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스스로 가둬지는 일이다
열시 반쯤 일어났다. 복사 붙여넣기 한 것 같은 문장이지만 전부 일일이 쓴 것임을 알려둔다. 당연히 사실이기도 하다.
몸상태는— 확실히 최악의 고비는 넘긴 것처럼 보였다. 일어났는데 TV 전원이 제멋대로 켜져있어서 약간 무서웠다. 자면서 실수로 리모콘을 누르기라도 했겠지. 싶었는데 리모콘이 침실문 바깥에 있는 걸 발견했다. 나는 러시아정교의 하나님에게, 안 그래도 힘에 부치는 상황이니까 이상한 장난 좀 치지말라고 했다. 사과같은 건 듣고 싶지 않다. 이런 건 재발방지가 중요하다.
남은 식재료를 입구멍에 때려박다시피 하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알렉세이는 체크아웃시간 십분 전에 도착했다. 같이 온 사람은 여자친구나 함께 일하는 동료 같았는데, 집을 같이 정리할 사람인듯 했다.
나는 일단 ‘설거지 못해서 미안해’ 라는 말을 손짓발짓으로 전했다. 그랬더니 ‘아 이런 건 괜찮아’ 라는 표정으로 따봉을 해보였다. 그런 상황에서는 따봉만큼 마음 편해지는 제스처가 없다.
또 내게 번역앱을 써서 ’있는 동안 편하게 지냈어?’ 라고 묻길래, 나는 쌍따봉을 치켜세웠다. 알렉세이는 크게 좋아하는 내색을 했다. 나는 보증금을 돌려받고, 짧은 작별인사를 하고, 키를 돌려준 다음 밖으로 나왔다. 앱으로 부른 택시는 내가 있는 위치를 찾는데 길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러시아에는 일방통행 도로가 많다.
나탈리아가 알려준 주소를 앱에 정확히 입력했지만, 나는 도착하고 나서도 ‘진짜 여기가 맞나’ 싶어서 긴가민가했다. ‘와르르맨션’ 같은 느낌의 건물들이 ㅁ 모양으로 배치돼있고, 그 중간에 눈덮인 공터와 이파리없고 키가 큰 나무들 몇 그루, 그 옆에 어린이용 놀이터가 장식처럼 끼여든 모습이었다.
라파엘은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기무섭게 전화가 왔지만, 통화품질이 좋지않아 나도 라파엘도 서로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건물 한 바퀴를 빙빙 돌다 우연히 마주친 것은 다행이었다.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라파엘이 내 캐리어 가방을 들고, 보디가드처럼 앞장서서 맨 꼭대기층에 있는 아파트 입구까지 안내해줬다. 이건 숙박료를 따로 주는 것도 아닌데. 말은 안 통할지언정 진심으로 내 몸상태를 신경써준다는 느낌이었다. 부처같은 표정에 말도 많지 않지만, 라파엘에게는 그만의 표현방법이 있었다. 무뚝뚝한 우즈벡 아저씨. 나탈리아가 그의 어떤 부분에 매력을 느꼈는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나탈리아가 ‘남는 아파트가 있다’고 이야기를 했었기 때문에, 나는 내심 ‘또 하나의 숙박용 부동산’으로 마련해둔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아파트의 위치로 보나 겉보기로 보나 ‘여행객들을 묵게 해주고 돈을 받는다’는 발상이 불가능한 곳임을 깨달았다.
도심과 꽤 떨어져있는 위치에 있었다. 주위에 높고 화려한 건물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제까지 있던 곳이 개발하다 손을 놓은 신도시 분위기였다면, 이곳은 내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주공임대아파트와 더 비슷한 느낌이었다. 재개발은 고사하고 그곳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일종의 투쟁이었던 곳. 빈민가까지는 아니지만 삶을 아름답게 느낄 건덕지가 거의 없는 장소 말이다.
하여간 그곳은 일반 여행객들이 오지 않는, 정말 대다수에 속하는 러시아 사람들이 살아가는 구역 같았다. 그런데에서 나같은 인간이 며칠을 버틸 수 있을지… 뭐, 할 수밖에 없다. 호의를 베풀어달라고 부탁해놓고, 이제와서 ‘저, 여기는 침대도 없고, 인터넷도 안되고, 책상도 없고, 뭣보다 너무 낡았는데… 그냥 다른 데서 지낼래요’ 하고 말을 바꾸는 것도 엄청난 결례 아닌가. 당장은 무료로 눈붙일 곳이 생긴 것만으로도 감사해야한다. 일찌감치 음성이 나오지 않는 이상 최소 한 주동안은 격리 생활을 해야할 텐데. 숙박비라는 게 한두푼 나가는 것도 아닌데다가 PCR검사에도 천육백루블이 든다. 요컨대 여기서는 최대한 비용을 줄이면서 격리생활을 버텨나가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옵션인 것이다.
