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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보 Dec 21. 2019

'더 맑아져 꽃이 되겠지'(최남수 디카시집) 출간

프롤로그 + 에필로그 + 추천사

프롤로그

시작은 자전거였습니다. 계절과 시간을 가리지 않고 한강 라

이딩을 했습니다. 마음의 ‘분리수거’를 하기 위해서. 아름다운 

풍경이 시선에 포착됐습니다. 사진기를 잡았습니다. 그러다 

마음에 고이는 어설픈 시심을 사진에 얹어보았습니다. 디카시

를 쓰게 된 동기입니다. 가슴의 렌즈로 사진을 찍고, 그 위에 

시를 덧칠해온 열매가 이번에 출간하는 첫 시집 <더 맑아져 

꽃이 되겠지>입니다. 어설픈 시와 사진을 내놓는다는 게 부끄

럽습니다. 사진과 시는 저에게 삶의 ‘처마 밑’입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칠 때 이 처마 밑으로 피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에게 첫 시집을 드립니다. 부족한 시를 흔쾌히 세상에 내주신 

출판사 관계자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19년 12월

최남수 

에필로그

'성취'에서 '의미'로

“삶은 뒤가 아니라 앞에 있다””진정한 느림은 포기를 포함한다” 온몸을 던져 실크로드를 걸었던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나는 걷는다'에서 한 말입니다. 저에게 묵직한 울림을 주었습니다. 자주 걷습니다. 사색하고 끄적거려봅니다. 마음의 렌즈가 움직이면 셔터를 눌러 풍경을 담습니다. 보도사진 작가 마크 리부는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고 사진에 담는 것은 시를 읽거나 감상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결국 시와 사진은 가슴에서 발원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미리 알고 한 건 아니지만 공교롭게 제 삶과 생각의 접점이 사진과 시에서 만났습니다. 어설프지만 시심과 이미지는 저에겐 '뒤'를 지워나가는 지우개 같은 도구였습니다. 이제 한결 시선과 발걸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외길만 있는 줄 알았던 착시도 깨트려졌습니다. 삶의 노선이 다양함을 알게 됐습니다. 아니 눈을 조금만 돌리면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버트란트 러셀이 강조한 것처럼 조용한 곳에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이해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왜 헨리 데이빗 소로가 월든 숲으로 들어가 간소한 삶이 주는 행복을 경험하게 된건지, 실뱅 테송이 문명에서 동떨어진 바이칼 호수 옆에서 추운 겨울을 나면서 '행복한 고독'을 누릴 수 있었는지 이제야 조금 이해하게 됐습니다. 삶의 전반부는 성취를 향해 달린 시간이었습니다. 적지 않은 것을 손에 쥐었는지 모르겠지만 내면을 가꾸는 게 부족했습니다. 이제 삶의 중후반은 의미로 꾸며보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삶의 화학적인 변화의 길을 열어주시고 동행해주시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정말 많은 좋은 분들이 곁에 다가와주셨습니다. 손 잡아주고 등 두드려준 그 마음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첫 시집에 실린 사진이든 시든 다 부족합니다. 겨울 속에서 해동해온 제 가슴의 속살을 담아보았을 뿐입니다. 낮은 자세로 의미의 씨앗을 뿌리고 주변을 돌아보며 살아가겠습니다. 제 첫 시집과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추천사 



눈으로 보는 것, 마음으로 보는 것


김만수(인하대 문과대 교수)



1. 먼저 개인적인 관계부터 밝혀야겠다. 나와 최남수는 지방의 어느 도시에서 마치 꿈결과도 같은 고교 시절을 함께 보냈고, 또 대학 시절에는 한 방에서 자취 살림을 하기도 한 막역한 사이다. 그 시절의 추억담을 쏟아놓으면 한 바구니쯤 되겠지만, 그 자취방에는 많은 친구들이 오갔고 두어 번은 형사도 찾아온 적이 있었던 듯하다. 최남수가 경제학과에서 무슨 심포지엄을 열겠다고 작당하던 무렵인 듯하다. 어쨌든 그런 시절이었다.



