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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L Jun 01. 2021

나를 지탱하게 하는 말

6년 만에 만난 친구


6년 만에 친구를 만났다.

낯선 동네 석촌역 2번 출구에서.

우리는  치의 어색함도 없이 어제 만난 사람처럼 인사를 나눴고 길을 걸었다.


친구를 처음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21년 전, 중학교 1학년 봄이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던 그 시절, 우리는 몸에 맞지 않는 헐거운 교복을 입고 같은 교실에 앉아 있었다. 아직도 친구의 모습이 또렷이 기억난다. 어깨까지 오는 중 단발에 파란색 머리띠를 하고 있었는데, 똥그란 큰 눈에 귀여운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낯을 가렸던 나와 달리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준 친구, 그날부터 우리는 가벼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며칠 뒤, 학기 초 통과의례인 반장 선거가 있었다. 무슨 용기였는지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반장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친구는 내게 찾아와 "반장 선거에 나갈 거야? 그렇다면 너를 꼭 뽑아줄게."라고 이야기를 했다.


‘우리 안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나를 뽑아준다니 고맙다'라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친구는 나를 뽑지 않았다. (ㅋㅋ) 내가 나에게 던져준 1표만이 나왔기에. 뒤늦게 친구는 나를 찾아와 미안함을 표했다.


“사실 네가 부반장이 되었으면 해서 부반장 란에 이름을 적으려고 했는데, 2번째로 표를 많이 받은 사람을 부반장 시킨다고 해서 네 이름을 못 적었다. 미안해."


결과를 보고는 실망했지만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를  전해주는 친구라니 그 시원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친구와의 첫 장면이다. 하지만 우리는 1년 동안 끝끝내 친한 친구가 되지는 못했고, 오며 가며 가끔 안부를 나누는 사이로 남게 되었다.


그랬던 우리가 매일 붙어 다니는 사이가 된 건 2학년이 되면서부터였다. 학년이 바뀌면서 1학년 때 같이 다니던 친구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새로 배정된 반에는 아는 친구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낯이 익은 사람이라곤 친하지 않았지만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 2명이었다. 우리는 자연스레 같이 붙어 다니게 되었고, 3반에도 우리처럼 3명이서 새롭게 그룹을 이루는 친구들이 있었다. 어떻게 6명이 한 그룹이 되었는지는 자세히 기억이 안 나지만 3명에서 6명으로 모이는 횟수가 잦아지고, 어느새 우리는 인사만 나누는 사이에서 매일 같이 붙어 다니는 사이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친구와 나는 감정선이 아주 비슷했다. 같은 포인트에서 울고 웃었고, 같은 포인트에서 감동을 하곤 했다. 성격도 취향도 좋아하는 것도 많이 닮아 우리는 자주 붙어 다녔다.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는 계속 붙어 다녔고, 학교 내에서도 우리가 절친한 사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언제나 제일 친한 친구로서 곁에 머무를 것만 같았는데, 친구와 나 사이에도 틈이 생기는 사건이 있었다. 오해가 있었고, 그 오해는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내었다. 완전히 관계를 회복하지도 못한 채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고, 서로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다. 그 이후로 친구와 나의 삶은 선명하게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대학 생활에 완전히 빠져있던 나와 달리 친구는 어린 나이에 결혼하고 엄마가 되었다. 사는 거리가 멀어졌고 삶의 패턴이 많이 달라졌기에 만나는 횟수도 연락하는 횟수도 점점 줄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서로 잊힐 때쯤이면 연락을 해서 안부를 나눴다. 어떨 땐 반년 넘게 연락이 끊기기도 했지만, 다시 서로를 찾았다. 특히 라일락이 피는 4월이면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서로를 기억해냈다. 중학교 시절, 봄이면 학교 근처 큰 라일락 나무 아래에서 친구와 코를 킁킁거리곤 했는데, 그때 그 향기가 매년 우리를 불러온 것.



그런 친구와 6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낯선 동네에서.

