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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L Nov 16. 2020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생일

4년마다 삶의 전환점 맞이 하기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2월 29일.

나는  희귀한 날에 태어났다. 어릴  평범하지 못한 생일이 싫었다. 친구들처럼 고정값을 가진 것이 아니다 보니 매년 허공 속으로 사라져 잊히기 일쑤였고 즐거워야  날이지만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많았다. 생일에 무뎌진 지금은 그래도 특별한 날에 태어난  아니냐고 스스로 위안을 해보곤 한다.


2월 29일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유는 시간의 오차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365.25일. 정확하게 1년이 365일로 나뉘지 않기 때문에 1년마다 초과한 0.25일을 이어 붙여 4년마다 2월 29일을 불러낸 셈. 결국 2월 29일은 사라진 시간의 총합과 같다.


자투리 시간을 이어 만든 날에 태어났기 때문일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주는 듯 4년마다 빅 이벤트가 있었고, 그 중심에는 늘 예상하지 못했던 긴 여행이 있었다. 그 여행은 다음 4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삶의 이정표가 되었으며 그 경험을 끌어안고 다음 2월 29일이 올 때까지 삶을 지탱해 나갔다.



시작은 2008년부터였다. 언젠가 유럽 배낭여행을 떠나야지 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그게 2008년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우연히 학교에서 워크 캠프 지원자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고, 이거라면 부모님을 설득시켜 떠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고 그해 여름 나는 유럽 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첫 해외여행이었고, 처음으로 혼자 떠난 여행이었다. 모든 순간이 처음이라 내게는 유별났지만 그리 특별한 여행은 아니었다. 여행의 경험치가 낮을 때라 나만의 여행 스타일이 뭔지도 몰랐고, 그저 남들 다 가는 루트를 쫓아가는 관광에 가까웠다. 다만 한 가지는 꼭 하고 돌아오자는 스스로와의 약속이 있었는데, 매일 일기를 쓰는 것이었다. 별거 아닌 내용이라도 어디를 갔었고, 어떤 일이 있었고 또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오랫동안 남겨두고 싶어서 여행 내내 일기를 쓰기로 했다.


작은 가방 속에 노트와 펜 하나를 넣어두고 틈만 나면 썼다. 비행기 안에서, 할슈타트 호수 앞 벤치에서, 파리 튈르리 정원에서. 일기를 밀린 날에는 방학 숙제하듯이 이틀 치를 동시에 써 내려가기도 했다. 그 버릇은 여행에서 돌아와 일상에도 지속되었다. 원래도 기록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다이어리에 10자도 안 되는 짧은 문장으로 오늘 있었던 일만 남겨두는 것이 끝이었다. 무언가를 길게 쓰는 건 어렵게만 느껴졌었는데, 여행 내내 매일 한 페이지를 채우다 보니 자연스레 긴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노트에 무엇이든 써 내려갔다. 요즘 썸 타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도 쓰고, 취업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함을 써 내려가기도 하고, 생각나는 건 모두 다 썼다. 그 끄적임이 2008년부터 지금까지 1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다. 여행을 떠났을 때처럼 가방에는 늘 작은 노트가 들어있고, 이따금 문장들을 써 내려간다. 그때의 그 끄적임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줬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




그 후로 4년 뒤, 두 번째 여행을 떠났다. 이번에는 국내로 더 긴 여행을 떠났다. 6월부터 9월까지 제주도에서 긴 여름 방학을 보냈는데, 계획된 여행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8년 동안 그려왔던 승무원이 내 길이 아님을 깨닫고 어디로 가야 할지 한 발도 내딛지 못하고 주춤하던 시절이었다. 잠시 쉴 겸 생각의 시간도 가질 겸 1달 정도 전국 여행을 하고 돌아오려 했는데, 친구가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 대한 정보를 알려줬다. 스텝으로 일하면서 여행을 할 수 있다고. 바로 게스트 하우스를 찾아 지원했고 계획 없이 일주일 만에 제주도로 건너갔다. 1~2달 정도 지내다 와야지 했는지 3개월을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제주도에서 보낸 시간,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게 많은 것을 남겨줬으며 결정적으로 그곳에서 나는 다음 길을 찾았다.