나는 문학을, 최남수를 경제학을 선택했지만 그 길이 이토록 달라질 줄은 몰랐다. 나는 대학과 대학원에 10년 이상 처박혀 있다가 대학의 국문과 교수가 되었고, 그리 잘 나가는 편은 못되지만 문학평론을 열심히 하며 문단에도 기웃거렸다. 반면 최남수는 일찍이 생업(?)에 뛰어들어 경제신문의 기자와 방송사의 기자직을 두루 섭렵하는가 하면, 꽤 늦은 나이에 대학원에 도전하여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언론학, 경영학의 학위를 따기도 하고, 또 언론사의 임원과 사장에까지 이르는 출세가도(?)의 길을 걸었다. 친구의 소견으로는, 그 출세가 오로지 본인의 노력과 능력의 소산이었기에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출세가도의 허망함이란... 더 말을 잇기 싫을 정도의 수난을 겪으면서 아마 마음의 상처가 컸으리라 생각된다.



자취방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도 난다. 경제학은 머리로만 하는 학문이 아니다, 뜨거운 가슴을 가진 자만이 진정한 경제학도가 될 수 있다 등등... 내 친구 최남수의 인생이 똑 그랬다. 그가 명문대 경제학과 출신의 수재임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지만, 정말로 뜨거운 가슴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



2. 언론사에서 사퇴하고 나온 후 마음의 상처가 크리라 걱정했는데, 페이스북에 계속 사진과 짧은 단상을 올리기에 다행이다 싶었다. 나도 간간히 댓글도 달았는데, 내 댓글이 위안이 되었을지는 의문이다. 예를 들어 그가 올린 시 <도강(渡江)>에서 “강 건너 불빛에 네가 마음 흔들리면/아직 강을 건너온 것이 아니다”라고 중얼거리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강 건너왔으면 그걸로 끝이지, 도대체 마음이 흔들릴 게 무어냐?”라고 따지듯 충고하고 싶은 마음 여전하다. 어쨌든 시가 그에게 왔고, 그는 당분간 시의 곁에서(그의 표현대로라면 “시의 처마밑에서”) 살아갈 듯하다.


나에게 시란


언어로 파낸


마음의 판화이다


얼기설기 생의 조각들


한몸 된 모자이크다


가슴의 빗물


한데 몰리는 도랑이다


한 올 한 올 날려보내는


삶의 습기이다



시 한 줄 뚝 떨어졌다


한 생이 묻어난 채로


(「나에게 시란」 전문)



그는 시를 마음을 새긴 “판화”라고 생각하고 삶의 조각을 모은 “모자이크”라고 생각하고 “삶의 습기”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만한 관점이다. 그 시가 대단한 명작은 아닐지라도 그렇게 시는 존재하고 시 쓰기는 계속되는 것이다.


최남수의 시를 읽어가다가 몇 번 섬뜩한 적이 있다. 첫 시인 「나에게 시란」에서 얼핏 스친 “삶의 습기”, 혹은 “뚝 떨어지는” 어떤 눈물 같은 것 때문이었다. 특히 「파도와 바위」가 그랬다.



파도는 바위의 언어다


바다에 잠겨 삼켜온 언어의 자락들


한 점 한 점 바다에 쓸려 들어가고


부식된 언어들은 파도가 되어


제 몸을 채찍질할 뿐


언제 말이 구름이 돼


바다를 굽어볼 수 있는지


바위는 오늘도 한 움큼


말을 삼켜넣는다


(「파도와 바위」 전문)



그의 언어들은 “바다에 잠겨” 그저 바다에 쓸려들어갈 뿐인데, 그 침묵의 오래된 언어들이 파도가 되어 가끔 드러난다는 것. 궁극에는 그 파도의 흔적이 바위에 기록된다는 것. 그리하여 “바위는 오늘도 한 움큼/말을 삼켜넣는다”는 것. 날마다 글을 쓰면서 세상일에 참견하던 기자 양반이 무슨 한이 있어 침묵의 언어에 갇혀 있었을까. 혹시 그 침묵의 언어는 아무도 귀담아들어주지 않아, 바위에나 기록되어야 했던 것일까. 그 파도와 바위가 섬뜩하고 무섭다.



