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딸이 대학을 졸업했다. 지난 6월쯤인가 졸업식 날짜가 정해졌다고 하면서 첫째 딸이 어느 때처럼 짧은 문자를 보내왔다. 아직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아서 당시에 별로 감흥이 없었다. 첫째 녀석은 이미 마지막 학년의 강의, 과제 그리고 시험을 다 마무리하고 회사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고 있었던 터라 졸업식만 남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런지 분위기는 이미 졸업하고 졸업장만 받으러 졸업식에 가는 듯했다.
아내에게 12월 6일에 졸업식이니까 미리 스케줄 비워 놓고 있으라고 짤막히 말하고 그 문자는 수많은 다른 문자에 자연스럽게 스크롤 바 아래로 한참으로 내려갔다. 그러다가 몇 주 전에 첫째 딸이 다시 리마인드를 시켜 주는 바람에 부랴 부랴 정신을 차리고 선물 준비, 입고 갈 옷들을 골라보고 회사에 휴가도 신청하고 준비를 마쳤다. 그러면서 정말 그날이 오기는 오는 구나라고 생각했다. 사실 12월 6일 그날은 나의 생일이기도 하다. 참 우연이다라고 생각했다. 까먹지 말라고 하나님이 정해 주셨나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내 생일이라서 날짜를 까먹지는 않았다.
호주는 12월이면 여름이다. 나의 유년 시절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 졸업식은 언제나 늘 추운 겨울이 있다. 낡은 사진 앨범에 아직도 당시 나와 나의 가족 옷차림은 두꺼운 외투에 목도리를 칭칭 감고 있는 모습이다. 12월 6일 아침. 날씨 앱을 체크해 보니 낮기온이 최고 32도라고 했다. 만만치 않게 더울듯싶었다.
졸업식장으로 가는 동안 옛날 생각이 났다. 2008년 너무 어린 녀석들을 데리고 아무도 없는 나라에 왔다. 아내와 나는 어른이라고 치더라도 당시 첫째 녀석이 7살이고 둘째가 5살이었다. 첫째는 오자 마자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했는데 아직도 첫날 낯설고 두려움으로 교실에 들어갈 때까지 젖은 눈으로 나를 계속 쳐다보던 첫째 딸의 얼굴이 생생하다.
그랬던 녀석이 어느덧 대학교를 졸업한다고 하니 참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내 몸과 머릿속 구석구석을 자극하고 지나갔다. 다행히 호주 교육 시스템은 학생들에게 공부로부터 많은 자유를 주고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 주었기에 생각보다는 잘 적응하고 좋아했지만 첫째 딸에게도 오르막 길이 없지는 않았다. 그 길었던 울퉁불퉁한 길들을 걸어가는 동안 때로는 뒤에서 가끔은 나란히 또 어떨 때는 나 혼자 앞에서 먼저 걸어가면서 손을 내밀기도 했다. 부모의 노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그 길에 포기하지 않고 혼자 스스로 마지막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첫째 녀석은 무척 내성적이다. 감정적이고 생각이 늘 많다. 그렇지만 항상 강했다. 스스로 동기부여도 주고 남들과 어울리는 삶을 늘 좋아했다. 내가 낳은 첫째 자식이라서 그랬는지 몰라도 키우는 내내 나의 어릴 적 시절과 참 비교가 많이 되었다. 그리고 첫째 녀석은 무엇보다도 부모가 어떤 존재인지를 많이 느끼게 해 주었다.
졸업식 전날 밤. 문자가 왔다. 첫째 녀석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긴 문자였다. 그동안 감사했고 덕분에 여기까지 잘 견디고 버티고 잘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고 했다.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다.
첫째 녀석은 늘 감사에 대한 표현을 잘했다.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상관없이 어릴 적부터 늘 고맙고 감사한 것에 대해서는 늘 직접적으로 표현을 잘했다. 그래서 아내는 특히 그런 것을 참 좋아했다. 사실 지난달 주일 예배에서 목사님이 설교 중에 "감사함은 표현해야 사랑이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참 좋다고 생각했는데 첫째 녀석이 그렇게 표현을 해 주니까 정말 사랑이 느껴졌다.
당연히 졸업식의 주인공은 첫째 딸이다. 하지만 첫째는 문자를 통해 자신을 훌륭한 주인공으로 만들어준 것은 훌륭한 연출자 (아내와 나) 덕분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이룬 모든 것들은 아내와 나의 정성, 기도, 희생 그리고 서포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딸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그 문자를 없었더라면 그냥 평범한 졸업식 그 이상의 감정들은 없었을 수 도 있었다. 그런데 그걸로 인해 다음 날 졸업식 내내 우리 가족들은 행복했다. 그렇게 표현된 감사는 사랑으로 변해서 아내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우리는 호주에 가족이 없다. 딸랑 우리 가족들 뿐이다. 부모님, 동생, 언니 등등 모든 가족들은 다 한국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이민 와서 참 많은 일들이 많았었다. 하지만 첫째 녀석이 보내 준 그 문자는 우리 가족이 겪어야만 했던 그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의 일들은 더 이상 아픔과 힘듦이 아니라 사랑으로 변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딸의 그 문자가 참 고마웠다.
우리는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이 감사를 표현하면서 살고 있나. 아버지에게 엄마에게 형에게 아니면 동생에게 그리고 가까운 친구 또는 동료들에게 말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감사함을 그저 마음속으로만 간직하는 것이 그저 미득이라고 배우고 알고 있으리라 감히 생각한다.
솔직히 나도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고 내 주위의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수록 감사함은 무조건 어떤 식으로라도 표현을 해 주어야 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문자 한 통, 카톡 메시지라도 좋다. 전화를 걸어서 직접 말로 하면 더 좋다. 그것이 상대에 대한 사랑이고 존중이다.
당장 다가오는 연말에 감사함을 표현해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