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에는 재능이 없다
해가 일찌감치 중천에 떴다. 커튼이 얇은 건지 볕이 너무 잘드는 건지. 자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소파에서 굴렀다.
나는 그대로 방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서, 뒷통수를 벅벅 긁으면서 내가 처한 상황을 하나둘 기억해내기 시작했다. ‘그렇지. 나는 러시아에 있었어’ 같은 큰 정보부터. ‘시베리아 한복판에 있는 도시에서 코로나에 걸려서’, ‘묵고있던 숙소 호스트가 빌려준 낡은 아파트에 신세를 지는 중이었지’ 까지.
…역시 암울하다. 아무래도 뭔가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에서 가스레인지를 사용해보는 건 처음이었다. 다른 집도 이런 건지 라파엘이 구식을 좋아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이곳 가스레인지에는 정말 ‘가스만’ 나왔다. 불은 옆에 있는 성냥으로 그어다가 수동으로 붙여야 한다. 그런데 이걸 잘못 했다가 손에 불이 옮겨 붙어서, 진짜 ‘파이어펀치’가 돼버리면 어떡하지… 왠지 겁이 나서 멀쩡한 성냥을 세 개나 낭비해버렸다. 미안해요, 라파엘. 물론 라파엘은 쿨한 상남자이기 때문에, 성냥 몇 개 없어진 것쯤은 신경도 안 쓰겠지만.
장볼때 사왔던 소시지를 몇 개 구워서 주스와 함께 먹었다. 어째 이상하게 탄다 싶어서 들춰보았더니 하나하나 종이 비닐이 씌워져 있어서 황급히 벗겨내야했다. 소시지 자체는 육즙이 풍부해 가격치고 맛이 괜찮았다.
마지막 하나를 집어 입에 물고 있을 때. 나는 무심결에 휴대폰 잠금을 풀어봤다가 캘린더 알림이 뜬 걸 보았다… 어. 뭐야. 오늘 일정 같은 게 있었나? 화면을 가까이 당겨서 보니 ‘실업급여 신청일’이라는 일곱글자가 떡 하니 적혀있었다.
‘아차!’
나는 소시지 토막이 목에 걸려 하마터면 질식사할 뻔 했다.
내가 어째서 실업급여를 받고 있는지를 설명하자면 쓸데없이 긴 이야기가 된다. 오래전에 책 계약은 되어있었지만 출판이 되지 않아서, 지난 몇달간은 실제로 실업상태이기도 했기 때문에 고용보험 가입이력 자체는 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
문제는 이 실업급여라는 것이 한 번 신청해놓으면 고용상태로 돌아갈 때까지 돈이 따박따박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 달에 한 번씩 온오프라인으로 실업신고라는 행정절차를 해야 지급된다는 점이다. 취직한 사실을 속이고 실업급여를 받아가는 짓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나. 혹시나해서 ‘예전에 맺은 출판사와의 계약도 고용으로 치느냐’고 전화로 물어보았더니’ 아, 그건 상관없어요. 실업급여 기간 중에만 노동으로 소득이 발생하지 않으면 됩니다’ 라는 답변을 받았다.
하기야 프리랜서 작가는 웬만해서 어디 고용되었다고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러시아 소설처럼 단어수대로 고료를 받는 것도 아니고. 책이 나오면 팔리는만큼 인세를 받을 따름이다. 적어도 그 때까지는 ‘일은 하지만 소득은 없는’ 노동형실업자 신세로 역설적인 시기를 보내야한다. 어쩌면 이걸 구직기간이라고 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 공백기간에 고용보험의 혜택을 받아보자는 것이 몇 달 전 나의 아이디어였고, 한 달하고 반 정도 급여를 받으며 (당장은 무급인)원고에 집중할 수 있었다.