좋은 점도 없지는 않았다. 우선 창문이 커서 해가 잘 들었다. 중앙난방으로 덥혀진 공기 덕분에 춥지도 않았고, 수건이 없어서 그렇지—안쓰는 아파트라고 했으니 당연한 거지만—온수도 잘 나오는 편이었다. 블루투스 스피커도 있었다. 예전에 쓰던 보스 사운드링크…랑 똑같은 디자인에 무명 브랜드의 저가 제품이었다. 사운드 자체는 신통치 않지만 귀에 꽂지 않고도 음악을 틀어놓을 수 있는 건 큰 장점이다. 나는 비틀즈의 애비로드 앨범을 틀어놓고, ‘Something’을 따라불렀다. 병이 잦아들어서인지 기분도 훨씬 좋아졌다.
거실바닥에 헤링본 무늬가 깔려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나무인 줄 알았는데 그냥 장판이었다. 꽃무늬 천으로 표면을 덧댄 소파가 좌우로 놓여있었고, 침대가 없으니 그 중에서 가장 길고 옆구리가 터져 솜이 보이는 소파 위에서 잠을 자야 할 것이었다. 거실 정면으로는 좌우로 넓은대신 앞뒤가 좁은 발코니가 있었다. 정남향으로 창이 나있어 볕이 엄청나게 잘 들었다. 대낮에 그 옆에서 TV를 보고 있으면 살이 다 탈 것만 같았다.
발코니 창살은 목재로 돼있었다. 비바람을 많이 맞은 것 같은 낡은 나무 재질이었는데, 나로선 그것이 이 아파트의 ‘전근대적 분위기’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것같이 보였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못사는 집이라고 해도 창살은 금속으로 해놓는 것이 일반적이니까… 글쎄. 좀 위험하지 않나? 쇠망치 같은 걸로 두들기면 퍽 하고 부숴질 것 같은데. 현관문 잠금은 삼중오중으로 철통—심지어 진짜 철문이다—같이 해놓으면서 창살은 나무로 해놓는다니… 밸런스가 좀 안 맞는 것 아닌가. 아무래도 비용문제일까? 그런 건 미리미리 생각 좀 해놓으라고.
나는 사실상 ‘마감을 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분량을 뽑아낸 상태였기 때문에,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편집자에게 연락을 했다. 글도 잘 뽑혔기 때문에 나름 자신만만한 느낌도 있었는데, 그게 편집자 뇌리의 무언가를 잘못 건드린 건지 “아무래도 한 편 정도 작업을 더 해주시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나를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건가…?’
다만 편집자가 어떤 이유로 책 전체의 밸런스를 이야기할 때는, 나도 모르게 ‘그러게 한 편 정도 더 쓰면 좋긴 하겠다’하고 수긍이 가버렸기 때문에. 결국 나는 한 꼭지를 더 써서 주기로 했다. 최종적으로는 더 좋은 책을 내기 위한 과정이니까. 내가 쓰는 글과 그 글이 실릴 책의 완성도에 대해, 이만큼이나 신경을 써준다는 건 좋으면 좋았지 결코 나쁜 현상은 아닌 것이다. 문제는 내게 그럴만한 기력이 남아있는가의 여부이지만.
라파엘의 아파트에는 작은 부엌과 테이블이 있었다. 꾸며진 모습이라고는 없이 자연스러운 가정집 주방이었다. 지금 당장 근처에 있는 아무 러시아 가정집에 콱 침입해가도 그 비슷한 광경이 나올 것 같았다.
나탈리아는 ‘음식이냐 약 같이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지만, 그녀나 라파엘이나 엄연히 자기 업무가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사는 아파트에서 여기까지 왔다갔다하게 만드는 것도 미안한 일이고 해서, 나는 가장 가까운 식료품점을 찾아 간단히 장을 봐왔다.
간단히 조리해먹을 수 있는 햄과 컵라면, 이리터짜리 생수와 주스, 빵 같은 것들을 봉투에 싸 돌아오면서, 나는 ‘러시아에서 장보는 것도 좀 익숙해졌네’ 라고 생각했다. 상황이 이렇게 굴러가다보니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이런 타지에서 장보기 스킬이 상승하는 것은 또 새로운 기분이다.
장을 보고 와서 컵라면을 하나 먹어 치웠다. 세수와 양치를 하고 소파에 누워 한숨 돌리다보니 깜빡하고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해가 지고 없었다. 발코니 밖으로 눈쌓인 풍경이, 빛바랜 가로등 불빛이 단지 중심을 비추는 모습이 슬그마니 보였다.
‘으으… 뭐지? 이 자괴감은’
그러고 보니 오늘은 생존하는 것 이외의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몸이 그렇게 아픈 것도 아니고, 어디로 열심히 이동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이곳에 자리를 잡는 일만으로 하루를 다 소비해버렸다는 것이 개탄스러웠다.
나는 블루투스 스피커를 켜서, 내 휴대용 디바이스에 저장되어있는 음악 중 가장 웅장한 것을 틀어놓았다. 이윽고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라파엘의 아파트 거실을 가득 채웠다.
‘이제 좀 낫네’
새벽까지 글을 쓰다가 약을 먹고 잠들었다.
(계속)