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게 하다
K는 참 묘한 이니셜이다. 이제껏 만나왔던 모든 그들의 이니셜이기도 하면서, 내가 즐겨 쓰는 머릿글자 중 하나이며, 무엇보다 알파벳 중 조형적으로 단연 섹시하다, 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가 그랬다.
가장 최근에 만난 너, K.
그리고 그 K가, 나에게, 글을 쓰라고 말한다. 당장, 넌 지금 글을 써야해. 그는 확신에 차 있다. 다양한 언어를 섭렵한 그의 눈에는, 아니 귀에는,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한국어로 희롱하듯 묘사하는 나의 이야기들이 퍽이나 맘에 들었던 것이다. 너의 말이 글로 쓰였으면 좋겠어. 그는 내가 옆에서 속삭이는 말을 음미하며 중얼거린다. 하지만 이것도 어중간한 내 재능 중 한 찌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K는 나를 많이는 알지 못하기에, 그래서 그런 말을 하나 보다고, 그렇게 넘겨버리려 했다.
글, 이 활자라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굉장히 경외스러운 것이었다. 한참을 향유하고 싶지만 섣불리 침범할 수 없는 어떤 것. 혹시나 내가 이 영롱한 조각들을 잘못 다루면 왠지 큰 망신을 당할 것만 같은. 불규칙적이고 규칙적이면서 예상할 수 없는 좋은 교향곡처럼, 글이란 내 영역을 벗어난 것. 감상을 하도록 미리 만들어진 것. 태고적부터 나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 그런 것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엄두를 내지 못하고 활자를 무분별하게 소비하며 주변을 빙빙 둘러 왔다. 소리 내어 말은 잘 하면서, 굳이 글을 쓰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을까. 말하자면 기록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말을 하면 동시에 입술에서부터 새어나가고 휘발되어버린다. 내 말은 나에게서 나와서 허공으로 흩어진다. 신체 기관을 통해서 생각을 배설하는 것의 쾌감, 그 휘발되는 찰나의 순간, 순간에 함께 있는 자들만 공유하는 마법의 주문 같은 느낌. 그것들이 나를 중얼거리게 했다. 어차피 이건 아무도 주워담지 못해. 그냥 놀이처럼 말하고 돌아서면 돼.
글에는 그런 가벼움이 없다. 종이에 펜으로 꾹꾹 눌러 쓰든, 스마트폰의 자판을 두드리든 이것은 명백한 흔적을 남긴다. 말이 배기가스처럼 흩어지는 물질이라면 글은 자동차 공회전 자국처럼 선명하게 남아버리는 내 실수이다. 누구나 볼 수 있는 나의 낯뜨거운 실언의 기록. 그것이 무서웠다. 새벽 이슬과 함께 깨어난 내 감성을 누군가 활자 너머에서 지켜보고 해부할 것이라는 두려움, 검열과 평가 속에서 내 혼잣말이 마치 트루먼 쇼처럼 관음당하는 것을 상상하는 장면은 섣부른 결정을 막았다. 그리고 늘 그렇듯 혼잣말로 내 하루를 마무리하고 누군가에게 던지는 물음을 끝마치지 못하고 수면 상태로 접어든다.
늘 그랬고 그럴 것이며 그러고 있었는데.
망할 K가 고양이를 닮은 눈으로 나에게 글을 쓰라고 말한다. 그는 자꾸 나에게 글을 쓰라고 말했다. 네가 뭘 알아서 나를 글쓰게 만드는 것이지? 속으로 생각해 보면 뭐 이런 행패가 다 있나 싶지만... 짐짓 진지한 그의 표정은 내 뇌리에 남아 이렇게, 이 새벽에 옆으로 쪼그리고 누워 스마트폰으로 글을 쓰게 했다. 고민하면서, 머릿속에 떠다니는 단어를 과일 고르듯 찬찬히 살펴보면서.
...그래, 당신이 이겼다. 나는 글을 쓴다. 내 일상에 사뿐히 앉아 당신의 손길로 잠에 들게 만든 악마. K의 제안 때문이다. 아니, 제안이라기엔 폭력에 가까운 강요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나는 이런 단어를 고를 거야. 당신은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글을 쓸 것이다. 써내려가고 써낼 것이고 써버릴 것이다.
이 끈적하고 기분 나쁜 감정이 씻기길 기도하면서, 당신을 이것으로 지워내길 기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