3. 내가 존경하던 한 소설가는 자신이 20대에 썼던 데뷔작을 50년을 훌쩍 넘긴 고희의 연세에도 모두 기억하고 계셨다. 언젠가 술이 거나해지셨을 때, 그 소설의 가장 첫줄에서 가장 마지막 구절까지 거침없이 암송하셨는데, 더구나 그 데뷔작은 한 편이 아니라 두 편이었다. 거의 데뷔 직전까지 갔으나 심사위원이 아직 미진한 구석이 있으니 다시 한 번 검토해보라 해서 아예 다시 썼다는 것인데, 물론 우리 문학사에는 고쳐진 두 번째 작품만 데뷔작으로 남아 있고, 그 최초의 명작(?)은 술집에서 그 암송의 일부를 들은 우리 몇몇의 머리속에만 존재한다.


그분께는 그 두 편의 소설이 아마 청춘의 거의 전부이지 않았나 싶었다. 그는 소설의 어휘 하나, 구절 하나까지 마치 손바느질의 한 땀 한 땀처럼 온몸을 다해 썼을 것이다. 글은 그냥 쓰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버텨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때의 충격은 뭔가 무거운 것으로 한 대 맞은 듯 묵직했다. 글은 아무렇게나 쓰는 게 아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한때 시인이라는 명칭도 아껴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적이 있다. 그 시절의 내 주장에 따르자면, 시는 김소월이나 한용운, 정지용 정도의 시인들이 쓰는 것이며, 나머지 숱한 시인들이 쓴 시는 그냥 ‘글’이다. 그러니 시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그냥 ‘작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게 좋다!


그 시절의 내 눈으로 보자면, 내 친구 최남수는 아직 시인이 아니다. 그는 오랫동안 언론과 방송사의 글쟁이였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글을 쓰고 책을 편찬하는 작가이지만, 아직 시인은 아니다. 시인은, 예를 들어, 정지용 시인은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보고 싶어하는 마음을 80년전 쯤에 적어도 이런 정도의 수준에서 썼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푹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湖水)만 하니


눈감을밖에


(<호수(湖水)> 전문)



눈 감아도 보이는 시의 세계! 그것은 장황한 산문이나 카메라의 눈으로는 그려낼 수 없는 세계이지 않은가.



4. 시가 중요한가, 시인이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쟁이 있다. 시도 일종의 물건인 만큼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인격을 거기에 개입시킬 필요는 없고 시를 “시 자체”의 품질로 평가해야 한다는 관점도 있지만, 시는 결국 시인의 마음을 담는 것이니 시인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후자의 관점에 따르면, 시를 쓰는 작업을 통해 좋은 마음을 얻으면 되는 것이지, 정작 시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시에 개입된 기교, 기술을 중시하는 전자의 관점이 다분히 서구적이라면, 시를 쓰는 마음을 강조하는 후자의 관점은 가히 동양적이라 할만하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후자의 마음으로 시를 쓰되, 시를 잘 만들어진 물건으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삶의 일부로 보았다. 이는 그림을 그리는 데에도 적용되었으니, 우리 선조들은 그림 속에 말의 뜻을 담았고, 글 속에 마음의 무늬를 담았다. 시서화(詩書畵)는 시의 음률과 글의 뜻과 그림이 함께 만난 것인데, 이러한 전통이 몇 조각의 시적 감성과 디지털 카메라의 융합으로도 이어지고 있는 듯하니 참으로 신기한 현상이다.


디지털 카메라와 시의 만남.,. 우리는 세상을 도려낸다. 시는 몇 조각의 언어를 동원하여 세상을 도려낸 다음에 재조립하며, 사진 또한 렌즈를 통하여 세상의 빛과 형태를 도려낸 다음에 살짝 굽는 것 아니던가.


시로서의 언어와 그림으로서의 풍경을 함께 담아내고자 하는 최남수 작가(!)의 어떤 시는 내 마음의 그늘에 시서화(詩書畵)의 어떤 조각을 던져준다. 시간이 된다면 작가와 함께 햇볕이 잘 드는 한강변에서 그 편지를 함께 읽고 싶다.


햇빛이 쓴 손편지를


바람이 배달하고 갔다


그늘에서만 읽혀지는 글을


(<편지>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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