우리는 지방에서 막 서울로 온 중학생 아이들처럼 서울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낯선 동네를 탐방했다. 평소에 안 먹어봤던 새로운 음식도 먹고, 석촌 호수를 따라 한 바퀴 산책도 했다. 남쪽 지역에 살고 있어 서울은 익숙하지 않은 친구가 석촌 호수를 보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우와 엄청 예쁘다. 호수 봐봐!! 서울에 이런 풍경도 있구나."라며. 그 모습을 보자 중학교 때 우리가 떠올랐다. 작은 것에도 감탄하고 감격을 했던 우리의 모습이. 여전히 작은 것에도 기뻐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이 있음에.


짧은 산책을 마치고 친구와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평일 오후, 그것도 뭔가 애매한 오후 2시에 너와 서울 어느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아."


그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6년 만에 만나 어쩌면 낯설 법도 한 우리가 낯선 공간에 앉아 그 어느 때보다 친숙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나 또한 시공간을 초월한 기분이 들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만났지만, 서로가 익숙할 수밖에 없는 건, 여전히 닮아 있는 모습 때문이었다. 여전히 나를 잘 아는 친구였기 때문이다.


"요즘도 날씨에 따라 기분이 많이 바뀌나?"

친구가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당연하지. 나는 여전히 아무 일 없어도 날씨가 화창하면 기분 좋고, 흐린 날에는 그냥 우울해."라고 답했더니


"나도 그렇다. 예올아, 우리 같은 사람은 감정의 파고가 높아 늘 불안정하잖아.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늘 일정한 감정 상태로 잔잔하게 머무는 사람이 곁에 필요해."라고 말했다.

친구의 답에서 우리가 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됐는지 알게 되었다. 친구와 나의 곁에는 감정의 파동이 크지 않은 단단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기에.


이야기를 나누다 잠시 고요해진 순간,

친구가 이야기를 꺼냈다.


"왜 그런 사람 있잖아. 오디오가 안 비는 사람. 그런 사람 만나면 난 좀 힘들다. 조금의 틈이 있어야 좋다. 그 빈 시간도 어색하지 않고 편한 사람이면 더 좋고."


"맞아. 우리의 성향이 그렇지. 말은 많지 않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한 시도 놓치지 않고 엄청나게 집중하잖아.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을 만나면 어느새 우리 에너지가 다 소진돼버리는 거지. 그래서 힘들어 나도."라고 답했더니 친구가 격하게 맞장구를 쳤다.


별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친구가 한 번씩 툭툭 던지는 말에 마음의 갈증이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누군가에게 내비치지 못한 내 마음을 옆에서 하나하나 읽어줘서 또 하나의 나를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친구의 말에 한동안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근데, 예올아. 너는 진짜 하나도 안 변했다."


"응? 아니야 나 엄청 바뀌었어. 시간도 많이 흘렀잖아."


"아니, 그러니까 외면은 많이 바뀌었지. 화장도 하고, 꾸미기도 하니까. 근데 그런 거 말고. 왜 사람들이 가진 고유의 색채 같은 거 있잖아. 고유의 분위기, 성향 같은 거. 나이가 들면서 많이 바뀌기도 하는데, 너는 여전히 그대로야. 어렸을 때 내가 생각했던 너의 모습이나 분위기가 그대로 있어."


그 말을 듣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어쩌면 친구는 큰 뜻 없이 이야기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말에 깊고도 깊은 위안을 받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순수함은 물론 내가 갖고 있던 신념과 성격 또한 많이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깨가 무거워질수록 생각과 표정은 점점 더 변해갔고 그런 나의 모습에 실망하고, 자책하기도 했다.

 

근데 오랜 나의 친구 눈에는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큰 위안으로 다가왔다. 내가 변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실은 그리 크지 않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나'라는 속성의 큰 틀은 변하지 않은 채, 그 안에서 여러 가지의 변주를 주고 있었던 걸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때론 스쳐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큰 힘을 얻는다.

작은 문장 하나가 깊은 울림을 주고 가기도 한다. 그런 말은 나도 알지 못하는 마음속 깊은 곳에 저장되어 삶의 양분이 되어준다. 삶을 계속해서 지탱해 나갈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


그날 친구와 나눈 이야기는 오랫동안 내곁에 머무를 것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언어가 되어.

그 따스한 문장을 품고 또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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