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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릭 Jul 24. 2022

요리 좋아해요?

방금 켠 가스레인지 위에는 큼지막한 프라이팬이 올려져 있었고 그 바닥에는 노란 면과 면이 잠길 만큼의 물이 담겼다. 옆의 개수대에서 남자는 방금 벗겨낸 두툼한 배춧잎 몇 장을 씻고 있었다.


“뭐뭐가 들어가요?” 여자가 물었다.


“이거랑 소고기가 주연, 양송이 양파 대파 고추가 조연.”


여자는 테이블에 놓인 볼을 살펴보았다. 큼지막한 오이와 잘 익은 토마토도 보였다. “고기는 냉장고에 있어요? 꺼낼까요?”


“네, 냉장칸을 열면 바로 보일 거예요.”


곧바로 여자는 냉장고에서 비닐봉지에 담긴 덩어리를 꺼내 들었다. “이거 제가 썰까요? 볶을 거 맞죠?”


“괜히 손댈 거 없어요. 간단한 거니까 금방 해요.” 남자가 씻어낸 배춧잎의 물기를 힘 있게 털어내며 말했다.


“그냥 같이 하면 좋잖아요? 혹시 방해될까요? 그럼 구경만 하고.”


남자가 웃었다. “얇게 400g 썰어주세요. 저울은 거기, 도마는 여기, 칼은 저기.” 남자가 하나씩 시선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갈색 나무 손잡이가 잘 들어요.”


“키친타월은요?”


“키친타월은 요기.” 남자가 한걸음 옮겨 하부장을 무릎으로 두드리고 양파와 양송이를 집어 개수대로 가져갔다.


먼저 손을 씻은 여자가 도마와 칼을 꺼내 테이블에 올리고 뜯어온 타월을 도마에 펼쳤다. 봉투에서 꺼낸 고깃덩어리를 올려 적당히 물기를 닦아냈다. “어느 정도 얇게 썰어요?”


“1, 2분 짧게 볶아도 익을 정도? 살짝 익은 걸 좋아한다면 좀 더 두꺼워도 좋아요”


“알았어요.” 여자가 저울 위에 접시를 두고 덩어리를 잘라 량을 했다. “근데, 몇 그램 썰어주세요 이런 말, 처음 들어요. 요리도 정확하시군요.”


“아... 아니에요. 그냥 내가 가늠한 양을 확인하는 정도지 정확하게 측정하진 않아요. 식사량을 인지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그게 그 말이잖아요.” 여자가 힐끗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가 웃었다. “그런가...”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은 덩어리를 봉투에 담아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 닦아낸 타월을 치우고 다시 손을 씻고 그녀는 계량해 둔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여자의 손놀림을 몇 번 지켜보던 남자도 나머지 야채들을 씻었다.


“배추는 어떻게 썰어요?” 고기를 다 썬 여자가 개수대 옆에 포개 둔 배춧잎을 가리키며 물었다.


남자가 왼쪽 손바닥을 펴 그 위로 오른쪽 손날로 교차해 자르는 시늉을 했다. “가로로 새끼손가락 굵기. 아니, 이진 씨는 검지.”


“네, 셰프.” 곧 도마 위에 올려진 배춧잎에서 여자의 손목을 따라 아삭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야채를 다 씻은 남자는 김이 오르기 시작한 프라이팬의 면을 나무젓가락으로 한번 휘저은 다음, 여자에게 건네받은 칼로 나머지 야채들을 썰었다. 여자는 테이블에 기댄 채로 경쾌한 도마 소리를 들으며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물이 졸아들기 시작한 프라이팬에선 아까부터 구수한 면의 향이 올라오고 있었다.


재료를 모두 준비한 남자는 불을 조금 줄이고 나무젓가락으로 면을 휘저으며 좀 더 수분을 날렸다. 여자도 남자를 따라와 옆에 섰다. “이렇게 면을 삶는 건 처음 봐요.”


“그래요? 저도 본 적이 없긴 해요.”


“어디서 배웠어요? 뭔가 고수 같아.”


남자가 웃었다. “아닌데... 그냥 간편하게 하려다 보니. 따로 헹궈내지 않고 이대로 요리할 거예요.”


“엥!” 여자가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냈다.


“하하. 걱정 말아요. 나름 오래 검증된 방법이니까.” 남자가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며 입술에 힘을 주었다. “삶는 시간을 줄일 수 있고, 면수를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진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불 세기와 물의 양, 조리시간만 적절하다면 나름 훌륭한 방법이라고 감히 말씀드릴게요.”


