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이 손목의 뻐근함, 어깨와 손가락의 통증과 맞바꾼 깨달음이다.






일단 당장의 목표는 김훈 작가의 <자전거 여행> 1권 전체를 베껴써 보는 것이다. 김훈 작가의 글은 어려운 어휘나 형이상학적 표현이 거의 없이, 일상적 어휘와 단문 위주의 문장만으로 쉽게 읽히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한다고 생각하기에 그의 문장을 배우고 싶다. 그도 원고지에 연필로 글 쓰는 방식을 지금까지 고수한다고 한다. 그래서 오른팔의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묘한 동질감을 떠올리며 혼자 피식 웃기도 한다.


한 권의 책을 다 베껴썼다고 해서 훌륭한 작가의 문장력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는 없을 게다. 하지만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의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으셨듯이 나도 오른손의 고행 끝에 아주 작은 한 가지라도 배울 수 있으리라 믿으며 오늘도 책상 맡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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