그 당시 올레길을 걸으러 온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만큼 올레길 열풍이 지속되고 있었다. 제주의 숨겨둔 속살을 살펴볼 수 있어 나도 사람들과 동참했는데, 어느 날 문득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혼자 걷고 오겠다고 한 날이 있었다. 김녕부터 하도리까지 걷는 20코스로 비교적 쉬운 코스였는데, 혼자서 5~6시간을 걷다 보니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과거의 기억을 붙잡아보기도 하고, 제주도에서의 시간을 되새겨보기도 하고, 먼 훗날의 내 모습도 그리다 보니 어떤 생각에까지 도달했다. 한 번쯤 해보고 싶었지만 나와는 너무 먼 세계라고 여겨졌던 잡지 기자라는 세계에. 그 당시 구독해서 보는 잡지가 몇 개 있을 만큼 잡지를 좋아했고 밑줄까지 그어가며 정독했다. 매일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글로 풀어내는 잡지 기자의 일은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직업인 만큼 특정한 소수의 사람만 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오르지 못할 나무 같았달까.


근데 그날은 왠지 모르게 도전해 볼 만한 것처럼 여겨졌다. 혼자서 올레길을 완주하고 나니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도 생긴 걸까. 결국 '잡지 기자'라는 다음 이정표를 가지고 서울로 돌아와 블로그에 콘텐츠를 만드는 연습을 했고, 그다음 해에는 어느 매체의 편집장이 진행하는 글쓰기 수업을 들었다. 수강생들과 함께 작은 무가지를 만드는 것으로 수업을 마쳤는데, 거기에서 재미를 느껴 이듬해에는 다른 사람들과 독립 출판물을 만들었다. 그 결과물로 여러 잡지사의 문을 두드렸고, 내가 오랫동안 좋아했던 잡지사에 에디터로 입성하게 되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또다시 2월 29일의 해가 찾아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4년마다 긴 여행을 떠났던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 패턴이 또다시 되풀이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긴 여행을 계획하긴 했지만 2016년이 아닌 2017년 어느 날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김없이 운명은 되풀이됐다.


잡지 기자는 생각한 것 이상으로 재밌고 다이내믹한 일이었지만, 생각한 것 이상으로 힘들고 지치는 일이기도 했다. 매달 밤낮을 바꿔가며 일을 하다 보니 몸도 마음도 쉽게 망가져 갔고, 휴식이 절실히 필요했다. 휘청이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 당시 많은 잡지가 폐간하거나 휴간을 결정했고 업계는 뒤숭숭했다. 선배는 이렇게 많은 기자가 일자리를 잃는 시기에 퇴사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지만, 또 한 번 방향의 고민이 필요했다. 종이 잡지가 하향세의 길을 걷는다면 나는 무얼 먹고살아야 하나 고민됐다. 그 고민을 끌어안고 나는 또 한 번 긴 여행을 떠났다.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낯선 여행지, 발칸 반도로.


여행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 재밌어서 여행에 집중하다 보니 미래에 대한 생각은 못 했지만 흐름은 알 수 있었다. 더는 여행 잡지나 가이드북에서 정보를 얻지 않고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에서 입소문 난 여행 계정에서 정보를 얻는 사람들. 또 많은 이들이 그곳에 사진이 실리기를 바랐다. 실시간 정보도 예전에는 여행 카페에서 얻곤 했는데, 이젠 해시태그를 타고 들어온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DM으로 실시간 정보를 물어봤다. 여행하면서 SNS, 그리고 디지털 파워가 얼마나 커졌는지를 실감하게 되었다. 무엇이 될진 몰라도 다음은 디지털 시장에서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여행을 다녀온 이후로 나는 디지털 세계로 발을 옮겼다. 정확하게는 매체에서 브랜드로 옮겨간 거지만. 그곳에서 디지털 콘텐츠를 만들었으며, 브랜드 이야기를 잘 다루는 이커머스를 매일 들락날락하며, 또 다른 잡지의 세계를 보듯 살펴보았다.  




다시 4년 후가 되었다. 올해가 시작되기 전부터 내심 기대했다. 4년마다 뜻하지 않게 긴 여행을 떠났으니 올해도 또 예상하지 않았던 긴 여행을 떠나지 않을까 했는데,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며 장기 여행은커녕 단기 여행도 떠나지 못하게 된 것. 비록 여행은 떠나지 못했으나 또 예상치 못한 긴 공백을 가지게 되었다. 회사를 퇴사하고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지만 매일 출근하는 일상이 사라져서인지 이 시간이 또 하나의 작은 공백처럼 여겨진다. 이 시간이 여행을 대신하여 다음 4년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만들어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요즘 일상을 모험하고 있는 중이다.


벌써 올해도 2달이 채 남지 않았다. 과연 나는 올해의 끝에 어떠한 키워드를 발견하게 될까? 다음 2월 29일이 오기 전까지 또 어떠한 삶을 살아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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