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우리가 대체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 있다면
추석 연휴 때 <어쩔 수가 없다>를 보았다. 무척 재미있게 보았는데, 계속 잔상으로 남는 것은 치밀한 살인을 저지르는 이병헌의 모습도, 그의 우스꽝스러운 춤도 아닌 마지막 제지 공장에서 기계를 제외한 유일한 인간으로서 그가 마주하게 되는 현실이었다. 그는 결코 그 안에서 행복할 수 없지 않았을까. 스스로 이동하는 로봇들 사이에서 춤추듯이 피해 가는 그의 엇박자 걸음 속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 와닿고 소름이 돋았다. 5년 뒤, 10년 뒤 우리에게 남겨질 일들은 어떤 것들일까?
합정 매장이 리뉴얼하여 오픈했다. '14년도에 오픈한 합정 매장은 이제 만 11년 반 된 매장이다. 원래 주류창고였던 그곳은 어두운 창고형 공간의 느낌을 갖추고 있었고, 아주 오랫동안 그 무드를 간직해 왔다. 새로운 합정의 모습은 훨씬 밝아졌다. (예전에는 브루클린에 있는 잔뜩 힘준 쇼미 더머니의 형 같았다면, 지금은 따뜻하고 중성적인 매장이 되었다.) 외벽을 유리로 터서 햇볕을 그대로 받게 하고, 바깥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천정이 있는 야외형 좌석도 늘어나 반려동물과 함께하기 더욱 좋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의 간격이 좁아져서 바리스타와 이야기 나누기 더 편해졌다.
비가 그친 연휴날, 우리 가족도 합정에 오전 나들이를 나갔다. 쌀쌀할 줄 알았던 날씨가 화창하게 개었고, 햇볕을 쬐며 당인리의 길을 바라보았다. 외부 좌석에는 맨발로 볕을 쬐며 책을 혼자 읽는 고객도 있었고, 종종 댕댕이들이 물을 마시고 지나갔다. 덥다고 생각하던 와중, 합정 매장에서 많이 만나 뵌 바닐라 라떼 테이크아웃 고객을 마주했다. 반가운 인사를 남기고 벤치에 앉아, 우리가 하는 일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하는 업은 미래에 어떻게 변해갈까?
기능적으로 소비하는 커피는 이미 대체되어가고 있다. 편의점에서도 수많은 커피 옵션을 만날 수 있고, 이미 로봇이 내려주는 커피부터 자동머신으로 만날 수 있는 커피는 정말 옵션이 많다. 반면 카페라는 공간이 주는 기능은 비단 좋은 커피를 주는 것에만 머무르진 않는다. '머무르고 싶은 공간'에서, 나의 시간을 쌓아간다. 책을 보는 시간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시간일 수도 있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고, 바리스타와 인사를 나눈다. 바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좋은 하루를 보내길, 서로 작게나마 바래준다.
머무르고 싶은 좋은 공간, 바리스타의 환대, 그리고 좋은 커피. 바리스타의 환대도 기능적으로 AI가 대체할 수 있을까?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것이 '기능적인 서비스' 수준의 무엇인가라면, 물론 대체가 가능하다. 하지만 얼굴을 알고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는 누군가라면 쉽사리 대체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전에 매장 고객들과 더 이야기를 자주 나눌 때 들었던 말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그날 우리 매장에서 마신 커피가 하루에 있었던 일 중 가장 기분 좋은 일이었다는 이야기였다. 무엇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속에서, 따뜻한 환대와 좋은 커피가 있는 곳에서 잠시 마시고 가는 커피가 그날의 가장 기분 좋은 일이었다고. 일상이 신나는 일 투성이었던 20대의 나는 그걸 마음 깊이 이해하진 못했지만, 지금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이 주는 단단한 안정감에 대해서도 공감한다.
윌 구이다라의 책 '놀라운 환대'에서 작자는 환대에 대한 인상적인 코멘트로, '서비스는 무채색, 환대는 유채색'이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 팀 만이 줄 수 있는 더 특별한 환대를 만들고 싶다. 자주 반복되는 일이어서 특별할 게 없어 보여도, 매일매일 특별한 순간을 만들어갔으면 한다. 이름을 더 자주 이야기해 주었으면 좋겠고, 고객의 이야기를 더 공감했으면 한다. 걱정과 불편함을 없애주고, 기대하지 않았던 더 큰 무언가를 주었으면 한다. 이 모든 것이 관계로 남아, 고객과 친구가 될 수도 있으면 좋겠다. 온라인으로 만나는 고객도, 원두 공급처로 만나는 B2B 고객도. 올해의 남은 4분기 동안, 더 잘 만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