“아하, 그런 깊은 뜻이. 의심한 절 용서하세요. 셰프.” 여자가 장난스럽게 감탄스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물이 졸아들자 남자가 젓가락으로 면을 집어 살짝 흔들었다. “이 정도 물의 양, 이 정도 탄력. 아직 덜 익었을 때 나머지 재료들을 넣어서 볶아내면 돼요.” 남자가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자가 콩기름을 한번 두르고 마늘 몇 쪽을 식칼 면으로 으깨고는 잘게 썰어둔 대파와 붉은 고추와 함께 넣고 프라이팬을 흔들었다. “개인적으로 올리브유는 소고기 향과 배추 향을 방해한다는 생각이에요. 재료 본연의 향을 살리는 덴 식용유만 한 게 드물죠.” 그는 중요하다는 듯이 검지를 세우며 강조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셰프.” 여자가 진지한 눈빛으로 남자를 올려봤다. 그가 웃음을 참고 있다는 걸 그녀는 남자의 눈 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반면, 여자의 입은 대놓고 웃고 있었다.


양송이와 양파가 들어가자 프라이팬이 한층 바쁘게 움직였다. 남자는 프라이팬을 흔들며 나무젓가락으로 리드미컬하게 면을 뒤섞었다. 졸아든 물의 양만큼 야채에서 나온 물기가 채워졌다.


“요리하는 거 좋아하나 봐요. 많이 한 티가 나요.”


“글쎄요. 벌써 10년 넘게 자취했으니 많이 한 건 맞지만 좋아하는 진 모르겠어요. 요리 좋아해요? 칼질이 예사롭지 않던데.”


남자의 질문에 여자가 잠시 눈알을 굴리며 생각했다. “듣고보니 의외로 낯선 질문이네요. 저도 동생이랑 살면서 오래 해오긴 했는데, 생각해보진 않았네요. 재밌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고 책임감도 있었고... 그냥 하는 거니까 했던 거 같아요.”


“나도 비슷해요. 사실 특별한 요리엔 별 관심이 없어요. 그냥 원재료의 맛을 살리는 이런 간단한 요리 정도인 거죠. 재료만 좋고 적절한 조합에 간만 맞추면 실패할 수 없으니까.”


“그렇군요. 근데 다른 걸 해도 잘할 거 같아요.”


“지금처럼 즐거운 요리라면 더 복잡한 것도 해보고 싶긴 해요.”


남자의 말에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차분히 팬을 놀리는 남자의 모습에 왠지 뭉클해지면서  뺨에서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잠시 팬 위에서 춤추는 듯한 면의 출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선배는 말을 참 이쁘게 해요.”


“네?” 남자가 힐끗 여자를 보았다. 여자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살면서 그런 말은 처음 들어요. 재수 없다는 말은 가끔 들었지만.”


말뜻을 헤아리려는 듯한 남자의 표정을 보며 여자가 말했다. “뭘 또 분석하고 그래요. 그냥 그 말투가 제 맘에 쏙 들었다는 뜻이에요.”


남자가 멋쩍은 표정으로 팬을 뒤적였다. 기름과 뒤섞이며 익어가는 양파에서 단내가 올라왔다.


버섯과 양파가 흐물거리기 시작하자 여자가 말했다. “이제 곧 주연이 등장할 시간이겠군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미리 소고기와 배추가 담긴 그릇을 받쳐 들었다.


남자가 불의 세기를 최대로 올린 다음 그릇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프라이팬과 나무젓가락이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방 고소한 소고기 향이 피어오르나 싶더니 그 뒤로 향긋한 배추 향이 감싸듯이 퍼져 나왔다. “할머니가 배추전을 참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이 은은한 향을 좋아하게 된 거 같아요.” 말끝에 남자가 빙긋 웃었다.


“아...” 여자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초등학교 시절 남자는 몇 년간 할머니와 살았고 이 집은 할머니가 남자에게 물려준 거란 걸 여자는 남자에게 들었었다.


“고풍스러우면서 우아한 느낌이랄까.” 남자가 말했다.


“표면적으론 소고기가 주연이지만 여기서 실질적인 주연은 배추란 게 셰프의 진정한 의도였군요.” 여자가 프라이팬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와, 들켰네요.”


지글거리는 소리가 커지면서 남자의 손놀림이 격렬해졌다. 재료들이 뒤섞일 때마다 프라이팬 주위에 작은 불꽃이 일어나며 각각의 향기들이 섞여 하나의 조화로운 풍미를 냈다. “와! 불쇼다.” 여자의 추임새가 출렁임과 소리와 향기를 들뜨게 했다.


자박하던 물기가 재료들과 엉켜 드는 느낌이 들자 남자는 불을 끄고 요리를 접시 둘로 나눠 담았다. 면을 말아 올리고 남은 재료까지 조심스럽게 쌓아 올렸다. 진득해진 소스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그가 물었다. “혹시 깻잎 싫어해요?”


“아뇨. 좋아해요.”


남자는 깻잎 한 장을 꼭지를 따고 손바닥으로 살짝 비볐다. “이건 지나가는 행인2” 그리곤 아주 가늘게 썰기 시작했다.


“그럼 행인1은요?” 여자가 웃었다.


“도입부에서 이미 지나갔어요.” 남자는 실뭉치 같아진 깻잎을 둘로 나눠 면 위에 올렸다. “완성.”


“와아.” 여자가 손뼉을 쳤다.



# Invitation(S.Assad) - 박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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