허나 이 점에 대해서 나는 여러가지 오산을 했다. 일단 러시아에 이렇게 오래 있게될 줄 몰랐고, 일정이 불확실하기는 해도 적당히 현지에서 인터넷 연결만 되면 처리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것이다. 실업급여 악용 방지를 위해 해외에서 접속을 못하도록 해놓았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휴대폰 유심까지 바꿔 끼워가며 별의 별 짓거리를 하고 나서야 겨우 알아낸 사실이었다.
‘그럼 이렇게 내 실업급여가 날아가는 건가? 그렇게 되면 돌아가자마자 택시라도 몰아야겠는데…’
—다행히 신청일으로부터 14일내로 센터를 방문하면 날짜 변경이 가능하다는 정보를 찾았다. 한 달치 실업급여라고 하면 돈이 한두 푼이 아니다. 러시아에서 자살하고 갈 게 아니라면—물론 자살을 하고나면 갈 필요가 없겠지만—2주 이내에 돌아가서 행정절차를 밟는 수밖에는 없다. 공교롭게도 이 날로부터 14일이 지난 그 날짜는 3월 8일이었고, 내가 임시로 예약해둔 귀국행 비행기 도착 당일이었다. 현지시각 기준.
‘어떻게든 쫓기게 되어있구나. 내 인생이라는 것은…’
이렇게 쪼들리는 상황 자체는 익숙하다. 다만 익숙하다고 해서 아무 감정이 샘솟지 않는 것은 아니다. 뭐든 적당히 풀려줄 생각이 없는 삶에 넌더리가 난다. 진짜 염병하고 환장할 지경이다.
앞으로의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점 때문에, 나는 일도 휴식도 편히 할 수 없는 처지가 돼 있었다. 그때 영사관 직원에게서 문자가 왔다.
‘몸상태는 좀 어떠세요. 한 번 더 검사를 받고 싶으면 말씀하세요. 전화로 다시 예약해드릴게요’
—생각해보니 그렇다! PCR검사에서 도로 음성이 나오기만 하면,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계속 격리돼있을 필요도 없지 않나?
나는 정말로 몸상태가 많이 좋아진 참이었다. ‘이정도면 바이러스 같은 건 없어진지 오래겠지’ 라는 판단이 서서, 조금 이르긴 하지만 곧바로 검사를 받아보기로 했다. 직원분은 흔쾌히 예약을 다시 잡아주었고, 나는 예약시간인 오후 세시 삼십분에 맞춰 한 번 더 검사소를 찾았다.
검사소는 여전히 인적이 뜸했다. 러시아에서는 돈주고 PCR검사 따위를 받는 게 이상한 일인가, 여기선 내가 유난을 떠는 건가 싶은 마음이 생겨 태도가 쭈그러들었다. 검사 자체는 역시 금방 끝났고, 결과는 다음날 오후에 나온다는 말을 듣고 돌아나왔다.
돌아가는 택시를 잡으려고 지도앱을 켰더니, 도보로 오 분 거리에 맥도날드 지점이 있는 것이 보였다. 실업급여 문제를 알아보느라 점심도 걸러서 마침 배도 고팠다. 뚜벅뚜벅 걸어가니 익숙한 아웃테리어가 보였다. 키릴문자로 쓰인 맥도날드Макдоналдс도 낯이 익었다. 햄버거 가격은 우리나라와 비교해 엄청 저렴했다. 점심시간도 아니었는데. 빅맥 단품이 백삼십 루블…우리돈으로 이천몇백 원밖에 하지 않았다. 나는 세트를 주문했다. 호출한 택시가 도착할 때까지 테라스 자리에서 감자튀김을 몇 개 집어먹었다.
아파트에 돌아와 식사를 마치고 잠들었다. 식곤증과 불면증이 공존가능하다는 점은 꽤 흥미롭고 짜증스럽다. 오후 일곱 시에 일어나면 영 하루가 하루같지 않다. 또 한 번 쫓기는 마음으로 노트북을 펴서, 추가마감 원고를 작업하고 밀린 일지를 쓰다 새벽을 맞았다. 골이 아프면 손가락 관절을 세워 관자놀이를 찔러 누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