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INFJ 이야기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안부 인사처럼 서로의 MBTI를 물어보던 때가. MBTI를 완전히 맹신하는 건 아니지만 8개의 알파벳은 그동안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었던 생각의 차이를 쉽고 간결하게 정리해줘, 한동안 타인을 이해하는 하나의 지표로 사용하곤 했다.
각종 SNS에는 MBTI 행동 양상에 대한 다양한 예시가 떠돌아다녔는데, 어느 날 재밌는 분류 하나를 발견했다. 계획형 인간인 J와 상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P에 관한 이야기로 분류 포인트가 남달랐다. J와 P에 부지런함과 게으름이 붙으면 또 다른 형태로 나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생활양식에 따라 J와 P로 나눌 수 있지만 2가지로 설명할 수는 없는 법. 세상엔 부지런함/게으름 외에도 다양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J와 P가 존재하기에.
위의 부지런함/게으름 조합을 보자면 나는 두 번째에 해당한다. 실행력이 부족한 게으른 J. (참고로 나의 MBTI는 INFJ다) 아이러니한 유형이라 말할 수 있다. 계획 짤 때는 그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체계적인 사람인 것 같은데 딱 거기까지! 실행 단계에는 에너지가 못 미치는 부류다. 어쩌면 계획 단계에서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내서 실행을 못 하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게으른 J에게 고질병이 하나 있는데, 늘 망각한다는 점이다. 게으름 피울 미래의 나는 자꾸 잊어버리고,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며 늘 150~200% 계획을 세운다. 가끔은 계획표 속에 있는 완벽한 내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자꾸 거창한 계획을 세우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계획을 다 지키기만 한다면 세상 멋진 사람이 될 것 같으니까. 그 벅찬 기분이 계획표 속에 환상적인 나를 계속 만들어 내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을 빗겨 나가지 않는다. 게으른 J가 그린 환상 속 자신의 모습 근처에도 못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획은 산산조각이 나 버린다. 처음 한두 번은 그리 큰 타격을 입지 않는다. '그럼 그렇지. 게으름뱅이가 어디 가겠어. 다음에 하지 뭐.'하고 가볍게 넘긴다. 그러나 이러한 패턴이 반복되면 결국 스스로가 스스로를 쓰러뜨리게 된다.
계획을 설계한 것도 나고, 그 계획을 이루지 못한 것도 나인데 번번이 화살은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 '아.. 또 못했네. 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 나는. 게을러터져서는. 이러다가 나는 도태되고 말 거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거야.' 스스로에 대한 미움과 경멸은 비수가 되어 꽂힌다. 나를 강하게 짓누르고 자존감을 갉아먹는다. 심각할 때는 수면 아래에 오랫동안 가라앉아 있기도 하다. 앞으로 나아가 보자고 세운 계획이 결국 내 발목을 잡아 악순환으로 이끄는 것. 게으른 J 유형이라면 아마도 한 번쯤 경험해봤을 테다.
그 굴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무던히 노력도 해봤을 거다. 차라리 계획을 세우지 말자고 다짐해보기도 했지만,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금방 방향을 잃어버리는 게 J의 성향이기에 그건 일을 더 어렵게 만든다. 친구들과 함께 벌금을 걸고 실행해보기도 했지만 큰 성과는 없다.
해결책을 찾은 건 최근 명상을 통해서다. 1년여 동안 명상을 하면서 자주 듣던 말이 있는데 최근에서야 마음속에 툭툭 걸리기 시작했다. 스쳐 지나가던 말이 오랫동안 머무르며 계속 되뇌도록 했다. 그 문장은 명상의 기본 중의 기본인 문장이다.
괜찮아요. 다시 돌아오면 돼요.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 순간으로 돌아오세요.
명상하는 이유야 많겠지만, 결국 하나를 위한 행위로 집결된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 호흡을 가다듬으며 순간에 집중하다 보면 불안감도, 복잡한 생각도 사라지고, 집중력도 높아진다. 하지만 집중하는 게 절대 쉽지 않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다 보면 별의별 생각이 찾아온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순식간에 생각의 구름이 두둥실 떠다닌다. '점심은 뭐 먹지?', '어제 친구가 한 이야기가 생각나네', '오늘 오후 일정이 어떻게 되더라' 등 과거 또는 다가오지 않은 미래로 생각이 넘나든다.
누구나 그렇다. 생각은 자유분방한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시도 때도 없이 시공간을 넘나든다. 또 생각은 통제하려고 하면 할수록 반대로 더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지금 또 여러 생각이 떠오르고 있나요. 괜찮아요. 자꾸 생각이 드는 건 지극히 정상이에요. 그럴 땐 다시 돌아오면 돼요. 다시 이 순간으로 나를 데려오세요."
그렇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생각이 떠오르지 않게 막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서 벗어난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계속 생각이 이리저리 뻗어 나가도 다시 돌아오면 된다. 그 힘을 기르는 게 명상이다.
명상에서 통제 불가능한 요소가 ‘생각’이라면, 게으른 J에게는 ‘실행력’ 일 것이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내가 모든 걸 실행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내일의 나에게 얼마만큼의 실행력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결국 통제하지 못한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다시 돌아오는 것. 정해둔 계획을 다 지키지 못했다고 실망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다시 돌아와 또다시 하면 된다. 계획표의 절반에도 못 미칠지라도, 완벽하게 완성하지 못했을지라도 무언가는 남을 것이다. 돌아온 만큼 조금씩 쌓이고 쌓여 결과물을 안겨줄 것이다.
이실직고하자면 이 글의 업로드 날짜는 20일이었다. 스스로가 정한 마감 날짜는 그랬다. 하지만 게으른 J가 어디 가겠는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읽고 있던 책을 놓을 수가 없어서, 졸려서 등 여러 핑계로 게으름을 피우다 보니 오늘에 다다랐다. 하지만 다시 돌아왔고 결국 글을 완성했다. 정해진 기한은 지키지 못했지만, 미완성으로 서랍 속에 방치해둔 것은 막았으니 그걸로도 충분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