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복용하기 2

공감과 문제 해결 사이의 우선순위

by 채플힐달봉

앞서 몇 번 언급했던 화음이의 약 거부증은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문제 해결은 대체로 약간의 변환만으로 가능한 것인데 모든 상황에서 감정이 먼저 반응하는 나에게는 그 간단한 변환으로 가기까지가 늘 지지부진하고 멀게만 느껴진다.

땅이 꺼질 듯한 한숨으로 주저앉아 하늘을 향해 울어대는 것이 나의 첫 번째 반응이다. 이런 패턴은 결혼 전부터 남편에게 지적받아 왔었다.

“우는 것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아.”

둘만 있을 때에야 우는 것도 하나의 방편, 일테면 남편의 감정을 자극해서 사과를 받아내거나 나에 대한 연민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아이들이 생기고 난 후로는 눈물이 무기가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눈물의 연장은 나를 오히려 깊은 우울에 빠지게 했고 그 영향은 고스란히 남편과 아이들에게 전해졌다.

집안의 분위기는 엄마의 기질에 달렸다는 말이 가히 과장만은 아닌 것 같다.

엄마라는 직무가 맡겨진 이상 나는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다. 속절없이 달려가는 시간들 속에서 나는 어떻게든 맡겨진 그 책임을 잘 수행해야만 한다.

엄마라는 이름은 나를 성숙시키고 눈물의 소녀를 자라게 만들었다. 타고난 기질을 극복해야 하는 것도 엄마의 수행 과제 중 하나다.

감사하게도 나에게는 포기를 모르는 교련관이 삑삑 호루라기를 들고 항시 대기하고 있다.

남편과 나는 서로 다른 기질적 성향에 끌려 사랑에 빠졌었다.

남편은 과학을 탐닉하는 물리학도로 사물을 관찰하고 분석하면서 창조세계에 대한 디테일에 감탄하는 반면, 나는 문학을 사랑하는 국문학도로 전체의 조화와 막연한 분위기에 심취하는 감상적인 소녀였다.

감성과 이성의 만남은 참 조화로울 수도 있지만 불일치의 깊은 수렁에 빠져 서로를 지옥으로 바라보게 만들 수도 있다.

다행히도 우리는 결혼 20년 차를 살아내면서 일치와 조화를 이루는 법을 터득해 갔다.

화음이의 이름이 Harmony(하모니)인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 것이다.

화음이를 키우면서 우리 부부의 숨겨진 불일치마저도 수면 위로 드러나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건강한 고통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NLT 버전의 시편 133편은 우리의 불일치가 하모니 안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변모하는지 잘 묘사해 주고 있다.

How wonderful and pleasant it is when brothers live together in Harmony!


약 거부증을 해결해 가는 이번 과정에서도 우리의 불일치는 한번 더 충돌을 겪었다.

화음이는 약을 먹을 때마다 나를 때렸다. 발로 내 배를 걷어찼고 손목을 깨물었으며 손을 마구 휘저어 내 뺨을 때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 역시 속에서 천불이 나서 꽥꽥 소리를 지르고 아이의 등짝에 선명한 손자국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을 겪고 나면 기진해서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인내하지 못한 내 조급한 성미에 다시 한번 실망하여 고개를 파묻고 눈물을 찔끔거렸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모두 알고 있는 남편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지켜볼 뿐이었는데 나는 그의 침묵과 방관이 아주 고약스럽고 심술 맞아 보였다.

자식에게 얻어맞는 ’ 아내’를 왜 너는 보호하지 않는가. 눈물 흘리는 나를 왜 힘껏 끌어안아 주지 않는가. 너의 침묵을 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나를 때리는 아이보다 침묵으로 지켜보는 남편이 더 괘씸하고 미웠다. 그런 전쟁 같은 며칠을 보내고 난 후 남편은 대뜸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화음이가 주사기로 물 먹는 거 좋아하잖아. 약 먹는 시작과 끝에 주사기를 두 개 추가해서 물을 먹여보는 건 어때?”

화음이는 세 종류의 약을 복용 중이라 주사기 세 개를 사용하는데 물을 채운 주사기를 두 개 추가해서 아이를 속여보자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한 남편에 대해 하나님께 괘씸죄로 고소 중이었기 때문에 남편의 발언에 순순히 응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응, 그렇게 한 번 해 보자.” 했던 것은 내 치졸한 고소장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이없게도 며칠 동안의 피 터지는 전쟁이 무색할 만큼 남편이 제안한 단순한 해결책은 단번에 우리 가정에 평화를 가져왔다.

화음이는 보라색 주사기에 넣어진 차가운 보리차에 홀려 뒤따르는 나머지 세 개의 약을 거부 없이 받아들였다.

’앗, 속았다’ 생각할 때 연이어 따라오는 차가운 보리차 한 모금에 다시 ‘응? 아니었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 것이다.

남편은 자신의 해결책에 꽤나 만족감을 드러냈다.

숙제를 해 낸 아이가 엄마에게 달려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칭찬을 고파하는 것처럼 남편은 나를 향해 으쓱 어깨를 올려 보였다.

그 초롱거리는 눈빛이 참 아니꼬웠다.


남편의 그간 침묵은 해결안을 모색하는 컴퓨터의 로딩 시간이었던 셈이다.

그는 가만히 우리 모녀의 치고받음을 관찰했고 화음이의 생태와 습관을 조합하던 중이었다.

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나 역시 남편의 그런 과정들을 인정하고 고개 끄덕일 수밖에 없지만 사실, 내가 한창 절망의 진흙을 나뒹굴 때에는 내 감정에 한 번의 공감을 던져주지 않는 남편의 무심이 내내 상처로 남게 된다.


“그냥, 다가와서 힘들겠다, 한 마디하고 어깨 두드려 줄 수는 없었어?”

“그게 무슨 소용이야. 문제를 빨리 해결하는 것이 너를 구제해 줄 가장 좋은 위로 아니야?”

“그래도! 그래도 내 눈물 한 번 닦아내줄 수는 있는 거잖아.”


이번에도 우리의 불일치, 공감과 문제해결 사이의 우선순위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도 남편이 말한 것처럼 문제 해결이 무엇보다 나를 수렁에서 빨리 꺼내줄 동아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번번이 그의 방식이 서운하다.

결혼 20년 차를 기어이 살아냈으면서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끝내 남아있는 기질적 특성이 참 징글징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